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줌인] 조선 건국의 서막 '위화도 회군'

최경식 2021. 5. 15.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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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변의 역사 ③>  
왕조 교체를 불러온 거대한 정변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전말 
태조 이성계 어진
[파이낸셜뉴스] "만일 상국(上國)의 경계를 범해 천자(명나라 황제)께 죄를 얻으면 종사와 백성에게 화가 곧 이를 것이다. 내가 순(順)과 역(逆)으로써 글을 올려 회군을 청했으나, 왕이 살피지 못하고 최영이 늙고 어두워 듣지 않으니, 그대들과 함께 들어가서 왕에게 친히 화와 복을 아뢰고, 왕 옆의 악한 사람(최영)을 제거하겠다." -태조실록 中

고려 말기인 1388년(우왕 14년) 5월, 왕명으로 중국 명나라의 요동성을 치러 갔던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압록강 위화도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고려 왕궁이 있는 개경으로 회군할 것을 천명했다. '위화도 회군'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추후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이라는 '왕조 교체'를 불러온 대사건으로 기록된다.

일개 변방 장수 출신에 불과했던 이성계는 조선 왕조의 '태조(太祖)'가 됐고, 고려 왕족이었던 왕씨 일가와 부패한 주류 세력이었던 권문세족(權門勢族)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아울러 전주 이씨 왕족과 더불어 새로운 주류 세력으로서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가 등장했고, 이들은 고려 왕조의 불교 중심주의와 달리 '유교(儒敎)' 중심주의를 내세우며 신생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다.

조선의 개국(開國) 세력들과 일단의 역사가들은 위화도 회군을 고려 왕조가 부덕해 민심을 잃은 만큼 다른 사람이 천명을 받들어 왕조를 바꾼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시작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를 왕명에 정면으로 대항한 일종의 '반역(反逆)'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많다. 또한 자주 의식을 스스로 포기하고, '소중화(小中華)' 사대주의를 본격적으로 표방하는 계기가 됐다는 비판도 적지 않게 제기된다. 이처럼 사후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정변 중 하나인 위화도 회군 전말을 되돌아봤다.

■요동치는 국제정세, 명의 압박
고려 말기, 국제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오랜 기간 고려 및 전세계에 영향을 미쳤던 (칭기즈칸의 후예들인) 원나라가 쇠퇴하고, 새로이 중국 한족을 중심으로 한 명나라가 부상하고 있었다. 명나라의 태조는 그 유명한 '주원장(朱元璋)'이다.

이 같은 원·명 교체기에 고려는 내부적으로 친원파와 친명파로 나뉘어 갈등을 빚고 있었다. 고려 왕조의 주류 세력이었던 권문세족들은 명나라를 적대시하며 몽골로 내몰린 북원(北元)과 가깝게 지냈지만, 이 당시 비주류였던 신진사대부들은 명나라의 부상에 주목하며 국가의 장래를 생각해 명나라와 밀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신진사대부들 중 좀 더 급진적인 사람들은 친원파인 권문세족의 기득권을 타파하고,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은 물론 역성혁명을 통해 새로운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원나라를 몰아내고 중국 대륙의 중심 국가가 된 명나라는 고려에 대해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1388년 2월, 명나라는 고려 사신 설장수를 통해 "철령 이북은 원래 원나라에 속했으니, 모두 요동에 귀속시킨다"며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겠다고 통고했다. 이는 고려 서북면인 함남 안변 이북 지역의 영토를 명나라에 넘기라는 말이었다. 이 같은 요구에 대해 고려 조정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시 국가의 수상격이자 친원파 중 한 사람이었던 최영 장군을 중심으로 한 고려의 주류 세력들은 명나라의 행태에 대해 불만이 고조돼갔다.

■요동정벌론 대두와 이성계의 사불가론
최영은 직접 나서 명나라에 철령위를 철폐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에 따라 최영은 소수의 중신회의를 열어 명나라의 요동 정벌과 관련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우왕과도 비밀리에 접촉해 요동 정벌을 논의했고, 결국 각 도의 군사들을 징발해 명나라의 요동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요동정벌에 대한 백성들의 민심은 좋지 않았다. 그 당시 왜구의 침략이 계속됐고, 농사철이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최영은 우왕의 재가를 얻은 후 자신을 팔도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 조민수를 좌군도통사로 삼아 좌우군 통합 3만8800여명을 이끌고 출병하기로 했다.

이런 가운데 우군도통사 이성계는 요동정벌에 끝까지 반대했다. 그는 그 유명한 '사불가론(四不可論)'을 꺼내들었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않고,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왜구가 창궐할 수 있고,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정의 비주류였던 이성계의 간언(諫言)은 전혀 통하지 않았고, 최영의 뜻에 따라 이성계는 마지못해 조민수와 요동정벌에 나서게 된다.

