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한겨레

힘들것 같아도 가장 쉽고 편한 건 좁은 길

한겨레 입력 2021. 05. 14.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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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월간 풍경소리]살며 깨달으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가난한 산책

사진 픽사베이

-이번에도 열차 안이다. 후배 목사가 사진 한 컷 보여준다. 풍경인데 낯설지 않다. 뭐라고 소감을 말해보라는 눈치지만 아무 말 하지 않는다. 그가 마주앉은 처녀에게 속삭인다. 관옥 목사님은 사진 한 장 보면 훤하게 아신다네, 우리 집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그러고는 자기 아내 사진을 꺼내어 보여준다. 불쾌하진 않지만 단호하게 말한다. 무슨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 내가 사진 한 장 보고 뭘 안단 말인가? 앰한 사람 잡지 마시게! 나, 그따위 허튼 짓 하려고 세상에 온 사람 아닐세. 갑자기 장딴지에 쥐가 나며 잠에서 깨어난다. 제법 아프다. 무슨 괜한 힘을 꿈속에서 이리도 썼더란 말인가?

-같은 메시지가 네 학생에게 전해진다. 둘은 적극적으로 쉽게 받아들이고 둘은 소극적으로 어렵게 받아들인다. 메시지 내용을 꿈속에서는 알았는데 깨고 나니 모두 사라졌다. 과연 세상에서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는 맞는 얘기 같다. 그런데 꿈속에서 메시지를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두 남학생보다 의심과 불안을 품고 받아들이는 두 여학생이 더 칭찬(?)받은 게 기억에 남는다. 그 이유가 꿈에서는 당연했는데 깨고 나니 아리송하다. 굳이 해석하면 세상을 쉽게 사는 다복한 인간들보다 힘들게 사는 박복한 인간들이 칭찬을 받는다? 그래서 그분, 이렇게 말씀하셨던 걸까? “지금 굶주린 사람에게 복이 있으니 그대들이 배부르겠기 때문이오. …부유한 사람들, 당신들은 복이 없으니 받을 위로를 다 받았기 때문이오.” 하지만 어디까지나 말은 말일 뿐. 조심할 것.

-굳이 표현한다면 모음 없이 자음으로만 구성된 문장이라 할까? 이미지들은 수없이 많은데 그것들이 서로 어떻게 이어지고 떨어지는지를 모르겠다. 거실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꿈속에서 보았는지 밖에서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풍선만큼 부풀어 오른 가제 집게발을 종이에 그렸는지 나무에 새겼는지, 이게 다 무슨 짓거리인가, 라는 생각을 꿈에 했는지 생시에 했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알려고 하지 마라. 보려고 하지 마라. 따로 찾지 마라. 다만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라고 단언하는 네 속의 허깨비를 경계하여라. 속지 마라. 아는 것이나 알아라. 보이는 것이나 보아라. 가진 것이나 가져라. 송곳 같은 지금 여기에서!

-돼지고기를 사는데 계산서 콤마 하나로 시비가 일었다. 같은 고기가 이 집은 13,500원이고 저 집은 135,00원이다. 누가 옳고 누가 글렀느냐,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 다툼이 벌어져 시끄러운데 결말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것이 점 하나의 위치 때문에 생긴 시비는 아니라는 생각을 꿈속에서 했는지 밖에서 했는지도 모르겠다. 뜬금없이 웬 수녀와 함께 대나무를 자른다. 비슷한 대나무 두 그루를 잘라 키와 굵기를 견주며 어느 것이 마더 테레사 수녀님 지팡이로 쓰시기에 적당할까 궁리하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오냐, 되도록이면 비교하지 않겠다, 시비에 휘말리지도 않겠다. 견주는 사람들도 견주어 보지 않으리라. 시비하는 사람들과도 시비하지 않으리라. 그냥, 주어진 길을 갈 뿐이다.

