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영화·연극 속 현실 재현,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을까" [이슈 속으로]

김용출 2021. 5. 16.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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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는 문학·예술계 '재현' 논란
문학계, 2020년 김봉곤 작가 단편 '그런 생활'
지인과 사적 대화 무단 인용 주장서 시작
김세희 작가, '아우팅' 제기에 "법적대응"
영화 '악마를 보았다' "살인 표현 잔혹" 비판
'아이캔 스피크' 재현 윤리적 측면서 호평
연극 '달아 달아..' 성폭행 직접 묘사 빈축
대상·방법·수위·출처 공지 등 종류 다양
작가·예술단체 "좀더 세밀한 접근 있어야"
무분별한 의혹 제기엔 우려하는 분위기
"사회적 공론화·가이드라인 필요" 지적도
재현의 논란이 일었던 단편 ‘그런 생활’이 담긴 김봉곤의 소설집 ‘시절과 기분’. 세계일보 자료사진
최근 김세희 작가와 친구라고 밝힌 A씨가 김 작가의 작품을 통해 성적 정체성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공개되는 ‘아우팅’됐다고 의혹을 제기하고 김 작가가 의혹을 부인하고 법적 대응을 시사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A씨는 지난달 23일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김 소설가와 18년간 친구였던 저는 필요에 따라 주요 캐릭터이자 주변 캐릭터로 알뜰하게 사용됐다”며 “저는 원치 않는 방식으로 준비되지 않은 커밍아웃을 해야 했고 가족들 역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김 작가는 이에 법무법인을 통해 ‘입장문’을 발표하고 “소설 속 인물과 에피소드는 작가가 삶에서 겪은 다양한 사람들과 경험을 모티프로 삼고, 여러 문헌과 창작물을 참고하면서 상상을 덧붙여 만들어낸 허구”라며 “수많은 외양과 성격의 특성, 일화와 대사 중 한두 개를 발췌하고, 더구나 특별한 개성이 아닌 보편적인 정형성을 드러내는 요소를 골라 특정인의 사생활을 침해했다고 주장하는 데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A씨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작가이기 이전에 친구로서 A씨가 고통받았다고 말하는 사실만으로도 수차례 사과했다”며 “분신과 같은 작품에 대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 결과물이라는 공격이 공개적으로 제기된 만큼 명예를 걸고 진실을 밝히며 대처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소설 작품과 영화, 연극 등 문학 예술계 전반에서 재현을 두고 다양한 논란과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논란이 이는 부문은 재현의 대상과 방법, 수위, 인용과 출처의 공지 및 소통 문제 등 다양하다.

◆문학계에선 무단 인용, 아우팅 등 논란

최근 문학계에서 재현을 둘러싼 논란은 지난해 소설가 김봉곤씨가 ‘젊은작가상’ 수상작인 단편 ‘그런 생활’에서 지인과의 사적 대화를 소설에 무단 인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시작됐다. 커밍아웃을 한 퀴어 소설가인 김 작가는 이 소설을 포함해 많은 작품에서 성소수자의 삶과 사랑을 핍진하게 그려 한국 퀴어문학의 대표주자로 불려왔다.

두 번째 소설집에 실린 단편 ‘그런 생활’에는 화자와 ‘C누나’의 민감한 대화가 담겨 있는데 ‘C누나’ 본인인 한 트위터 이용자는 “작품에 실린 말은 제가 김 작가에게 보낸 카카오톡을 단 한 글자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옮겨쓴 것”이라며 “성적 수치심과 자기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부분을 그대로 쓴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비판했다. 다시 얼마 뒤에는 첫 소설집에 실린 단편 ‘여름, 스피드’ 역시 지인이 보낸 메시지를 사전에 동의 없이 그대로 옮겨 피해를 입었다는 다른 피해자의 폭로가 나오면서 파문이 커졌다.

김 작가는 입장문을 내고 “당사자에게 소설화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것은 작가가 반드시 거쳐야 할 윤리적인 절차이자 작가로서 확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고 사과했고, 출판사들 역시 문제의 소설이 수록된 책 판매를 중단하겠다고 밝혔지만 논란은 한동안 수그러들지 않았다.
최근 문학 예술계 전반에서 재현의 대상과 방법, 수위, 사전 소통 등을 두고 다양한 논란과 논쟁이 제기되고 있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 포스터. 세계일보 자료사진
◆재현의 수위와 방법 두고 시끌시끌한 영화계

영화계에서도 재현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이나 논란이 있어왔다. 먼저 살인과 폭력을 어느 정도 수위로 재현해야 하느냐를 두고 논란이 계속돼 왔다. 다소 오래된 영화이지만,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2010)의 경우 인간의 숨겨진 악마성을 과감하게 드러냈다는 호평이 많았지만, 피칠갑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오면서 살인 표현이 너무 과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몇해 전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영화를 놓고 무엇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조정래 감독의 영화 ‘귀향’(2015)은 피해자들이 강간당하는 장면을 거부감 없이 담아 비판이 일었다.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겠다는 감독의 의지와 상관없이 피해자들에게 모욕감을 줬다는 지적이었다. 반면 김현석 감독의 ‘아이캔 스피크’(2017)의 경우 피해자 할머니의 일상에 초점을 맞추면서 피해자를 온전한 한 명의 인간으로 조명해 재현의 윤리 측면에선 호평을 받았다.
영화 ‘귀향’의 포스터. 세계일보 자료사진
◆공연계에서도 과도한 노출 등 논란도

