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버지의 얼굴을 대면하라

한겨레21 2021. 5. 14.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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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호의 사건의 사회학]'삶의 희망'을 국가·회사로부터 되찾기 위해
경기도 평택항 사고로 희생된 이선호씨의 아버지 이재훈씨는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드러내고 자신의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또 한 명의 청년노동자가 노동현장에서 사망했다. 경기도 평택항에서 무너진 개방형 컨테이너에 의해 사망한 이선호씨다. 이선호씨는 제대한 뒤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버지 이재훈씨가 일하는 평택항에서 아르바이트로 검역 노동을 했는데, 이날 처음 컨테이너 업무에 투입됐다고 한다. 중장비가 동원된 현장에 처음 들어가는 것인데 안전교육이나 안전모 지급 등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었다.

사고가 난 시간은 오후 4시10분께.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직원들이 퇴근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버지가 현장을 돌아보다 사고 모습을 보게 된다. 이때는 오후 5시가 다 되어가던 시간. 아버지는 아들이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자는 듯이 엎드린’ 모습을 봤다. “이거 뭐고. 죽은 기가. 죽었나”라고 말하고 아버지는 기절했다고 <한겨레>는 보도했다.

자기방어 할 수 있는 만큼이 권력 크기

무엇보다 기막힌 것은, 사람이 300㎏짜리 컨테이너 날개에 깔렸는데도 119를 부르기보다는 ‘윗선’에 먼저 보고했다는 점이다. 산업재해 현장에서 숱하게 있었던 일이다. 사람 생명이 갈리는 순간에도 공장은 멈춰서는 안 된다. 사람이 죽어가도 사고로부터 안전하게 대피해야 하는 건 ‘윗선’이다. 사람을 구하는 일보다 회사를 보호하는 게 우선이다. 사람은 그저 소모품이다.

평택항 컨테이너 사고의 첫 보도가 나온 날(5월6일), 경기도 시흥의 한 자동문 부품 공장에선 자동문을 수리하려던 40대 노동자가 부품 제작 기계에 끼여 숨졌다. 이틀 뒤인 5월8일에도 울산 현대중공업과 충남 당진 현대제철 작업 현장에서 40대 노동자 2명이 추락하거나 기계에 끼여 사망했다. 이 사고들을 보며 누구나 서울 지하철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 사고와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사망한 김용균씨를 떠올렸을 것이다. 모든 언론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다. 똑같은 사고라고 말이다. 원청에서 하청으로, 하청의 하청으로 이어지는 ‘위험의 외주화’. 그로 인해 비정규직 노동자와 하청노동자들이 위험의 최전선에 ‘맨몸’으로 몰린다. 실제 산업재해로 다치는 비율은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2배 가까이 높다.

외주화라는 말과 달리 그 외부는 바깥이 아니라 ‘아래’다. 아래는 의무만 있지 권력이 없다. 분명하게 봐야 한다. 권한이 아니라 권력이다. 물론 산업안전보건법에 작업 중지에 대한 조항이 있다. 그러나 이 권한을 행사하려면 권력이 필요하다. 권한을 행사하는/행사할 수 있는 힘이 권력이다. 권력이 있을 때만 권한을 행사한 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 권력은 남에게 행사할 수 있는 힘이란 의미만 있는 게 아니다. 권력이란 타자에게 힘을 행사한 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철통같이 자기를 방어한다. 위험을 외주화하는 것도 자기를 보호하는 방식이다. 책임을 쪼개고 쪼개어서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더 그 책임이 흐릿해지게 한다. 이런 방식으로 책임의 선이 결코 원청의 경계를 넘지 못하도록 한다. “도의적 책임은 있지만 법적 책임은 없습니다.” 이 뻔뻔한 말이 바로 권력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권력의 목적은 책임으로부터의 자기방어다. 자기를 방어할 만큼이 그가 가진 권력의 크기다.

이런 점에서 노동자에겐 권한도 없지만 무엇보다 권력이 없다. 법적으로 권한을 준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권한이 권력이 되기 위해서는 현장에서 권력에 맞서는 숱한 시도가 있어야 하고 그 시도를 통해 권한을 행사하더라도 아무렇지 않은 수준이 돼야 비로소 노동자가 권력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권한이 주어지더라도 그다음에 권한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권력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이 필수적이다.

사실 권한을 얻기 위한 법제화 투쟁보다 권력을 향한 싸움이 더 험난하다. 권한을 줬는데 왜 행사하지 못하는가라며 ‘윗선’은 발뺌하고 도망친다. “우리는 지시했지만 따르지 않고 권한을 줬는데 행사하지 않은 것은 저들이다.” 이렇게 권한이 주어지면 권한을 받고도 행사하지 못하는 쪽의 무능과 비겁함 그리고 불감증 문제로 돌려지기 쉽다. 그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현장에서 겹겹이 작동하는 권력구조는 외면하고 말이다.

