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았지만 낯선 맛에..'고물'을 탐닉하다 [다른 삶]

성우제 2021. 5. 14.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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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제의 '경계인'

[경향신문]

밸류빌리지는 ‘없는 것이 없는’ 중고 생활용품 백화점이다. 이곳에서 ‘앤틱’을 구하는 사람들도 있고, 실생활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찾는 이들도 많다.

작년 12월 텔레비전을 새로 샀다. 큰아이가 가족에게 준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캐나다살이 18년 만에 세 번째로 구입한 텔레비전이다. 맨 처음에는 배불뚝이 모양의 브라운관형을 샀고, 6년쯤 지나 아이들이 원해서 평면 텔레비전으로 바꾸었다. 요즘 들어 텔레비전이 컴퓨터 모니터로 주로 쓰이는 바람에, 이번에는 인터넷에 바로 연결되는 스마트 텔레비전을 새로 구입했다.

유행에 크게 휩쓸리지 않는 나라
물건을 오래 쓰기도 하거니와
남이 쓰던 것들에도 거부감 없어

우리 집에서 고장이 나지 않았는데도 새로 산 물건이라고는 텔레비전과 컴퓨터, 휴대폰밖에 없다. 사용 환경이 빨리 변해서 기계가 멀쩡해도 거기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이외에는 고쳐 쓸 수 없을 정도로 고장이 나지 않는 한 바꾸지 않았다. 마음이 늘 불안(나 같은 이민1세는 평생 떨치기 어려울 것이다)한 이민자이다 보니 돈을 아끼려는 습성이 거의 병처럼 몸에 배어 그럴 수도 있겠고, 물건을 쉽게 바꾸거나 버리지 않는 이곳의 문화 또한 적잖게 작용했을 것이다.

텔레비전을 새로 들여오면서, 우리 집에 있는 다른 가전제품들을 살펴보았다. 한국과는 달리 냉장고와 세탁기는 이사 갈 때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집에 딸려 있는 물건이다. 지금 사는 집에 이사 온 지 15년이 되었으니, 냉장고는 아무리 못해도 15년은 더 된 것이다. 한국에서 쓰다 가져온 김치냉장고도 20년 넘게 사용 중이다. 냉동고도 올해로 17년이 넘은 것이다.

이 집에 살면서 바꾼 가전제품이라고는 세탁기와 식기세척기, 부엌의 전기스토브가 전부이다. 세 가지 모두 더 이상 고쳐 쓸 수도 없게 고장이 나서 새로 구입했다. 그러고 보면 가전제품 치고 수명이 다하지 않을 때까지 쓰지 않는 것은 없다. 텔레비전도 사용 환경이 바뀌는 바람에 교체한 거니까.

주위를 둘러보면, 물건을 웬만하면 바꾸지 않고 오래 사용하는 것이 이 사회의 문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유행에 크게 휩쓸리지 않는 사회이기도 하거니와, 특히나 가전제품 같은 물건에는 유행이라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런 문화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팔거나 버리는 중고 물건을 통해서였다. 수십년 사용하다가 용도 폐기되어 내놓는 물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빈티지’라 부를 만한 물건들이다. 자기 물건을 오래 쓰는 문화가 있다 보니, 남이 내놓은 중고품에 대한 거부감도 덜한 편이다. 그런 물건들을 접할 수 있는 경로는 서너 가지쯤 된다.

물건을 집 앞에 이렇게 내놓으면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가거나, 쓰레기차가 수거해 간다. 대부분 오랫동안 사용하던 것들이다. 이사 갈 때는 필요없는 물건을 이렇게 버리는 경우가 많다.

첫 번째는 주택가이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멀쩡하지만 오래된 물건들을 집 앞에 내놓는 경우가 많은데, 필요로 하는 사람이 들고 가기도 하고 쓰레기에 가까운 고물이면 시청에서 수거해간다. 이민 초창기에는 사람들이 오래된 물건들을 집 앞에 내놓는 것이 신기해 보였다. 조립식으로 판매하는 요즘 가구점에서는 절대 찾을 수 없는 구형 원목 책상이나 책꽂이도 만날 수 있었다. 쓸 만큼 쓰고 더 이상 필요가 없어서 버리는 것 같았다.

