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산을 사랑했던 식민지시대 일본 등반가

글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명예교장 입력 2021. 5. 13. 10:18 수정 2021. 5. 13.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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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산들' 서평
집선봉 C2봉을 등반하는 이즈미 세이치(사진 위쪽 선등하고 있는 사람)
이즈미 세이치泉靖一는 1915년 일본 동경 조시가야에서 태어났다. 1927년 경성제국대학교에 부임한 부친을 따라 12세 때 조선으로 이주해 학창시절에 등산 활동을 한 산악인이자 문화인류학자다. 그는 가족들과 금강산 요사채寮舍寨에서 휴양을 하면서 산과 첫 해후를 한다.
그후 경성(서울) 주변의 암벽을 자주 오르던 그는 경성제국대학 일문학과에 진학해 산악부를 창립한다. 그의 학창시절은 산이 생활의 중심축에 놓였으며, 공부는 관심 밖이었다.
당시 한국은 근대등반이 개화하던 시기였다. 이 무렵 등산을 시작한 이즈미는 1945년 일제패망 후 귀국할 때까지 북쪽의 백두산에서부터 남쪽 한라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산과 암벽을 오르며 그 행적을 회고록으로 남긴다.
산과의 만남
이즈미가 처음 등산을 시작했을 때는 일본에서 유입된 스포츠 알피니즘의 시대적 흐름을 막을 수 없었다. 서울 근교 산들은 암벽등반을 하기에 적합한 화강암층의 훈련장이 많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는 조선에서 스포츠 알피니즘의 도화선이 된 것은 북한산 인수봉 초등정이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한국 근대 등반사의 계기가 되는 인수봉 초등정에 관해 <서울 근교의 산들>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만약 내 기억이 맞는다면 초등반은 임 아무개씨林茂(일본명 하야시시게루) 일행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라고 했다. 구체적인 초등년도와 동행자 등에 대한 언급은 없다.
중학교 3학년인 이즈미는 매주말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서울 근교 곳곳의 산을 혼자 올랐다. 그는 ‘경성(서울) 북쪽에 있는 북한산은 화강암층의 넓은 슬랩이 많아서 암벽등반 대상으로는 등반성이 높은 만만치 않은 산’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그는 등반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 독학으로 암벽등반의 기초를 배웠다. 조지D.아브라함의 <The Complete Mountaineer>를 교재로 활용해 자일 매듭법과 하켄, 카라비너 사용법,하강방법 등을 독학하며 실행했다.
그는 등반기술이 발전하면서 인수봉을 등반했고, 중학 3년 재학 중에는 백운대 남쪽 정면 벽에 두 명의 학우들(하라, 사카이)과 함께 새로운 길을 연다. 1933년 경성제국대학 진학 후 경성제국대학 예과 스키산악부와 1935년엔 경성제대 학생산악부를 발족시켜 1945년 경성제국대학이 폐교될 때까지 조선의 산에서 등반활동을 한다.
금강산 집선봉 암벽과 북조선의 산들
그는 경성 근교 산에서의 활동을 점차 북조선의 산으로 확대해 나간다. 마침 이 무렵 조선 거주 일본인들에 의해 ‘조선산악회(1931년)’가 결성된다. 중학생이었던 그는 그곳에서 경성제대의 다케나카요竹中要 교수와 조선철도국에 근무하는 이야마를 알게 된다. 당시 조선산악회에서 암벽등반을 하는 사람은 이야마가 유일했다. 이후 그와 함께 의기투합해 북조선의 산에서 암벽등반을 한다.
그는 동계 묘향산, 금강산 집선봉集仙峰 동북릉S-2, 채하봉, 두운봉, 차일봉, 관모연산, 부전고원, 백두산, 지리산, 한라산 등지에서 암벽등반과 동계 등반에 열중한다. 경성제대 재학 중인 1934년 3월 동계 관모봉 첫 등정에 성공한다. 그가 금강산 첫 산행을 경험한 것은 1932년이며, 이즈미가 겨울 산에 차츰 흥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부터다.
거대한 암벽군으로 이루어진 금강산 집선봉 능선에는 수많은 암봉(피너클)이 있고, 북면에는 해발 1,000m의 거대한 암벽이 노출되어 있다. 이 암봉들은 근대적 암벽등반 기술 없이는 범접할 수 없는 신비한 존재였다. 수년 동안 집선봉은 이즈미의 산이었다. 그는 여러 산들을 떠돌다 지쳤을 때도 늘 집선봉의 암벽을 찾았다.
이 책에 수록된 27컷의 귀중한 사진들은 조선의 산에서 수많은 초등기록을 남긴 이야마飯山의 작품들이다. 이 책의 표지사진 집선봉 C2봉(960m)도 그의 작품이다.
