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길 걷는 세 가지 방법

이정규 2021. 5. 13.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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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부모님과 강아지 미나와 함께 간 증도 우전해변
전남 신안군 증도 우전해변에 해가 지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자연 보전과 향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자연을 보전함으로써 누리고, 자연을 누림으로써 보전할 동기와 역량을 얻는 생태여행지에 다녀왔다. ‘생태여행’(생태관광)은 1990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개념으로, 국제생태관광협회(TIES)는 ‘자연으로 떠나는 책임 있는 여행’ ‘환경을 보전하고 지역주민 삶의 질을 보장하며 해설과 교육을 수반하는 여행’으로 정의한다.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북면 일대 산림보호구역에 있는 ‘금강소나무 숲길’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생태여행지다. 지역공동체는 자연을 보전하려고 가이드 동반 예약 탐방제를 도입했고, 여행자는 잘 보전된 자연을 누리고 알아가며, 주민들은 숲길 탐방 운영과 안내에 핵심 역할을 한다. 국내에서 이런 특징을 두루 갖춘 여행지를 찾기는 쉽지 않다. 당장 여행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용히 걷고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뿐. 지난 십수 년간 우후죽순 늘어난 걷기여행 길의 현실을 짚으며, 자연과 문화·역사 속에 파묻히기 좋은 길 10곳도 함께 소개한다._편집자주

해가 내려앉은 갯벌에 금빛이 돌았다. 바다 짠내가 갯내음과 섞여 코를 자극했다. 물이 빠져나가 펄에 남겨진 물길을 노니는 낯선 생명에 햇빛이 드리웠다. 한쪽 집게가 몸통만큼 큰 수컷 농게 여럿이 펄 위를 걸어다녔다. 펄 웅덩이에 몸을 맡긴 짱뚱어는 꼬리를 흔들거렸다. 눈에 잘 보이지 않고 잘 모르는 어떤 생명이 펄에 숨어 있을지 가늠되지 않았다. 1시간 동안 곱게 갈린 해변 모래를 밟으며 걸어가자 마주친 해 질 녘 갯벌 풍경이다. 주차장으로 돌아올 때는 소나무로 덮인 해송 길을 걸으며 또 다른 생명의 풍경을 봤다.

강아지도 우전해변에서 페트병을 주웠다.

이 여행을 가장 즐긴 건 누구

4월25일 늦은 오후, 부모님과 강아지 미나와 함께 전남 신안 증도 우전해변을 걸었다. 바다와 하늘의 시간이 만나는 저녁 무렵, 바닷길에서 몰랐던 생명을 알아가는 기쁨을 느꼈다. 바다 너머 섬이 보였고 섬 위에는 산이 있고 섬 너머에 바다가 펼쳐졌다. 서해 남단 끝자락에 자리한 증도는 다리로 이어졌다. 차를 타고 올 수 있지만 서울에서는 4시간40분이 걸린다. 목포역이나 광주역에서 차를 빌려 타고 와도 1시간30분쯤 운전해야 한다. 쉽게 닿지 못하는 외진 해변이라 한적했다. 그래서였을까. 누구보다 이 여행을 즐긴 가족은 강아지였다.

목줄을 풀어주자 사람 종아리만 한 푸들이 모래 위를 달렸다. 도심에서는 느끼지 못한 바다 짠내가 신기했을까, 폭신한 모래 해변길이 즐거웠을까. 모래에 몸을 파묻고 뒹굴더니 침착해졌다. 강아지는 어머니와 발을 맞춰 모래 위를 걸었다. 바닷길을 걷는 방법은 세 가지 정도였다. 햇빛에 바삭하게 말려 폭신폭신하고 고운 모래 위를 걷기, 바닷물이 들어 단단해진 해변을 걷기, 신발 벗고 바닷물에 발을 담그며 걷기다. 바닷가에 통굽 신발을 신고 온 어머니는 어느덧 맨발이 됐고 바닷물에 젖은 모래를 걸으며 기분 좋은 혼잣말을 했다. “모래 좋다. 시원하다. 무좀 낫겠다.” 모래 위에는 어머니의 맨발 자국과 강아지 발자국이 나란히 찍혀갔다. 어머니와 강아지는 나와 아버지를 앞서 저만치 걸어갔다.

아버지와 나는 쓰레기를 주우며 걸었다. 밧줄, 페트병, 깨진 플라스틱 상자, 스티로폼을 해변에서 찾았다. 쓰레기를 살펴보니 모래 유리가 박혔는지 반짝반짝 빛났다. 쓰레기에는 파도에 마모된 흔적이 새겨 있었다. 조깅하며 길가의 쓰레기를 줍는 일을 요즘 힙한 친구들은 이삭줍기를 뜻하는 스웨덴어 ‘플로카 우프’와 ‘조깅’의 합성어인 ‘플로깅’이라 부른다고 한다. 우리는 뛰지 않고 걸어가며 쓰레기를 모았다. 파도가 잔잔하게 치는 해변과 바다 너머 하늘과 겹쳐 보이는 섬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어느덧 아버지는 쓰레기만을 찾으며 길을 걸었다. 관심 없던 어머니도 바다에 박힌 맥주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들, 위험하니 네가 주워.” 강아지는 페트병을 물고 이리저리 또다시 뛰어다녔다.