연극계나 공연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지난해 서울연극제에서 상영된 연극 ‘달아 달아 밝은 달아’는 심청을 집단 성폭행하는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해 비판을 받았다. 극중에서 심청이 공양미 삼백석을 갚기 위해 ‘용궁’이라 불리는 중국 색주가(色酒家)에 팔려간 뒤 남성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담은 것이다. 연출 관계자는 “선정적으로 만들 의도는 전혀 없었다”며 “예술로 봐주시면 좋겠다”고 해명했지만,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일각에선 논란을 차단하기 위해 작품 내용을 변경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얼마 전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여자 주인공 ‘알돈자’가 노새끌이들에게 강간당하는 장면을 없애고 대신 노새끌이가 알돈자를 무대 밖으로 끌고 나가는 장면으로 수정했다.
연극 ‘달아 달아 밝은 달아’의 포스터. 세계일보 자료사진
◆“재현은 하되 좀더 세심하게”… 가이드라인 필요 지적도

작가나 문학예술 단체들은 재현에 대해 좀더 세밀한 접근이 필요하고 독자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무분별한 의혹 제기나 재현의 제한에 대해선 우려하는 분위기다. 한 작가는 세계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피해를 입었다고 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어 재현의 문제를 더 세심하게 다루고 예의도 갖춰야 할 것 같다”면서도 “다만 개인들이 SNS 등을 통해 무조건 피해를 호소할 경우 사실 여부를 떠나 해당 작가나 창작 집단은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을 수 있어 상당히 심각한 이슈”라고 우려했다.

문학평론가인 왕은철 전북대 석좌교수도 통화에서 “쓰는 자, 그리는 자, 만드는 자는 현실을 재현하지 않을 수 없고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며 “피해자들이 직접 재현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는 상황에서 작가와 창작자들은 늘 경계하고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타자를 재현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문학과 예술은 기본적으로 재현이 불가피하고 개인들 역시 인권의식이 높아가면서 어느 정도 긴장과 충돌은 불가피하기에 재현을 둘러싸고 공론의 장을 마련하고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또 다른 현역 작가는 통화에서 “문학 예술 작품이란 현실을 반영하거나 재현하지 않을 수 없는 만큼 무엇을 얼마나 재현할지, 어떻게 재현할지에 대한 사회적인 공론이나 가이드라인이 마련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 “재현의 위험 인지…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시도를”

“(재현의) 윤리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이유로 재현을 포기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러한 위험을 인지하고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재현을 시도하는 데 있습니다.”

문학평론가인 왕은철(사진) 전북대 석좌교수는 2019년 발표한 논문 ‘타자의 재현, 그 윤리’에서 백인 작가에 의한 캐나다 인디언들의 역사를 다룬 작품을 분석한 뒤 재현의 여러 위험성을 미리 인지하고서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재현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논문의 분석 대상은 원주민 인디언들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환기함으로써 백인들의 과거를 성찰하고 사죄를 촉구하기 위해 제작된 백인 작가들의 그래픽소설 ‘비밀의 길(Secret Path)’. 책은 2016년 캐나다에서 출간됐다.

분석 결과 해당 작품은 일부 내용이 지나치게 피상적으로 다뤄지거나 캐나다 식민주의와의 연계나 국가의 역할 묘사에선 다소 아쉬운 점도 있지만 그럼에도 과거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윤리적 주체로 거듭날 가능성을 줬다는 점에서 무의미한 몸짓만은 아니었다고, 왕 교수는 평가했다.

그러면서 재현의 윤리를 둘러싼 학계 내의 논쟁도 간단히 정리한다. 논문에 따르면 철학자 데리다는 “동화에 의해 타자를 전유하는 것에 따르는 위험”을 강조하며 재현의 위험성을 강조한 반면, 철학자 들뢰즈는 ‘소수자 되기’를 강조하면서 재현의 가능성을 제공했다. 결국 문학평론가 스피팍은 들뢰즈의 가능성과 데리다의 윤리를 통합해 재현의 위험성을 경계하면서도 전략적으로 재현을 실현해야 하고 이것이야말로 지식인의 책무라고 강조한다.

왕 교수는 “재현과 관련한 순결주의적 입장은 재현의 폭력 가능성에 집착한 나머지 무관심의 폭력에 대해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며 “타자에 대한 재현을 표기하면 의무와 윤리를 포기하는 것인데, 그것도 폭력이라면 폭력”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문학과 예술 역시 현실에 기반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재현이 불가피하고, 다만 재현의 과정에서 좀더 낮은 자세로, 세심하게 시도해야 한다는 얘기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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