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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민 잡귀 물렀거라"

한겨레21 입력 2021. 05. 14.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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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 지신밟기·풍물·고사 등 이민법 개혁 100일 캠페인
서류미비 14만5천 명, 운전면허·취업·대학·건강보험 배제에 항의
2021년 3월24일 재미 한국인 이민자 권익 활동가와 봉사자들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차량 시위를 하고 있다.

“현관 벨이 ‘띵동’ 울리자 거실에 있던 세 아이가 재빨리 방에 들어가 숨죽이고 있었어요. 혹시 이민세관단속국(ICE)이 체포하러 왔나 싶어서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한 한인 가정의 아버지가 감춰뒀던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2020년 봄, 20대 초반이던 그의 아들이 방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해변 파티를 좋아하고 친구의 고민을 잘 들어주던 사려 깊은 아이였다. 가족은 모두 합법 체류 신분이 아니었다. 아들은 학자금대출도 받기 어려웠고 해외 장학금 유학 기회도 포기해야 했다. 이민세관단속국에 체포될까 늘 노심초사했고 늦은 시간까지 친구들과 놀지도 못했다. 친구들은 대부분 그런 사실을 몰랐다. 불안한 신분을 노출하는 것은 한인 사회의 금기였다. 한 백인 친구는 장례식장에서 이렇게 추모했다. “우리는 그를 ‘쿨 가이’라고 불렀어요. 늘 유쾌해서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죠.”

합법 체류 신분 없이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은 미국 정부 추산으로 최소 14만5천 명이다. 유엔 권고에 따라 이들을 ‘서류미비자’(undocumented)라고 부른다.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이민국에서 요구하는 이민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 가운데 미성년자일 때 부모와 함께 온 뒤 여전히 서류미비자 상태인 한인은 8천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많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행정명령으로 ‘서류미비 청년 추방유예 프로그램’(DACA)을 만들면서 이들은 임시체류 신분을 얻어 살아가고 있다.

속내 털어놓지 못한 채 세상 떠난 ‘쿨 가이’

김정우씨도 그중 한 명이다.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휘청일 때인 1999년 가족과 함께 더 나은 삶을 위해 이민을 선택했다. 그는 미국에서 고등학교 교육을 받았고 졸업 뒤 식당 설거지와 신문 배달, 발레파킹 등 구인정보지에 나온 일을 죄다 했다. 뒤늦게 대학에 가려고 했지만 신분이 발목을 잡았다. 대학에 지원서를 넣었지만 서류미비자라며 학교에서 퇴짜를 놨다. 주법상 캘리포니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해 서류상 문제가 없었지만, 학교는 관행을 이야기하며 딴죽을 걸었다. 정우씨는 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6개월 만에 입학 허가를 받았다. 같은 처지의 학생 100여 명도 덩달아 학교에 입학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일명 ‘드리머’라고 불리는 미국 서류미비 청년과 이민권익 단체가 시민권 부여 확대를 요구하는 풀뿌리 운동을 본격화했다. 이들은 대학 입학과 취업, 운전면허 취득, 건강보험 가입이 어려웠다. 일단 출국하면 돌아오지 못해 한국에 있는 가족이 사망해도 방문하지 못했고, 신분이 불안하다는 낙인 때문에 결혼과 연애에서도 차별과 오해를 받았다. 이민자 권익 운동에서 커다란 좌절과 작은 성취가 오가는 동안, 2010년 이들의 요구를 담은 입법안인 ‘드림액트’(Dream Act·이민개혁법안)가 연방 하원을 통과하고 상원 통과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공화당의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로 결국 좌절됐다. 한 청년 운동가는 그 충격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그 뒤 2012년 오바마 대통령이 행정명령을 내리면서 이들은 임시체류 신분을 얻었다. 운전면허를 따고 취업도 할 수 있게 됐다.

2021년 3월29일 재미 한인 활동가들이 워싱턴DC에 있는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집 앞에서 이민개혁법안 통과를 위한 고사를 지내고 있다.