아버지가 쓰레기를 줍다가 흙이 무너져 뿌리가 드러나 죽은 소나무를 가리켰다.

게판이다 게판! 전부 게다

15ℓ크기 비닐봉지가 꽉 찰 때쯤 파도로 쓸려나간 해변의 언덕을 아버지가 가리켰다. “어쩌냐, 아고 금방 죽겄는디… 아까운 나무들. 무슨 현상이 있을 거야.” 흙이 깎이고 뿌리가 드러나 말라 죽어가는 소나무가 보였다. 대형 트럭에 달릴 법한 타이어도 해변으로 밀려왔고 전봇대는 해변에 파묻혔다. “저 큰 타이어가 밀려오는데 소나무가 못 견딘다.” 기후변화로 수면이 높아져 소나무 뿌리가 박힌 흙을 파도가 집어삼킨 것이 아닐까 걱정됐다. 걷다보니 저 멀리 소나무가 뿌리 내린 흙을 보호하려 쌓은 방파제가 보였다. 아버지는 흙이 쓸려가지 않게 방파제를 빨리 바닷가에 쌓아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 취미는 버려진 화분을 집으로 가져와 살리고 키우는 일이었다.

저녁 6시, 해는 바다를 향해 떨어졌다. 길의 종착지인 짱뚱어다리가 가까워졌다. 갯벌이 눈에 들어왔고 해변에는 게가 파놓은 구멍과 알을 낳아둔 흔적이 점점 많아졌다. 생명의 흔적은 짱뚱어다리 아래 갯벌로 이어졌다. 다리 옆에는 갯벌 생물의 이름이 하나씩 새겨진 입석이 있다. 비틀이고둥, 딱총새우, 백합, 서해비단고둥, 세스랑게, 엽낭게, 방게, 달랑게, 칠게까지. 입석에는 갯벌 생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맨눈으로는 작게만 보이는 갯벌의 생명을 보며 대구에서 온 한 관광객은 말했다. “게판이다 게판! 전부 게다.” 바다는 몇 번 봤지만 갯벌은 처음 본 강아지는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했다. 사람 표정을 닮은 강아지 얼굴을 보니 미소를 짓는 것만 같았다.

돌아올 때는 바닷길 너머 소나무로 뒤덮인 한반도해송숲을 걸었다. 멀리서는 파도 소리, 가까이서는 솔잎 밟는 소리가 들렸다. “추∼추∼차박차박… 추∼추∼차박….” 바다 냄새는 가시고 솔향기가 가득했다. 울창한 소나무 너머 해가 바다에 잠기고 있었다.

우전해수욕장 옆 한반도해송숲에서 해가 소나무에 걸쳐 지고 있다.

먼 미래 갯벌에도 짱뚱어는 있으려나

우전해변을 다 걸은 뒤 증도 숙소에 들어오니 바다 짠내가 확 올라왔다. 목포역에 내리면서 맡았던 바다 냄새가 떠올랐다. 역 인근에 바다가, 항구가 있다. 차를 끌고 온 여행자라면 방문 코스가 여럿 있다. 태평염전에 들렀다가 그 옆에 있는 태평염생식물원에 가서 갯벌 식물을 둘러볼 수 있다. 증도 남쪽을 차를 타고 돌다보면 왕바위선착장에 도착한다. 증도 우전해변은 목포를 비롯해 신안의 여러 섬을 함께 여행하기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는 도선에 차를 싣고 자은도로 들어갈 수 있다. 자은도는 논밭이 많은 섬인데 걷기 좋은 해변이 많다. 자은도에서 다리를 넘어 암태도로 건너가면 7.2㎞의 천사대교를 건너 압해도에 다다른다. 차를 타고 지나가다 섬 어디에서든 내려 걸어도 좋을 듯싶다. 일본 근대의 풍경을 느끼고 싶다면 목포역에 내려 인근 적산가옥(적국이 물러가며 남겨놓은 가옥) 거리를 걸어다니면 된다.

증도 우전해변을 걷기 전까지는 펄이 녹아들어 시커먼 서해는 동해나 제주 해변보다 예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전해변의 금빛 갯벌 풍경을 보고 나니 수많은 생명을 품은 서해를 더 아끼게 됐다. 걷는 여행은 관찰이다. 걸으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맡고 발로 느낀다. 그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눌 소망이 생겼다. 고운 모래 가득한 해변과 갯벌에서 짱뚱어와 게들은 먼 미래에도 여전히 노닐려나. 해변 너머 자라난 소나무는 그 커다란 모습을 오래도록 간직하려나. 눈과 귀, 코와 발로 느낀 모든 바닷길의 생명이 오롯하기를.

신안=글·사진 이정규 기자 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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