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바라본 아빠의 뒷모습

신지민 2021. 5. 13.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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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30년 전의 어느 날처럼 부모님을 독차지해본 저도 비치로드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에 있는 섬, 저도.
코로나19 이후 자연 보전과 향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자연을 보전함으로써 누리고, 자연을 누림으로써 보전할 동기와 역량을 얻는 생태여행지에 다녀왔다. ‘생태여행’(생태관광)은 1990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개념으로, 국제생태관광협회(TIES)는 ‘자연으로 떠나는 책임 있는 여행’ ‘환경을 보전하고 지역주민 삶의 질을 보장하며 해설과 교육을 수반하는 여행’으로 정의한다.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북면 일대 산림보호구역에 있는 ‘금강소나무 숲길’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생태여행지다. 지역공동체는 자연을 보전하려고 가이드 동반 예약 탐방제를 도입했고, 여행자는 잘 보전된 자연을 누리고 알아가며, 주민들은 숲길 탐방 운영과 안내에 핵심 역할을 한다. 국내에서 이런 특징을 두루 갖춘 여행지를 찾기는 쉽지 않다. 당장 여행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용히 걷고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뿐. 지난 십수 년간 우후죽순 늘어난 걷기여행 길의 현실을 짚으며, 자연과 문화·역사 속에 파묻히기 좋은 길 10곳도 함께 소개한다._편집자주

창원 마산합포구에서 태어나 6살 때까지 살았다. 엄마는 이 동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혼집도 차렸으니 우리 가족에겐 추억이 가득한 곳이다. 그럼에도 생김새가 돼지가 누워 있는 모습을 닮아 저도(猪島)라고 부르게 됐다는 섬이 이곳에 있는지 몰랐다. 육지와 연결된 다리가 있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데도 말이다. 대통령 별장으로 사용되다 2019년 47년 만에 개방된 거제도 북쪽에 위치한 그 저도와는 다른 곳이다.

4월25일, KTX 마산역에서 부모님을 만나 저도로 향했다. 두 명의 동생이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두 분을 독차지해본 적은 없다. 환갑을 넘긴 아빠, 엄마와 30대 중반의 나는 30년 전 어느 날처럼 마산 앞바다로 봄소풍을 떠났다.

‘콰이강의 다리’를 걸어볼까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에 있는 저도는 남북 길이 1750m, 동서 너비 1500m로 넓지 않은 섬이다. ‘저도 비치로드’는 2010년 조성된 둘레길이다. 둘레길이 만들어지면서 섬 가운데엔 해발 202m 용두산으로 가는 등산로가 생겼고, 해안선을 따라 목재데크를 깔아 끊어졌던 길도 이어졌다. 이 길이 생긴 뒤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것은 ‘저도연륙교’다. 조그마한 섬이지만 같은 이름의 다리가 2개나 놓여 있다. 빨간색 다리와 하얀색 다리 중 하나를 건너면 된다. 하얀색 다리는 2004년에 생겼는데 차와 사람이 모두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넓다. 바로 옆 빨간색 다리는 1987년 건설된 오래된 다리로 사람만 건넌다. 이 다리는 모양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에 붙잡힌 영국군 포로들이 콰이강에 건설한 다리와 비슷해 ‘콰이강의 다리’라고 불린다. 하얀색 다리가 새로 생기자, 빨간색 다리는 콘크리트 일부를 걷어내고 길이 80m짜리 투명유리를 깔아 ‘스카이워크’로 탈바꿈했다. 하얀색 다리를 차로 건넌 뒤, 차에서 내려 빨간색 다리를 건너봤다. 발아래 바닷물이 보이자 조금 무섭기도 했다. 용기 내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바닷물이 수정처럼 맑고 깨끗했다.

해안을 따라 걷는 목재데크 로드.

코스 고를 수 있어 난이도 조절 가능

다리를 건너 섬으로 들어갔다. 저도 비치로드엔 해안선을 따라 걷는 1코스(3.7㎞), 해안선과 산길을 걷는 2코스(4.65㎞), 용두산 정상까지 가는 3코스(6.35㎞)가 있었다. 2코스를 따라 걷기로 했다. 산길을 따라 걸으니 옆으로 바다가 보였다. 바닷바람 덕분에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금방 사라졌다. 산길을 20여 분 걷자 1전망대가 나왔다. 탁 트인 바다를 보니 가슴속까지 후련했다. 전망대에 서서 왼쪽부터 구산면 앞바다, 거제도, 고성군을 차례로 훑어봤다.

1전망대를 지나 위로 올라갔다. 기암괴석과 바다, 숲이 조화를 이룬 2전망대가 나왔다. 이어 3전망대를 지나면 해안길을 따라 목재데크 로드가 펼쳐진다. 숲은 사라졌지만 바다와 가까워졌고, 데크 덕분에 걷기도 쉽다.

4전망대까지 닿으면 코스 분기점이다. 갈등의 순간이 찾아왔다. 여기까지 온 김에 용두산 정상(3코스)까지 갈 것인가, 다시 내려갈 것인가. 평소 걷기를 좋아하는 부모님은 정상까지 가자고 외쳤다. 체력에 따라 코스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게 저도 비치로드의 장점이기도 하다.

예정에 없던 용두산 정상에 오르자 비탈길이 나왔다. 202m면 언덕 정도지만 이 섬에서만큼은 최고봉이다. 쉬운 길만 걸어온 때문인지 숨이 찼다. 그럼에도 정상에 도달했다. 아까 걸었던 연륙교는 물론 드넓은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4개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와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달랐다. 훨씬 더 웅장했고 드넓었다.

평소엔 보지 못했던 것들

사진 찍고 메모하느라 정신없이 오를 때와 달리, 내려올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재잘거리는 새들, 이름 모를 꽃들, 군데군데 자라난 억새풀이 길동무가 돼줬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에 들어온 것은 평소엔 보지 못했던 부모님 모습이었다. 성격이 급해 걸음도 빠른 아빠는 사진 찍느라 자꾸 걸음을 멈추는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조금 앞서 걸으며 내가 따라올 때까지 기다렸다. 아빠의 뒷모습을 이렇게 오래도록 본 적이 있었던가. 풍성하던 머리숱은 많이 줄었고 허옇게 세어 있었다. 반면 엄마는 내 뒤를 따라오며 수차례 감탄했다. “이 꽃은 이름이 뭘까? 참 예쁘다.” “여기도 사진 찍어야 하지 않겠니?”라며. 말이 별로 없는 편인 엄마가 이렇게 말이 많고 감수성이 풍부했던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길의 종점에 도착했다. 이제 남은 건 바다를 바라보며 굴구이와 소주 한잔을 기울이는 시간이다.

창원=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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