■출병, 거듭된 난항
이성계와 조민수가 좌군과 우군을 이끌고 개경을 출발했는데, 다소 이상한 모습이 나타났다. 최고사령관 격인 팔도도통사 최영의 모습이 원정군 대열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우왕이 최영의 출전을 막았기 때문이다. 선왕이었던 공민왕의 암살을 지켜봤던 우왕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고, 최영이 개경에 남아 자신을 보필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최영은 원정군 대열에서 빠지게 됐는데, 결과적으로 이는 최영의 '자충수'가 됐다.

최영 없이 출병한 요동정벌군은 1388년 5월에 압록강에 다다랐고, 압록강 중간에 위치한 위화도에 진을 쳤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큰 비가 계속 내렸고, 군량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했다. 군사들의 사기도 떨어지면서 탈영병들이 속출하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악화되자 이성계는 우왕에게 "요동성에 이르더라도 진퇴(進退)가 어려울 수 있다"며 회군(回軍)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 조정에서 답신이 없자 이성계는 최영에게 사람을 보내 거듭 회군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며칠 뒤에 온 답신은 이성계의 바람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에게 요동성으로 서둘러 진군하라고 명령했다. 진군과 회군의 갈림길에서 이성계는 조민수 등 측근들을 불러모아 대책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군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당초 조정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를 것 같던 조민수도 이미 마음을 완전히 바꾼 상태였다. 이성계는 다시 한번 장고(長考)를 한 후 마침내 역사의 운명을 크게 뒤바꾸는 결정을 하게 된다.

■위화도 회군
이성계가 회군을 결정했을 때 모든 군사들은 크게 기뻐하며 찬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요동정벌에 대한 부담이 상당히 컸던 것이다. 장수와 군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이성계는 즉시 병력을 요동이 아닌 개경으로 향하게 했다.

위화도 회군 소식은 조정에 신속하게 전달됐다. 큰 충격을 받은 우왕과 최영은 평양에서 개경으로 허겁지겁 돌아와 방어에 나섰다. 6월 개경 근교에 이르러 진을 친 이성계는 우왕에게 "최영을 제거하지 않으면, 종사를 전복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대해 우왕은 "군신의 대의는 고금을 통한 의리"라며 되레 이성계 등을 책망했다. 아울러 개경 수비를 위해 급히 군사를 모아 개경 안팎의 골목 입구를 수레로 막는 한편 조민수 등의 관작을 삭탈했다.

이성계는 개경성의 숭인문 밖 산대암(山臺岩)에 진을 친 뒤 지문하사 유만수를 숭인문, 좌군을 선의문으로 보내 성문을 돌파하도록 했다. 그러나 최영의 방어에 막혔다. 이어 조민수의 우군이 재차 공격했지만, 이번에도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공격이 거듭되자 수적으로 열세인 개경성의 군사들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성문이 뚫렸고, 이성계 등은 궁궐 내 화원을 겹겹이 에워쌌다. 우왕과 최영은 화원 속에 있는 팔각전(八角殿)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성계 등은 우왕에게 최영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최영이 순순히 나오지 않자 서너 명의 군사들이 팔각전으로 진입해 최영을 사로잡았다.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
개경을 장악한 이성계 등은 최영을 귀양 보내고 우왕을 폐위한 뒤 중앙 정치의 실권을 손에 쥐었다. 요동 정벌 계획은 폐기됐고, 명나라의 연호가 시행됐으며 원나라 복장 대신 명나라 의복을 입게 했다. 우왕의 뒤를 이어 창왕이 조민수와 문하시중 이색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조민수와 이색 등은 창왕을 내세워 이성계 일파를 견제하려 했다. 그러나 이성계와 그를 지지하는 조준, 정도전 등 개혁성이 강한 신진 관료들이 국정 전반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조민수는 유배되고 이색은 관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이후 '폐가입진(廢假立眞,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움)'을 명분으로 창왕은 1년 만에 폐위됐고,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성계와 그 일파들은 과감한 개혁 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관리의 직급에 따라 토지를 지급하는 '과전법(科田法)'을 실시해 대토지를 소유했던 권문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켰고, '숭유억불(崇儒抑佛)' 이념에 기반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시행하는 한편 사찰의 재산을 몰수했다. 또한 관제를 '육조(六曹)'로 개편했고, 정치 논쟁을 활성화하기 위해 '경연(競演)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도전 등 급진 세력들은 비단 개혁에 만족하지 않고 역성혁명을 통해 이상적인 유교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 이러한 기조는 정몽주 등 고려 왕조 내에서의 개혁을 원했던 온건 개혁파와 심각한 갈등을 빚게 됐다. 국가의 방향성을 놓고 급진 개혁과 온건 개혁이라는 두개의 큰 물줄기가 대립하는 가운데 역사의 운명은 끝내 급진 개혁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머지않아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훗날 제3대 왕 태종)이 온건 개혁파의 영수인 정몽주를 제거하는데 성공했고, 이후 이성계는 공양왕이 폐위된 후 왕으로 추대됐다. (이 때 이성계는 자신의 정적이었던 정몽주를 존경해 끝까지 포섭하려 했지만, 이방원이 이성계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정몽주를 제거하자 크게 분노한 것으로 전해진다.) 국호도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었다. 47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려 왕조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새로이 조선 왕조의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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