이즈미 세이치 지음. 2021년. 최진희. 김영찬 옮김/ 한국산악회
전후 고산등반 바탕 된 백두산 최초 극지법 등반
1934년 말에서 1935년 초에 걸쳐 이마니시 킨지今西錦司 박사가 이끄는 교토제국대학京都帝国大学 산악부가 극지법極地法 방식으로 겨울 백두산 등정에 성공한다. 이 산은 등반성이 높은 산은 아니지만 접근거리가 길고 겨울철 기온이 영하 40℃ 이하로 떨어진다는 점 때문에 고도의 시스템과 장비에 특별한 배려가 필요했다.
이때 최초로 극지법 방식이 조선의 겨울 산에서 실행된다. 천막, 의복, 신발, 식료 외에 새로운 방식이 채용된다. 그후 일본에서의 등반기술은 이 원정을 계기로 크게 진일보한다. 전후戰後 히말라야나 남극탐험도 그 근원이 백두산의 경험 위에 쌓인 것이다. 이 등반대의 보고서는 타의 규범이 될 정도로 완벽에 가까웠다.
이즈미는 이 잘 준비된 원정 체계를 경성에서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동계 백두산 등반이 일본 국내 팀들에 의해 이루진 사실이 유감이었지만 발족한 지 얼마 안 되는 경성제국대학 산악회의 실력으로는 넘볼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 거주 일본 산악인들은 장비와 능력의 부족을 실감하며 부러워했다. 1931년에 창설한 조선산악회와 1905년에 창립한 일본산악회는 26년이라는 격차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격동기 제주도의 30년 기록
그가 북조선의 산에 몰입하던 시기 백두산 일대의 조선과 만주국경지대는, 항일 무장투쟁을 하는 빨치산과 비적匪賊들이 출몰 중이라서 단독 산행은 불가능했다. 국경경비대와 동행하는 형식으로 백두산을 등반했다. 북조선에서 마지막 추억이 된 산행은 1936~1937년 동계에 있었던 관모연산의 민막골民幕谷 등반이었다. 그는 설령雪嶺을 거쳐 관모봉을 등정했다.
그는 1936년 1월에 일어난 한반도 조난기록 1호가 된 ‘마에가와前川 조난’ 당시 경성제대 한라산 동계등반대의 대장이었다. 이 사고는 강풍과 폭설이 요인이 되었고 조난대원의 시신은 5월에 발견된다. 경성제대 산악부의 제주도 원정은 대원 한 명의 죽음으로 비극적 결말을 맺는다. 이 사건은 이즈미의 인생에 큰 변화를 일으킨다. 수색 결과 조난자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자 무속인의 신방을 찾았으며 이때 조선의 샤머니즘과 접한다. 이것이 그의 전공을 문화인류학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다.
그는 한라산에서 친구를 잃은 일로 제주도와 인연을 맺었고, 제주에 관한 관심은 계속 이어져 죽기 한 달 전까지 제주도 방문을 통해 <제주도(1966년)>를 펴낸다. 이 책은 1935~1965년까지 역사상 가장 격심한 변동기였던 제주도의 30년을 기록한 보고서이다. 제주도의 지질과 동식물 분포, 신화와 역사, 사람들의 의식주, 종교, 언어, 풍습, 관혼상제 등을 망라했다. 이 책은 제주학 개론의 사실상 첫 번째 총체적 보고서이다. 외국인으로서 제주도를 연구한 보고서는 이즈미가 최초다.
등산에서 탐험으로
패전 후 일본으로 귀국한 그는 메이지대학과 동경대학 문화인류학 교수를 역임한다. 교수 역임 동안 광범위한 연구조사 활동을 펼친다. 조사지역은 한국의 제주도, 중국 북쪽 싱안링興安嶺인 동아시아, 서쪽 뉴기니와 남아메리카의 아마존, 안데스 지방에까지 이르고 있다. 만년의 연구는 안데스 고대문명의 발굴에 집중해 10년 동안 조사를 벌였으며, 그 성과로 페루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수여받는다.
주요 저서는 안데스 관계 영문 보고서 외, <아마존>(1954), <잉카 제국>(1959) 등이 있다. 이즈미가 남긴 문화인류학의 업적은 이 방면의 세계적 권위로 인정받는다. 한국번역본 <제주도>(김종철 옮김. 여름언덕)는 2014년에 출간되었다.
그의 생애는 등산, 학술조사, 탐험으로 압축할 수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한 인생과 한 시대의 기록을 남기고, 청춘을 불살랐던 조선의 아득한 산들을 회상하며, 1970년에 영면했다.

'본 기사는 월간산 5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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