초기 이민자 중에는 그런 물건을 만나려고 주말 아침에 주택가를 일부러 운전하며 돌아다니는 이들도 있었다. 궁상맞아 보일 수도 있겠으나 신규 이민자에게는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가구나 전등, 액자처럼 자기가 필요로 하는 물건을 발견하면 무엇보다 돈을 아낄 수 있었다. 낯선 동네를 구경하는 재미도 있고, 이곳의 버리기 혹은 나눔 문화를 경험할 수도 있었다. 오래되어 오히려 낯선 물건을 사용하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일부러 찾아다니든, 우연히 발견하든 간에 ‘고급 고물’을 만나는 행운도 종종 누릴 수 있다. 물건이 너무 좋아서 집어가기 꺼릴까 봐 “마음 편히 가져가세요”라는 메모까지 붙여놓는 친절한 주인도 있다.

오디오 시스템. 제 가격을 주고 산 건 한국서 가져온 턴테이블뿐이다. 스피커는 누가 내놓은 것을 들고와 수리했고, 앰프와 CD플레이어는 개라지세일과 밸류빌리지에서 각각 20달러에 샀다.

내가 만난 가장 좋은 고물은 스피커 한 쌍. 어느 집 앞에 놓여 있었는데, 먼지가 묻어 있었으나 원목으로 된 통만 봐도 범상치가 않았다. 혼자서는 들기도 어려울 만큼 무거웠다. 집에 와서 앰프에 연결해보니 잡음이 났다. 인터넷을 검색해 고치는 방법을 알아냈다. 찢어진 ‘에지’를 벗겨내고 새로 주문해 받은 것을 ‘우퍼’에 붙였다. 나로서는 처음 해보는 스피커 수리였다. 찾아보니 중저음이 좋다는 평가를 받는 스피커였다. 들어보니 과연 그랬다.

록다운 직전 중고 가게 ‘밸류빌리지’ 앞에 줄을 선 사람들. 실내 인원을 제한하는 바람에 이렇게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그나마 지금은 록다운을 해서 아예 문을 닫았다.
주말에 열리는 동네 ‘차고 세일’
기부 물품 파는 ‘밸류빌리지’
값 떠나 정리·나눔 의미 되새겨

이런 행운을 공짜로 만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관심을 가지고 발품을 팔다보면 좋은 물건을 저렴한 가격에 살 수는 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경로 또한 여러 가지인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일반 가정에서 하는 주말 ‘개라지(garage·차고)세일’. 주인이 자기가 쓰던 물건을 내놓고 값을 매겨 판매한다. 온갖 잡동사니가 다 나온다. 물건을 필요로 하거나, 중고 물건에 관심이 있거나, 그냥 재미삼아 개라지세일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서 아침 일찍 가야 물건다운 물건을 구경할 수 있다.

나는 낯선 동네를 갔다가 뜻하지 않게 마주친 개라지세일에서 괘종시계를 10달러(약 9000원)에 구입했다. 어릴 적 시골집 마루 벽에 걸려 있던 시계가 생각났고 ‘Made in Korea(한국산)’라고 적힌 것에 혹했다. 개라지세일에서 내가 주로 구입한 것은 LP음반. 1960~1980년대에 나온 클래식과 팝송 음반이다. 20대 때 이른바 해적판(‘빽판’이라고도 했다)으로 음악을 들은 사람이라면 이런 ‘원반’ 앞에서 조금 흥분하게 되어 있다. 게다가 가격이 장당 1달러면 앞뒤 안 가리고 구입하게 된다. 개라지세일에 나온 LP 전부를 산다는 조건으로 헐값에 구입할 수도 있다. 개라지세일에서는 흥정하는 재미도 있다.

주택 마당과 차고에서 이루어지는 개라지세일보다 좀 더 규모가 크고 내용이 좋은 것은 ‘콘텐츠세일’이라 불린다. 부모의 유품을 자식들이 정리해 파는 경우도 있고, 주택에 살다가 콘도(아파트) 또는 요양원으로 이사를 가는 노인들이 평생 사용해온 물건을 저런 방식으로 치우기도 한다. 콘텐츠세일은 주로 집 실내에서 이루어진다. 그곳에 들어가면 수십년에 걸친 인생의 흔적을 물건을 통해 구경할 수 있다.

