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삶의 장애물을 치워주진 못하지만, 담대하게 맞설 용기를 준다 [전희상의 런던 책갈피]

전희상 경제학 박사 2021. 5. 14.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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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이며 은총인 일상의 이중성

[경향신문]

메릴린 로빈슨
<잭>

메릴린 로빈슨의 <길리아드>는 1950년대 미국 아이오와주의 가상 소도시 길리아드를 배경으로 한다. 소설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존 에임스 목사가 어린 아들에게 남기는 편지 형식을 취한다. 별다른 줄거리 없이 회고담, 인생과 신앙에 대한 성찰, 아내와 아들에 대한 염려가 편지글의 주종을 이룬다. 등장인물도 에임스 목사 가족과 그의 오랜 친구 보튼 목사 가족에 국한돼 있다.

소박한 노년이지만 그 속에서 평온과 신의 은총을 누리는 에임스 목사의 잔잔하고 단단한 일상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지루한 소설이지만 상당한 호평을 받았고 로빈슨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주었다.

<길리아드> 이후 로빈슨은 세 권의 소설을 출간했다. 하나하나 독립된 소설이지만 <길리아드>의 주요 등장인물들인 에임스 목사의 아내 릴라, 보튼 목사의 자녀 글로리와 잭이 차례로 소설 화자로 나선다. 길리아드가 하나의 세계라면 이 세계는 네 편의 소설을 거치며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그 속에서 인간과 삶의 깊이는 점점 깊어진다. 로빈슨이 처음부터 이런 구성을 계획한 것은 아니다. 다만 소설 속 캐릭터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새로운 소설로 그를 자연스럽게 이끌어갔다.

<길리아드> 시리즈를 관통하는 것은 ‘일상’이다. 소설은 사건과 잘 짜인 줄거리를 따라가는 대신 지루함과 고독과 기다림으로 점철된 일상에 머문다. 그런데 이 일상은 성찰로 가득 찬 것이기도 하다. 에임스 목사에게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신학의 모습을 띤다면(그는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와 존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언급한다) 에임스 목사의 부인 릴라와 보튼 목사의 아들 잭은 지울 수 없는 수치심과 끊임없이 싸운다.

로빈슨이 작년에 펴낸 <잭>은 전작에 비해 성찰의 요소가 특히 강하다. 잭은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어려서부터 겉돌았다. 값나가지 않는 물건을 별 이유 없이 쉽게 훔쳤고 거짓말에 능수능란했다. 사생아가 있었지만 무관심 속에 일찍 죽었고 결국 가족을 떠나 방황하다 감옥에 가기도 했다. 스스로를 해로운 인간으로 여기게 됐고 고립되고 기약 없는 삶을 택했다. 깊은 수치심으로 인해 아버지 보튼 목사의 사랑과 기다림을 외면했다. 다시 말해 잭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탕자이지만 아버지의 넓은 품을 바라보면서도 그곳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한 비극적 탕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잭은 비천한 일상 속에서 운명적 사랑 델라를 만나게 된다. 로빈슨은 이 사랑을 기적적 은총으로 묘사한다. 삶의 장애물을 일소하지는 못하지만 그러한 사랑은 현실을 직시하고 장애물에 담대하게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여기에 낯선 타인에게서 신의 이미지를 보고 신에 대한 경외에서 인간 사이 사랑의 원형을 발견한다는 칼빈의 영향이 나타난다. 로빈슨은 칼빈의 신학에 깊이 천착하는데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은 모든 것이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담겨 있다고 언급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아마도 그가 한편으로는 절망이고 또 한편으로는 은총인 일상의 이중성에 대해 꾸준히 써나가는 이유일 것이다.

전희상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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