무심코 눈에 들어오는 요가난다의 기도문이, 그래, 잘 생각했어, 공연한 시비에 휘말릴 것 없지, 등을 두드려준다. “저 아리송한 유성영화를 보고 있자니 휘몰아치며 춤추는 사람들의 날마다 순간마다 바뀌는 드라마가 장편 꿈-영화의 상연(上演)인 것을 분명히 알겠습니다. 세계적인 비극과 희극, 인생의 패러독스, 태어남과 죽음, 끝없이 바뀌는 저녁뉴스… 이 모두가 우리의 감각과 생각을 계속해서 속임수로 즐겁게 하는 한 편의 유성영화입니다. 오, 신성한 연출가여. 당신은 우주-진동의 흐름으로 몸소 만든 활동사진을, 오직 우리를 재미나게 하고 즐겁게 하려고, 날마다 시리즈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오, 마법의 연출가여. 우리는 당신의 활동사진을 보고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손으로 만지고 몸으로 느낄 수도 있지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져지고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죽어있는 영상(影像)들이 날마다 우리 의식의 스크린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은총으로 제가 당신이 특별 제작하시는 영화에 배우로 뽑혔습니다. 제가 슬픈 연기나 즐거운 연기를 하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며칠만이라도 좋으니 저에게 휴가를 주십시오. 그리하여 반성(反省)의 발코니에서 제 생각-관중들과 함께 휴식하며 그동안 연기한 저의 희극과 비극들을 웃는 가슴으로 보게 해주십시오. 제 일생의 비극영화를 흥미롭게 보고 나서 그 무섭고 슬픈 영화의 막이 내릴 때 큰소리로 말하게 해주십시오. ‘아, 참 좋은 영화다. 아찔하고 슬픈 장면들도 있었지만 정말 좋은 영화였어. 거기에서 배운 것들이 아주 많았으니까.’”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nobody knows my sorrow… 그 누가 내 괴로움 알까, 아무도 내 슬픔 몰라… 노랫말이 앞서고 그에 어울리는 스토리가 뒤따른다. 썰렁한 예배당에서 어른들을 대상으로 설교하지만 돌아오는 건 노골적인 외면과 비웃음이고 결국은 “사탄아 거룩한 교회를 더럽히지 말라”는 성난 장로의 고함이다. 모두가 잘 아는 예수 얘기를 어쩌자고 새삼스럽게 늘어놓느냐는 거다. 장면이 바뀌어 말 그대로 19세기 고색창연한 교실에서 아이들과 수업하는데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눈감고 잠자는 아이, 옆 동무와 무슨 얘기에 골똘한 아이, 스마트폰으로 게임에 빠져든 아이, 저마다 제각각이다. 도무지 무엇을 할 게 없어 괜히 안절부절못하다가 어떻게 꿈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알겠다, 처음부터 대중을 염두에 둘 게 아니었다. 겨우 몇 사람, 그게 전부인 세상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다. 좁은 길, 좁은 문이다. 무위당 선생님 유훈(遺訓)을 잊지 말자, 묻지 않은 말에 답하지 말라, 하셨지. 정생 형도, 가르치려 하지 말레이, 하고 갔지.

사진 픽사베이

-뜰 건너 거실에 불이 들어와 있다. 간밤은 오랜만에 꿈 없이 잤나보다, 싶었는데 슬그머니 어느 작은 강당 같은 곳이다. 사람들이 모여 있다. 무위당 선생을 따르던 이들이란다. 백발 길게 나부끼며 김영주 선생이 한 말씀 하신다. “관옥 목사는 평소에 예수의 제자를 자처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분한테서 뭘 배우셨는지 한마디 들려주시게.” 말한다, “세상에 사람 겁주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파시스트들이다. 겁먹지 마라. 겉으로는 온갖 힘을 다 부리는 것 같지만 속은 두려움으로 가득 찬 허깨비들이다. 세상 흐름에 휘말리지 마라. 그리로 가면 멸망이 기다리고 있다. 좁은 길, 세상을 거스르는 좁은 길로 가라. 힘들 것 같지만 가장 쉽고 편한 길이다. 뭐, 이런 겁니다. 그대로 살았느냐고 물으면 그대로 살려고 깜냥엔 애써보다가 지금은 그 짓마저 하지 않는 걸 배우는 중이지요. 왜냐하면…” 여기까지 말하는데 누가 속에서 한마디 찌른다. 스톱! 거기까지. 설교하지 마라!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난다.

