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라도 목소리를 내고 싶어서.. [책과 삶]
[경향신문]
여성, 귀신이 되다
전혜진 지음
현암사 | 344쪽 | 1만6500원
새로 부임한 원님의 꿈자리, 젊은 나이에 죽은 여성 귀신이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한다. 사연을 들은 원님은 뛰어난 지혜로 사건을 해결한다. 범인은 처벌받고 귀신은 성불한다. 우리가 아는 귀신 얘기의 흔한 플롯, 과연 ‘해피엔딩’일까? <여성, 귀신이 되다>는 이 질문에 단호히 ‘아니요’라고 말한다.
여성의 입을 틀어막던 시대, 죽어서라도 목소리를 내기 위해 여성들은 귀신이 됐다. 그러나 남성 사대부들은 그 목소리마저 입맛대로 편집했다. 여성 귀신들은 원님의 유능함을 드러내는 장치가 되거나, 사대부가 원하는 여성상을 재현해야 했다. 남성 사대부의 활약으로 여성 귀신이 성불하는 순간 ‘이 여성이 왜 죽어야 했는지’ 같은 중요한 질문은 사라졌다. 우리가 알던 세계만 복원된다.
귀신·SF를 자주 써온 전혜진 작가는 여성 귀신들의 ‘잊힌 목소리’를 되짚는다. 고전문학을 샅샅이 뒤져 이야기 78편을 추리고 재구성해 당대 사회상과 함께 분석한다.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현실을 사는 오늘날 여성들의 고난이 함께 드러난다. 장화·홍련은 정조관념의 피해자였고,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바리는 선택적 여아 낙태를 다시 소환한다.
새로 목소리를 얻은 귀신들은 억울한 피해자 프레임도 뛰어넘는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남성 사대부들을 고발하기도 하고(‘강도몽유록’), 세계의 창조자로 그려지기도 한다(‘마고할미’). 바리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위해 고난을 겪고 돌아오지만, 왕위를 마다하고 고행길에서 만난 약자들을 위해 수호신이 된다. 남성 사대부들이 미처 다 덮지 못한 ‘이야기의 힘’이다. 올여름엔 ‘뻔한 귀신 얘기’ 대신 귀신들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어보는 건 어떨까.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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