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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탯줄 단 채 버려진 아이를 품어준 집 [유령아이 리포트]

입력 2021. 05. 11. 17:26 수정 2021. 05. 12.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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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아이들이 있어야 할 곳 ①그룹홈에서 지내는 율희 이야기
율희(5·가명)는 2015년 3월 31일 경남 양산시의 한 아파트단지 계단에 유기됐다. 어린이집 교사가 발견해 대학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시점이라 이름표에 ‘무명 아기’라고 적혀 있다. 보호자의 요청에 따라 아기 얼굴은 흐리게 처리했다. [한미나 씨 제공]

봄이 피어나던 2015년 3월 31일 오후 4시30분. 어디선가 목쉰 갓난아이의 울음이 집요하게 들려왔다. 경남 양산시의 한 어린이집 교사는 귓전에 맴도는 소리를 쫓아 밖으로 나갔다. 울음이 이끈 곳은 맞은편에 있는 아파트단지 1층. 그야말로 핏덩이가 티셔츠에 감싸인 채 계단에 놓여 있었다. 교사는 젖을 재촉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와 수유한 후 오후 6시 양산경찰서에 신고했다.

아이는 건강 상태 확인을 위해 곧장 양산부산대병원으로 옮겨졌다. 아이의 배꼽에는 30㎝쯤 되는 탯줄이 긴 콩나물마냥 뻗어 나와 있었고 끝에는 불로 지진 거무스름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의사는 “가정에서 당일 출산한 아이로 추정되며, 보살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생모가 탯줄을 지진 것으로 인해 오히려 감염을 막았다”는 소견을 내놨다. 기형의 흔적은 없었고 체중과 혈당 모두 정상이었다.

경찰은 3개월 만에 수사를 종결했다. 아이를 발견한 장소가 신축 아파트였기에 CCTV 영상을 분석하면 친모를 찾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경찰을 비롯한 담당자들은 ‘아이의 인생을 생각했을 때 무책임한 부모에게 돌려보내는 것이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이는 제 의견을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뿌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잃었다.

[그래픽=권해원 디자이너]
‘무명아기’에게 붙여준 이름

그룹홈 시설장 한미나(44) 씨가 아동보호전문기관으로부터 “아이를 봐줄 수 있냐”는 연락을 받은 건 2015년 4월 7일이었다. 급히 병원 신생아실에 가니 아이는 단잠에 빠져 있었다. 머리맡 이름표에는 이름 석 자 대신 ‘무명 아기’라고 적혀 있었다. 수년간 그룹홈을 운영했지만 이름 없는 아이를 본 것은 처음이라 목이 메었다. 아이와 눈을 마주한 순간부터 친딸처럼 여겼다. 처음으로 배냇저고리를 장만하고 수유하는 법을 배웠다. 24시간 떨어져 본 적이 없다.

한씨는 출생신고를 서둘렀다. 기아(부모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아동)의 경우 지방자치단체에 직권으로 출생신고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선례가 없던 지자체는 한씨에게 “(한씨가) 법원에 직접 성과 본 창설 허가를 신청해야 한다”고 잘못 안내했다. 한씨가 여러 번 확인한 끝에야 지자체는 출생신고의 의무를 인지했다. 결국 경남 양산시 물금읍장이 2015년 5월 1일 울산지방법원에 직권으로 성과 본 창설 허가 심판 청구를 내 허가를 받았다. 이와 동시에 한씨는 후견인 선임을 신청했다. 아이의 이름은 작명소에서 받은 ‘한율희(5·가명)’로 지었다.

율희는 원래 일시보호소에 보내질 운명이었다. 방임·학대·빈곤 등 가정 해체로 보호가 필요한 아동은 일반적으로 양육시설로 보내진다. 하지만 경남 양산시엔 이런 시설이 없어 차순위였던 그룹홈이 선택됐다. 율희에겐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유엔 아동권리협약은 아이들을 가정과 유사한 환경에서 보호하도록 권고한다. 헤이그 국제아동입양협약도 ‘시설 보호는 마지막 수단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입양→위탁가정→그룹홈→시설 순으로 권장하지만 한국에선 절반 이상이 시설로 보내지는 것이 현실이다.

