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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는 날, 좋다는 시간 다 무슨 소용이야

한겨레 입력 2021. 05. 15.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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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발랄한 명리학][토요판] 발랄한 명리학
13. 택일에 관하여
게티이미지뱅크

“내 결혼식만큼은 명리학에서 말하는 최고 좋은 날을 잡아야지.”

취미로 사주를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사주에서 좋다는 날짜를 먼저 정하고, 그에 맞춰 일련의 결혼 절차를 차근차근 진행하는 아름다운 풍경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다. 식장 예약이며, 신혼집 이사며 신혼여행까지, 어느 하나 계획대로 쉽게 되는 게 없었다. 하물며 코로나19 시기 아닌가. 결혼을 앞둔 한 친구는 사주 상담으로 좋다는 결혼 날짜를 여러 개 받아왔는데 결국 예식장 예약이 비는 날이 결혼 날짜가 됐다.

사주를 봐준다는 가게 앞을 지나면 인생의 대소사를 앞두고 좋은 날을 ‘택일’해준다는 간판을 많이 본다. 전통적으로 사람들이 명리학의 도움을 받아 날짜를 결정하는 일들이 주로 이사, 결혼, 출산 같은 일이다. 요즘엔 개업일이나 성형수술 날짜를 택하는 일까지 명리학에 도움을 구한다고 하니 재미난 현상이다. 인터넷 광고를 보면 ‘판검사 되는 사주를 뽑아 준다’며 제왕절개 수술일과 좋다는 시간을 택해주고 고액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살다 보면 명리학에서 말하는 그 좋다는 날에 맞추어 대소사를 치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나고 생각해보면 내 결혼 날짜를 정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은 다름 아닌 전세 계약이었다. 올해는 해야지, 해야지. 두 사람이 진즉 마음을 맞추고도 결국 결혼을 성사시킨 건 신혼집이었다. 집값이 미쳐 돌아가는 시대에 ‘적당한 집 구하기=결혼 성사’나 다름없었다. 갑자기 신혼집이 구해지면서, 막연히 염두에 두고만 있던 결혼이 급물살을 탔다. 부동산에선 빼도 박도 못할 이삿날을 정해 통보해왔다. 전셋집 이사를 하려면 몇 가구가 이사 날짜를 동시에 맞춰야 가능하다고 하던가. 조정할 일말의 여지도 없이, 그렇게 실질적인 결혼 날짜가 정해졌다. 결국 결혼 택일은 공인중개사님이 해준 셈이다.

출산 택일도 생각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 같다. 출산 택일을 하는 원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배 속에서 열달을 채우고 나오는 아이는 대략 어느 해, 어느 달에 태어날지 예정일이 있다. 사주 여덟 글자에서 연주(년)와 월주(월) 네 글자는 대부분 정해진 상태에서 택일에 임하게 된다. 그저 일주(날짜)와 시주(시간)만이 선택의 여지가 조금 있을 뿐이다. 이미 정해진 네 글자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네 글자가 조화롭도록 구성해주는 것이 출산 택일의 핵심이다.

그래서 조금만 공부하면 셀프 택일도 할 수 있다는 ‘신생아 택일법’ 강좌들이 인터넷에 쉽게 검색된다. 강좌들에서 주로 강조하는 바는 글자들 간의 충이나 형을 피할 것, 그리고 전체적으로 음양이 조화롭고 목화토금수 오행이 편중되지 않도록 구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서점에 나와 있는 명리학 교재들을 보면, 신생아의 출산일과 시간을 택할 때 이론적으로 완벽한 최상의 사주를 구성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작업임을 설명하고 있다. 건강하고 무난한 성품의 아기 사주를 구성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도 말한다. 여덟 글자의 극히 나쁜 조합만 피할 수 있어도 괜찮은 택일이라고들 한다. 게다가 산부인과의 운영 시간과 의사의 시간표에 맞춰야 하니 선택지는 더 좁아진다.

과연 현실에서 명리학이 말하는 그 ‘좋다는 날’을 잡아 이사, 결혼, 출산을 실행할 수 있을까. 이사는 공인중개사와 협의한 날, 결혼은 예식장 예약이 빈 날, 제왕절개 출산은 병원에서 추천하는 스케줄에 의해 가능한 날 중 고르게 될 것이다.

사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택일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큰 걸 바라지는 않는다. ‘유난히 좋지 않다는 날이라도 피해보자’는 심리다. 사주 상담을 통해 택일을 한 뒤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았다는 한 산모는 “우리 애한테 정말 안 좋은 건 엄마가 뭘 해서라도 막아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택일 서비스를 사고파는 시장도 일종의 불안 비즈니스인 셈이다.

봄날원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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