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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 사라진 시대에도 굳건한 '동전 왕국' 풍산

입력 2021. 05. 15. 06:55 수정 2021. 05. 15.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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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가격 10년 내 최고치, 회사채 인기에 증액 발행..'구리 옷' 벗어 던지고 첨단 소재 기업으로 거듭날까

[마켓 인사이트]


위태롭던 ‘동전 왕국’ 풍산이 살아나고 있다. 체크·신용카드와 모바일 결제의 급격한 확산으로 전 세계에서 동전 수요가 급감하고 있지만 구리를 활용한 전기차 보급이 확산되면서 풍산의 기업 가치가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
 
여기에 경제 회복 기대에 따른 구리 수요 증가로 풍산의 실적도 덩달아 빠르게 개선되고 있다. 물론 원자재 시황에 따라 출렁이는 수익성을 안정화시키고 시대의 변화에 맞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발굴하지 못하면 반세기 동안 이어 온 탄탄한 시장 입지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란 우려도 만만치 않다.
 
주가는 고공 행진…회사채는 ‘품귀 현상
 
사실 지난해까지 주식 시장이나 채권 시장에서 풍산은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시황 악화로 영업실적이 나빠지고 재무 구조 개선이 쉽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서 한국 신용 평가사는 풍산의 신용 등급(A) 전망을 기존 ‘긍정적’에서 ‘안정적’으로 낮추기까지 했다. 신용 등급이 오를 가능성이 사실상 없다고 본 셈이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올 들어서다. 구리 가격이 1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면서 투자자들이 구리 관련 업종에 속한 기업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 등으로 구리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데 공급이 충분하지 못해서다. 구리는 전기 전도성이 뛰어나 신재생에너지를 저장하고 운반하는 데 적합하다. 이렇다 보니 친환경 발전과 전기차 보급 확산 등과 맞물려 전 세계적으로 구리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경제가 살아나면서 생산·투자가 확대되고 이 과정에서 구리 수요는 당분간 계속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구리 채굴 규모가 큰 페루와 칠레 등 주요 생산국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의 여파로 아직 정상적으로 구리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구리 가격 상승이 불가피한 구조적 상황이다.
 


풍산의 사업 구조를 보면 신동과 방위 산업 부문으로 나뉜다. 신동 부문은 구리·아연·니켈 등 비철금속을 소재로 신동 제품을 제조·가공해 판매하고 있다. 구리 가격이 오르면 제품 판매 가격에 반영해 실적이 좋아진다. 당분간 구리 가격 상승이 이어질 것으로 보여 풍산의 실적 호조가 예상된다. NH투자증권은 풍산의 올해 연결 기준 영업이익이 전년(1212억원) 대비 96% 증가한 2376억원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실제 풍산의 올 1분기 연결 기준 영업이익은 624억3100만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올 1분기 순이익도 454억7300만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32억1600만원)에 비해 큰 폭으로 개선됐다. 시장의 예상치를 훌쩍 웃도는 실적이다. 방산 부문의 실적이 부진했지만 가파른 구리 가격 상승으로 신동 부문의 수익성 개선이 이를 상쇄했다. 올 들어 풍산의 주가가 고공 행진하고 있는 이유다.
 
채권 시장의 분위기도 다르지 않다. 각종 공제회와 자산 운용사들이 풍산의 회사채를 사들이고 싶어 하면서 이른바 ‘품귀 현상’이 나타날 정도다. 올 4월 풍산이 700억원어치의 회사채를 발행하기 위해 진행한 수요 예측에는 발행 예상 금액의 10배에 육박하는 6850억원의 뭉칫돈이 몰렸다. 결국 풍산은 1000억원 규모로 회사채를 증액 발행했다.
 
이 같은 기관투자가들의 ‘러브콜’은 풍산의 재무 지표만 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풍산의 재무 지표는 2019년까지 줄곧 하향세였다. 모바일 결제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풍산의 ‘효자 사업’이었던 동전 수요가 빠르게 줄었다. 각국 간 무력 충돌도 사실상 사라지면서 무기 수요도 예전만 못해졌다. 매출이 쪼그라들면서 한때 2000억원을 웃돌던 영업이익은 2019년엔 411억원으로 위축됐다. 덩달아 7~8%대를 유지하던 영업이익률도 2019년엔 1%대 후반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총기 규제를 들고나오면서 총기 구입이 어려워질 것에 대비한 사전 수요가 빠르게 늘기 시작했다. 여기에 스포츠탄 등 풍산이 개발한 민간 탄약도 인기를 끌었다. 그러면서 풍산의 연결 기준 매출은 2019년 2조4513억원에서 지난해 2조5936억원으로 증가했다. 상각 전 영업이익(EBITDA) 마진은 2019년 5.7%에서 지난해 8.6%로 껑충 뛰었다. 순차입금도 꾸준히 줄여 2016년 말 9312억원에서 지난해 말엔 6678억원까지 낮췄다.
 