콘텐츠세일을 하면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몰려 줄을 서기도 한다. 몇 년 전부터는 전문 대행업자가 등장해 코로나19로 록다운을 한 지금도 온라인으로 콘텐츠세일을 한다. 그만큼 인기가 좋다는 얘기다.

개라지세일도, 콘텐츠세일도 돈벌이를 한다기보다는 쓸 만한 고물을 버리지 않고 남들한테 헐값에 넘겨주면서 정리를 한다는 의미가 크다.

이런 경로 말고도 ‘온라인 시장’에도 오래된 물건들이 종종 등장한다. 온라인 시장과 더불어 토론토에서 지난 십수 년간 급부상한 중고품 전문 매장이 있다. ‘밸류빌리지’라는 가게이다. 10여년 전만 해도 성격이 비슷한 ‘굿윌’이 있었으나 지금은 밸류빌리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밸류빌리지는 195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범해 미국과 캐나다, 호주 등에서 성업 중인 중고 전문 가게. 중고 물건을 버리지 않고 다시 사용하게 함으로써 환경을 보호하는 데 일조하는 한편 지역 고용창출에도 도움을 주기 위해 설립된 가게이다. 주로 지역사회의 비영리단체와 손잡고 매장을 운영한다. 토론토에만 10개가 넘는다.

밸류빌리지에서 파는 물건은 모두 기부받은 것들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집에서 가져오면, 직원들이 먼지를 털고 다듬고 고쳐서 매장에 내놓는다. 매장은 주로 넉넉한 주차장을 가진 플라자(광장)에 위치해 있다. 널찍한 매장에는 가구, 전자제품, 주방용품, 옷, 신발, 책, 음반, 장난감, 액자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이 없다. 중고 생활용품 백화점이다. 일반 가게들처럼 매일 문을 열고 물건을 교환해주기도 하고(물론 안 되는 것도 있다) 반값 세일을 하기도 한다.

나는 이 매장에 10년 넘게 드나든 단골이다. 그곳에 자주 가는 이유는 남들이 사용하다가 내놓은 오래된 물건을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과거 서울의 황학동에도 자주 나갔던 터라, 나에게는 밸류빌리지만큼 재미있는 공간도 드물다. 집에서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 생기면 기부센터에 갖다준다. 밸류빌리지에서 돈을 주고 샀다가 기부센터에 그냥 되돌려준 물건도 많다.

이런 곳에 발을 들이기 시작하면 수업료를 치러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처음에는 오래된 물건들이 신기해 보여서 앞뒤 가리지 않고 사들였다. 집에 갖다놓고 보면 공간만 잡아먹는 잡동사니인 경우가 많았다. 구입 품목을 커피기구와 LP음반, 책으로 한정하고 난 다음에야 실수를 줄일 수 있었다.

집에서 오래된 물건을 쓰는 데 익숙해 있으니, 남이 쓰던 고물을 구입해 사용하는 데는 거부감이 별로 없다. 오히려 평소 접하기 어려운 물건을 발견하고 사용하는 재미를 즐기는 편이다. ‘Made in West Germany(서독산)’라고 적힌 브라운 커피그라인더나 슈바이처 박사의 오르간 실황 연주 LP(3장)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작지 않았다.

여러 중고 ‘세일’에서 사 모은 각종 커피기구들. 오랫동안 중고를 모으고 사용하는 재미를 누렸다. 요즘에는 주변에 나눠주는 재미를 찾는 중이다.

그런 식으로 사 모은 커피기구가 넘쳐나서 요즘은 기회 닿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고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 남들이 오래 쓰고 내놓은 고물에 탐닉해 나처럼 사 모으는 이들도 여럿 만났다. 그런 이들의 공통점은 남들한테 자랑을 많이 한다는 것. 밸류빌리지에서 자주 마주친 어느 70대 중국 사람은 앰프에 집중해서 지금 집에 있는 것만 해도 20대가 넘는다고 했다. 나를 집에 초대해 구경시켜주겠다고 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1년이 지나도록 만나지 못하고 있다.

▶성우제


캐나다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원(原)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일하다 2002년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했다. 16년째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한국의 여러 매체에 기고해왔다. 재외동포문학상을 두 차례(소설 및 산문 부문) 수상했고 <느리게 가는 버스> <딸깍 열어주다> 등 단행본 5권을 냈다.

성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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