아기자기한 장난감과 소품으로 꾸민 율희의 방. 박로명 기자
제2의 집이라지만…지원은 턱없이 부족

율희는 올해 다섯 살이다. 아기자기한 인형과 소품을 좋아해 방을 온통 파스텔 색상으로 꾸몄다. 화사한 발레복이 예뻐 “발레를 배우고 싶다”고 졸라 학원을 다니고 있다. 한씨는 “예쁘게 하고 다녀서 이웃들이 그룹홈 아이인지 모를 정도”라고 했다. 율희 앞으로 나오는 기초생활수급비는 월 50만원. 식비와 생활비, 학원비 등 모든 양육비용이 포함된 금액이다. 곧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하는 율희에겐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그룹홈협의회가 전국 420개 그룹홈을 대상으로 올해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한 176곳 가운데 84.7%(149곳)가 지난해 생계비 지출이 전년보다 늘었다고 답했다. 큰 차이 없다는 응답은 14.2%(25곳), 줄었다는 0.6%(1곳)에 불과했다. 한씨는 “아이 1명당 최소 월 30만원의 식비를 지출하는데 남은 20만원으로 의류, 생필품을 구입하고 교육비를 충당하기엔 부족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씨는 그룹홈을 운영하고 있지만 “현재 보호 체계 안에선 위탁가정이 제일 이상적”이라고 말했다. 어릴수록 안정적인 환경에서 양육해야 하지만 그룹홈은 자금 사정이 열악하고 인력 이동이 잦아서다. 일반적으로 그룹홈은 시설장 1명, 보육사 2명이 7명의 아이를 24시간 365일 돌보는 체제로 운영된다. 그런데도 그룹홈 종사자는 사회복지사와 달리 호봉제가 인정되지 않아 수년을 일해도 박봉을 감내해야 한다. 보육사가 갑자기 그만두는 날엔 시설장이 쉼 없이 7명을 보살펴야 한다.

한씨는 “그룹홈은 급여가 적다 보니 보육사가 경력을 쌓고 이직하는 경우가 많다”며 “인력이 고정적으로 유입되지 않아 시설장이 희생해야 유지되는 구조”라고 말했다. 이어 “시설장 월급은 그대로 두더라도 보육사들의 처우부터 개선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14년부터 경남 양산시에서 그룹홈을 운영하며 7명의 아이들을 책임지고 있는 시설장 한미나 씨. 박로명 기자
그룹홈을 함께 떠날 그날까지

한씨는 마음 같아선 “율희를 입양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장애를 안은 채 유기된 최현우(5·가명)를 입양해 충족 기준이 한층 까다로워졌다. 율희를 입양하면 모든 정부 지원이 끊겨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도 고민이다. 그는 “만 15세가 된 율희가 법원에서 자신의 입양에 대한 의사를 밝힐 수 있을 때가 되면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감수성이 풍부한 율희는 가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한씨가 율희를 토닥이며 “너무 예쁘다”고 칭찬하면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하루는 “엄마(한씨)가 할머니가 돼서 죽으면 어떡하지”라고 물어보며 와락 눈물을 쏟기도 했다.

“율희를 스무 살까지 정성껏 키울 겁니다. 그날이 오면 같이 손을 잡고 그룹홈을 떠날 거예요.”

nyang@heraldcorp.com

dodo@heraldcorp.com

헤럴드 디지털콘텐츠국 기획취재팀

기획·취재=박준규·박로명 기자


일러스트·그래픽=권해원 디자이너

궁금했습니다. 왜 출생 사실이 기록되지 않은 아이들이 끊임없이 등장할까. 출생신고는 하나의 행정적 절차이지만, 동시에 세상에 난 존재가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누릴 아동의 권리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최소의 권리에서 비껴난 아이들은 존재합니다. 우린 그들을 ‘유령아이’, ‘투명아동’, ‘그림자 아이들’ 이라고 부릅니다.
헤럴드경제는 전국 곳곳에서 발견된 출생 미등록 아동의 사례를 수집했습니다. 온통 ‘어른들의 이유’들로 아이의 출생신고는 미뤄지거나 무시된 걸 확인했습니다. 취재팀은 개별 사례의 특수성에 매몰되기보다는, 보편적인 배경과 제도적 모순을 발견하려 애썼습니다. 그간의 취재 결과를 바탕으로 4부에 걸쳐 ‘아이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 기획보도는 ‘누락 없는 출생등록, 모든 아동의 출생등록’을 목표로 활동하는 보편적 출생신고 네트워크(UBR Network)와 함께 조사하고,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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