올 들어선 구리 가격 상승으로 실적 개선의 모멘텀(동력)이 강해지자 신용 등급 상향 조정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한국의 한 신용 평가사는 지난해 상반기에 기존 ‘긍정적’에서 ‘안정적’으로 조정한 신용 등급 전망을 올 3월 말 다시 ‘긍정적’으로 회복시키기도 했다.
 
중·장기 사업·재무 전망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용 평가사가 신용 등급 전망을 1년 새 두 차례 조정하는 일은 흔하지 않다. 그만큼 풍산의 사업·재무 상태 개선세가 가파르다는 의미다. 유준기 한국기업평가 수석연구원은 “확고한 사업 기반과 보수적인 재무 정책을 감안하면 안정적으로 현금 흐름을 창출해 재무 안정성을 유지해 나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출렁이는 수익성은 고민…성장 돌파구 ‘절실
 
그렇다고 풍산의 미래가 장밋빛인 건만은 아니다. 풍산은 신동 제품 생산과 탄약 등 방산 제품 제조를 주력으로 하고 있다.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로 볼 때 신동 부문이 72.1%, 방산 부문이 27.9%를 차지하고 있다. 산하에 다수의 국내외 자회사도 두고 있다. 자회사들 역시 풍산과 연계돼 신동·방산 사업을 하고 있다.
 
풍산은 정부와 장기적 거래 관계를 맺고 있어 사업 안정성이 높은 편이다. 구리 가격에 따라 신동 부문의 사업 위험이 크게 오르내리지만 방산 부문이 통제해 주는 구조다. 올 들어 상승세인 구리 가격이 풍산의 실적 개선을 견인해 주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신동 부문은 원재료 가격 변동에 수익성이 크게 좌우된다. 1차 금속 산업의 특성상 제품 매출 대비 재료비 비율이 70~80% 수준에 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미국 내 신동 제품 생산을 맡고 있는 종속 기업은 원자재 시황에 따라 영업 흑자와 영업 적자를 반복하고 있다.
 
풍산은 연결 기준으로 한국 2개 자회사와 해외 10개 자회사를 포함하고 있다. 해외 법인 차입금과 관련해선 지난해 말 기준 1669억원의 지급 보증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해외 법인 중 사업 규모가 크고 재무 안정성이 뒤처지는 PMX에 대한 재무적 지원이 큰 부담으로 지적되고 있다.
 
PMX는 미국 내수 시장을 중심으로 동합금 제품을 생산·판매하고 있다. 자본이 잠식되기도 해 유상 증자도 단행했다. 수차례 유상 증자로 PMX의 차입 부담이 과거에 비해 줄기는 했지만 영업 실적의 등락이 반복되고 있다.
 
김연수 나이스신용평가 책임연구원은 “풍산이 지배 구조상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고 핵심 사업을 하고 있다”며 “자회사의 전반적인 재무 안정성이 저조해 추가적인 지원 부담 발생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종속 기업의 수익 구조가 안정화되지 못하다 보니 연결 기준 채산성은 별도 기준에 비해 낮게 나타나고 있다.
 
사업의 성장성도 고민거리다. 신동 부문은 동판·동봉·소전 등 다양한 신동 제품을 생산하고 있고 전 분야에서 한국 1~2위 시장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등 경쟁 업체들이 앞다퉈 시장에 진입하면서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방산 부문은 한국의 독점적인 시장 지위 덕분에 영업 수익성이 안정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내수 시장의 성장 한계가 뚜렷하다. 이 같은 고민에서 풍산은 북미·유럽·중동 등으로 수출처 확보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수출 물량은 내수 시장에 비해 안정성이 낮을 수밖에 없다. 방산 부문의 영업 실적은 수출 실적 추이에 따라 큰 변동성을 보이고 있다.
 
1968년 설립돼 ‘한 우물’을 파 온 풍산이 사업 확장에 보폭을 넓히고 있는 이유다. 풍산은 최근 전기차 소재 등 첨단 고부가 가치 제품 비율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수익성이 저조한 제품과 사업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신성장 동력을 찾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김은정 한국경제 기자 ke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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