권한이 저항을 더 무력화해

권한을 주지 않는 것보다 권한을 주는 것이 관리에 대해 책임을 묻는 저항을 더 잘 무력화한다. 많은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불만이나 개선책을 이야기하면 관리하는 사람이 늘 하는 말이 있다. 이미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절차와 과정이 제도에 다 있다는 말. 그리고 그 절차와 과정을 이용할 권한이 있다는 말. 결국 이야기하고 나면 있는 것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서 무슨 새로운 것을 원하느냐는 말이나 듣기 쉽다. 이처럼 권한이 한번 주어지고 나면 그 절차와 과정을 모르는 사람의 문제가 된다. 이 때문에 권한을 주고 나면 오히려 아래가 더 책임져야 하고 권력을 가진 자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

그렇기에 권한을 가지기 위한 법제화 투쟁만큼이나 중요한 게 권력을 가지기 위한 투쟁이다. 이 투쟁은 좋은 사례를 만드는 것에서 시작한다. 아무리 권한이 주어지더라도 그것이 권력이 되지 못함을 깨닫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바뀐다. 권한의 바깥에 있을 때는 권한을 가지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그 환상의 힘으로 버틸 수 있지만 그 환상이 깨지고 나면 남는 건 냉소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한을 행사하더라도 자기가 위험해지는 것이 아니라 보호될 수 있다는 선례가 있을 때 비로소 사람들은 새로운 것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그러나 권력을 가지기 위한 투쟁에는 엄청난 난관이 있다. 권한이 투쟁해서 쟁취하는 것이라면 권력은 스스로 조직하는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현장에서 권력구조에 도전하며 권한을 행사하려고 할 때 나를 보호하는 힘은 나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다른 사람에게서 온다. 그 곁에 있는 사람들의 연쇄고리가 조직됐을 때 비로소 사람들은 용기 내어 말할 수 있고 이것을 권력이라고 말한다.

과거 유가족 운동이 민주화운동을 하다 희생된 가족들의 운동이었다면 지금은 새로운 산업재해의 유가족 운동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사고로 희생된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 공동취재사진

“안 됩니다” “그가 맞습니다” 해줄 사람

맡은 일이 아닌, 이선호씨가 안전장치 없이 그런 일을 지시받았을 때 “그에게 그 일을 시켜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해주는 사람. 또한 이선호씨가 자기 일이 아닌 것에 대해 “제가 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를 보호하기 위해 “맞는 말입니다. 부당한 지시입니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 그 말을 한 사람의 옆에 또 “당연한 말을 했는데 왜 그러십니까?”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존재할 때 말할 권한을 행사한 나는 보호된다. 이 말하는 사람들의 연쇄고리, 이 조직된 힘이 권력이다. 권력을 향한 싸움은 주체를 달리 보게 한다. 권한의 주체가 개개인이라고 한다면 권력은 그 현장에 있는 조직된 힘이 주체가 된다.

이 선례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가. 하다못해 회의 하나만 해도 그렇다. 회의에서 부당한 지시와 언어의 독점에 저항하기 위해 한 사람의 용기 있는 행동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그의 용기가 ‘용기’라는 개인의 덕성이 아니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그의 첫 번째 ‘아니요’ 이후에 나오는 재청과 삼청이다. 아무리 나에게 말할 권한이 있더라도 그것에 동조하는 사람이 적어도 둘은 더 있어야 그것은 조직화된 힘이 되고 ‘아니요’라고 말한 나를 보호한다. 조직이란 재청하고 삼청하는 사람을 만드는 과정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처음 “아니요!”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아니요”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드러내야 한다. 그것이 비록 주어진 권한이라 하더라도 말하는 순간 윗선의 압력을 받고 ‘모두’로부터 비난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회유당하고 입 닫는 길을 택한다. 나를 보호해줄 조직이 없을 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는 위험의 종류와 강도는 다르지만 대부분의 노동현장에서 나타난다. 언론은 MZ세대니 하며 지금 청년들은 다르다고 말하지만 말이다.(어떤 산업, 어떤 회사에서 이들이 다를 수 있는지를 따져보는 일이 사회과학일 것이다.)

여기 다른 사람의 재청과 삼청을 요구하며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한겨레> 보도에서 이재훈씨는 얼굴도 이름도 가리지 말아달라고 했다. 무엇보다 사람의 신상을 털어 조리돌림하는 시대에 한국 사회의 모든 부모가 알아야 한다며 자기 얼굴과 이름을 드러냈다. 절규조차 못하고 그저 눈물이 뺨을 따라 줄줄 흘러내리기만 하는 이 얼굴은 요구한다. 이 얼굴을 대면하라.

이는 그저 고통을 대면하라는 말이 아니다. 고통을 강조하고 그 비참함으로 일시적인 동감을 이끌어내려는 몸짓이 아니다. 이 얼굴을 누구의 얼굴도 아닌 바로 보고 있는 당신의 거울로 삼아 우리 대다수의 운명을 대면하라는 말이다. 그렇게 대면하는 자는 고통받은 이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운명을 바꾸기 위해 재청과 삼청을 하도록 요구받는다.

새로운 유가족 운동의 시대

이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우리는 새로운 유가족 운동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과거 유가족 운동은 민주화운동을 하다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한 분들의 가족들 운동이었다. 그분들이 용기 내어 국가와 맞서 싸우며 시민들의 재청과 삼청을 기다린 운동이었다. 반면 지금의 유가족 운동은 국가폭력과 산업재해의 유가족 운동이다. 그중에서도 노동자 가족인 노동자들의 유가족 운동이다. 노동자 김용균씨의 죽음을 대면한 노동자인 어머니 김미숙씨의 운동이었고, 노동자 이선호씨의 죽음 앞에 선 아버지인 노동자 이재훈씨가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드러낸 사건이다. ‘삶의 희망’(이재훈씨 휴대전화에 저장된 아들 이선호씨의 이름)을 국가와 회사로부터 되찾기 위해 당신의 이름과 얼굴을 드러낸 사건이다.

이 얼굴들은 요구한다. 노동현장에서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권한의 주체가 되는 것을 넘어 서로를 보호할 권력이 될 것을 요구한다. “아니요”라고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의 말에 재청과 삼청을 통해 보호하고 저들이 함부로 지시하지 못하고 책임으로부터 도망가지 못하도록 말이다. 저들이 책임으로부터 도망쳐 자신들을 보호할 권력을 가졌다면 우리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권력이 될 것을 요구한다. 재청하고 삼청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통해.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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