-깊은 숲. 호로라는 원주민을 만난다. 호로는 토끼사람이라는 뜻이다. 호로들은 착하고 작다. 음식 먹는 걸 보면 흡사 토끼다. 그릇 같은 건 따로 없고 수저도 없다. 깔깔거리고 웃으며 손에 든 음식을 갉아먹는다. 호로는 물을 마시지 않는다. 물로 세수를 하거나 청소를 하지도 않는다. 물이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물이 신성한 것이라 함부로 쓰고 버릴 수 없어서다. 호로가 물을 쓰고 버린다는 건 치명적인 잘못이다. 호로가 사는 마을 뒤로 폭포수 같은 강물이 흐른다. 어쩌면 그 숲에서 가장 흔한 게 물일지 모른다. 하지만 호로들은 결코 물을 버리는 법이 없다. 호로가 성경처럼 읽는 책을 본다. 원경선 박사가 초역을 해놓은 게 있어 읽어보니 “호로는 작다. 호로가 사는 세계도 작다.”는 말로 시작된다. “강물은 위험하지만 옹달샘은 위험하지 않다.”는 말도 보인다. 아, 지구별이 우주를 떠도는 아주 작은 별인 줄을 사람들이 알면 얼마나 착한 세상일까? 한탄하듯 중얼거리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기린 무늬로 알록달록한 호로가 사나운 늑대들 틈에서 오락가락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시청 가는 전철에 앉아 루미를 읽는다. 루미가 노래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수피도 아니고 도둑도 아니고 사공도 아니다. 모든 게 나다. 내가 수피고 내가 도둑이고 내가 사공이다. 어쩌다가 이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시방 아무데도 없고 아무데나 있다…” 저기 한 여인이 아기를 안고 비틀거리며 서 있다. 그녀에게 여기 앉으시오 눈짓하고 일어서는데 번개처럼 다른 여인이 빈자리를 차지한다. 어느새 시청이다. 내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 출구가 막혔다. 겨우 비집고 나오니 아뿔싸 시집을 놓고 내렸다. 전철 안을 들여다본다. 있다. 고깔모자의 루미가 손잡이에 매달려 웃고 있다. 박장대소다. 꿈에서 깨어나는데 누가 말한다, 아까 그 노래는 루미가 아니라 카비르잖아? 다시 누가 말한다. 루미가 카비르니까 루미지. 루미가 카비르 아니면 루미가 아닌 거라. 카비르 또한 루미니까 카비르인 거고. 넌 겨울 옷 벗고 여름 옷 입으면 너 아니냐? ㅉㅉ… 거 보라는 듯, 잠자리에서 일어나 펼쳐든 책에서 에크하르트 톨레가 한마디 던진다. “상상해보라, 한 줄기 햇살이 제가 해의 한 부분인 것을 망각하고, 스스로 미망(迷妄)에 빠져,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며 해 아닌 다른 무엇을 생각으로 만들고 그것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바로 그 미망의 죽음이야말로 놀라운 해탈 아닌가?” 그렇다, 니르바나는 착각의 멸절이다. 다른 것 아니다.

-자칭 시인이라는 대학교수가 연설하다 말고 이건 관옥 선생이 젊은 날에 쓰신 글이라며 장황하게 인용한다. 용어가 거칠고 건방져 듣기에 거북하다. 하지만 그를 말릴 방도가 없다. 게다가 청중은 오히려 시인의 연설보다 좋다는 느낌이다. 그래도 기분은 영 찝찝하다. 과거는 좋든 나쁘든 과거로 돌려보내야 하는 건데 그게 잘 안 되는 것이 인간의 흠이라는 생각을 꿈속에서 했는지 밖에서 했는지 잘 모르겠다. 요즘 들어 꿈과 현실 사이의 벽이 얇아지는 느낌이다. 그만큼 잠을 푹 자지 못한다는 걸까? 어쨌든 꿈에서라도 젊은 시인이 인용하는 자기 말이 거북하게 들리지 않으려면 아직 걸어야 할 길이 멀다. 오늘도 기다렸다는 듯, 에크하르트 톨레가 말한다. “선택은 의식을, 높은 수준의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 없으면 선택도 없다. 네 마음(생각)과 그 한정된 패턴에 너를 일치시키지 않고 지금 여기에 오로지 현존하는 순간, 너의 선택이 비롯된다.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 너는, 영적으로 말하여, 의식 없는(unconscious) 사람이다. 한정된 자기 마음(생각)에 따라서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란 얘기다. …너는 아직 완전하게 깨어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한정된 네 마음(생각)이 네 인생을 제멋대로 요리하고 있는 것이다.”

글 이현주 목사/전남 순천사랑어린학교 마음공부 선생님.

***이 시리즈는 전남 순천사랑어린학교장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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