백악관 앞 밤샘 농성, 연방의회 점거 시위

하지만 2017년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커다란 위기가 찾아왔다. 트럼프는 ‘멕시코 장벽 설치’를 앞세우며 서류미비 이민자 체포와 추방, 저소득층 정부 지원 프로그램 축소 등 반이민 정책을 지속적으로 폈다. 오바마가 서명한 서류미비 청년 추방유예 프로그램도 폐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때쯤 이민자 권익 활동가 박그림씨도 이 운동에 동참했다. “저는 늘 자존감이 떨어져 있었어요. 대학을 갔지만 취업하는 데도 제약이 많았거든요. 하루에 식당 일 두 개를 했어요. 돈에 집착했죠. 그러다 이런 운동이 있다는 걸 알았죠.”

5·18 광주항쟁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을 위해 탄생한 로스앤젤레스 민족학교와 시카고 하나센터, 전국 규모의 운동을 펼치는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 등이 이민자 추방유예 프로그램 폐지 반대를 요구하며 운동에 불을 붙였다. 이민자 규모가 가장 큰 남미계 이민자 단체들도 조심스러워할 때였다. 2017년 8월 워싱턴 백악관 앞에서 3주 동안 밤샘 농성을 했다. 백악관 앞에서 지내던 노숙인도 이들의 사연을 알고 자기 장화에서 구겨진 돈을 꺼내 기부하기도 했다. 이듬해는 미국 서부 해안을 따라 시애틀에서 샌디에이고까지 ‘정의를 위한 여정’이라는 이름으로 자전거 캠페인을 했다. 3개 주 30개 넘는 도시 구간의 2600㎞를 달리며 이민자 권리와 인권, 자유를 외쳤다. 2019년 10월에는 활동가와 봉사자 200여 명이 약 20일 동안 동부 뉴욕에서 수도 워싱턴까지 370㎞를 행진했다. 2020년에는 유권자 운동을 하며 미 대선 투표 참여를 독려했다.

2020년 11월 대선에서 당선한 조 바이든 대통령(민주당)은 미국 내 서류미비자 1100만 명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길을 열겠다고 거듭 약속했다. 하지만 이민자 권익 활동가들은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공화당의 거센 반격이 있을 것임을 경험으로 잘 알기 때문이다. 이어 바이든 대통령이 서류미비자 추방을 100일간 유예하겠다는 모라토리엄을 선포했지만 곧바로 텍사스주가 위헌 소송을 내 승소했다. 바이든으로서는 겸연쩍은 일이 됐다. 추방자 수도 2020년 12월 5838명에서 2021년 3월 2886명으로 줄었지만 여전히 추방은 진행 중이다. 같은 시기 구금자도 1만5941명에 이른다.

“시민권은 특권이 아니라 기본권”

이민자 권익 활동가들은 올해를 20년 투쟁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본다. 민주당이 연방 하원의 다수당이고, 상원 의석도 50 대 50으로 양대 정당이 나눴지만 마지막 의사결정권을 민주당 소속 상원의장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민개혁법안을 패스트트랙(신속 처리 안건)인 예산조정절차에 넣으면 공화당의 필리버스터를 무산시키고 연방 상원의 단순 과반만으로 통과시킬 수 있다.

이 때문에 한인 이민자 권익 단체로는 역대 가장 많은 단체가 연대해 싸우고 있다. 전국 조직인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의 주도로 캘리포니아 남부 민족학교, 시카고 하나센터, 뉴욕 민권센터, 펜실베이니아 우리센터, 휴스턴 한인시민권자협회 등 7개 단체가 손을 잡고 있다. 이들은 워싱턴과 뉴욕,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조 바이든 정부가 출범한 2021년 1월20일부터 세계 노동자의 날인 5월1일까지 ‘조 바이든 취임 100일 이민법 개혁’ 캠페인을 벌였다. 아시아 단체로는 거의 유일하다. 캠페인의 요구 사항은 1100만 서류미비자 모두에게 시민권 취득 기회를 주라는 것이다. 의회 협상 과정에서 장애인과 성소수자, 저소득층이 배제되지 않도록 감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중범죄를 저지른 이민자에게도 시민권 취득 기회를 주도록 요구한다. 시민권은 특권이 아니라 기본권이라는 취지다.

활동가들은 수도 워싱턴에 있는 주택을 단기 임대해 거점으로 삼고 전국에 있는 단체와 함께 연대했다. 먼저 연방 상원 의원 100명과 하원 435명을 상대로 전화와 전자우편으로 캠페인을 했다. 활동가 50여 명이 1만 통 가까이 전화 메시지를 남겼고, 4만6천 통의 전자우편을 의원들에게 발송했다. 캠페인의 집중 대상은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척 슈머 상원 민주당 대표, 버니 샌더스 상원 예산위원장 등 예산조정절차에 직접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주요 의사결정권자였다. 언론사에도 편지 200통을 보냈다. 이민자의 사연을 담은 글과 영상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유세차, 단기 4354년, 신축년 삼월 스무아흐레 날, 오늘. 서류미비자분들이 이곳 브루클린 척 슈머 상원 의원 집 앞에 모여, 좌로는 청룡이요, 우로는 백호요, 남으로는 주작과 북으로는 현무를 각각 거느리고 이 땅의 모든 산하를 굽어보시며 그 속의 모든 생육을 지켜주시는 모든 창조주와 영혼들에게 고하나이다.”

2021년 2월26일 정월대보름날에 재미 한인 활동가들이 워싱턴DC에 있는 미국 연방의회 앞에서 이민법 개혁을 축원하는 지신밟기 행사를 하고 있다.

20대 활동가 어느덧 40대… “변화 만들 것”

활동가들은 한국 전통 풍습을 활용해 시위했다. 3월29일에는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민주당)의 집 앞에서 한국식 고사를 지냈다. 노트북 모니터에 돼지 머리 사진을 띄워놓고 제사상에는 소금에 절인 생선 대신 과자 ‘고래밥’을 놓았다. 막걸리를 올리고 제를 지냈다. 천주교와 기독교 등 여러 종교 대표들도 참가했다.

해리스 부통령이 거주하는 워싱턴DC 소재 해군 천문대 주택에서는 민복(사물놀이 의상)에 삼색띠를 두르고 북과 꽹과리를 쳤다. 민중의 얼을 상징하는 풍물은 이들의 주요 선전 수단이다. 가끔 다른 단체의 브라스밴드와 즉흥 합주도 했다. 한 지역 주민은 “트럼프 정부 시절에도 부통령이 사는 이곳까지 와서 시위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와 같은 이민자의 목소리를 대변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앞서 2021년 2월20일 정월대보름 즈음에는 백악관과 연방의회 건물을 돌며 지신밟기를 했다. ‘반이민 정책’이라는 잡귀를 몰아내고 통합과 사랑, 평화를 기원했다. 서류미비자로 말 못한 고통을 견뎌온 한인 식당 사장은 30인분 넘는 한식 도시락을 배달해주기도 했다.

활동가들은 코로나19 때문에 엄격한 보건·방역 수칙을 만들어 시위를 진행했다. 캠페인단이 아닌 외부인은 만나지 않았고 식당과 술집, 체육시설에도 가지 않았다. 도시를 오가며 비행기를 탈 때는 반드시 유전자증폭검사(PCR)를 받고 음성이 나와야 운동에 합류할 수 있도록 했다. 예년 같으면 저렴한 호스텔이나 교회 강당을 빌려 침낭을 깔고 잤지만, 이번에는 비용을 더 들여 주택을 단기 임대했다. 100일 캠페인을 마친 활동가들은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진 뒤 다시 더 강력한 운동을 벌일 계획이다.

활동가 김정우씨는 “20대였던 활동가가 40대가 돼가고 있다. 원하는 모든 것을 얻지 못했지만 분명 10년 전보다, 5년 전보다 법과 인식 수준이 나아지고 있다. 우리는 변화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미국)=글·사진 황상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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