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공간] 인왕제색도의 그 집은 누구 집인가

김규원 2021. 5. 16.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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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원의 역사속 공간]이건희 컬렉션 기증 작품 중 단연 눈길.. 조선 진경산수화의 최고 걸작
절친 이병연, 판서 이춘제, 겸재 자신, 외조부 박자진 등 집주인 논란
서울 인왕산 모습. 김규원 선임기자

“우리 옛 그림 가운데 가장 웅혼하고 장엄한 감동을 주는 작품을 한 점 들어보라면 나는 주저 없이 ‘겸재 정선(1676~1759)의 <인왕제색도>’(국보)라고 대답하겠다. (…)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대가 겸재 정선이 일흔여섯 살의 고령에 그려낸 거작이다.”(오주석,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1>, 신구문화사, 1999)

“<인왕제색도>는 정말 걸작입니다. (…) 화면을 꽉 채우고 있습니다. 동시에 인왕산의 암벽을 적묵(겹먹칠)으로 묵면(먹칠면)을 만들어서 압도합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괴량감(덩어리 느낌)을 느끼게 합니다. (…) 아래 허연 바탕과 음양도 잘 맞게 되어 있습니다.”(이용희,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연암서가, 2018)

지난 4월28일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가족들은 “이 회장이 평생 수집한 개인 소장 미술품 1만1천여 건(2만3천여 점)을 국가 박물관 등에 기증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인왕제색도> 등 국보 14건, 보물 46건이 포함됐다. 2만3천 점 넘는 미술품이 기증됐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띈 것은 <인왕제색도>였다. 겸재 정선의 최고 걸작이자 진경산수화의 최고 걸작, 한국 회화 역사상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미술사학자 최열은 “영조(재위 1724~1776) 때는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경제가 재건돼 생산력이 왜란과 호란 직후의 몇 배로 커졌다. 바로 이 조선 후기의 황금시대가 낳은 걸작이 <인왕제색도>다. 조선 건국 초기 천년 왕국의 꿈을 담은 걸작 <몽유도원도>와 비교되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그림의 성격과 관련해 그림 오른쪽 아래의 집이 누구 집인지 논란거리다. 리움미술관

겸재 정선이 75살에 그려… 생생한 묘사 돋보여

<인왕제색도>는 겸재 정선이 75살 때인 1751년 윤5월 하순에 그렸다. 겸재가 그림 오른쪽에 ‘신미 윤(5)월 하완(하순)’이라고 적어놔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인왕제색이란 ‘인왕산의 비 갠 모습’이란 뜻이다. 당시 <승정원일기>를 보면 윤5월19일부터 25일 오전까지 7일 동안 장맛비가 내렸다. 그래서 미술평론가 오주석은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를 윤5월25일 오후로 추정한다. 곳곳에 묘사된 폭포와 비구름이 장마가 끝난 직후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무엇보다 서울의 내4산 중 서산인 인왕산의 실제 모습(진경)을 충실하면서도 강렬하게 표현했다. 인왕산의 주요 봉우리인 범바위와 치마바위(정상), 작은봉우리, 기차바위(왼쪽부터)를 생생하게 그렸다. 또 주요 골짜기인 수성동과 옥류동, 청풍계, 주요 언덕인 필운대와 세심대도 모두 그렸고, 인왕산 능선의 한양성곽까지 표시했다.

이 그림에서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것은 산 정상인 치마바위에 위아래로 시커멓게 칠해진 붓질이다. 이른바 ‘부벽준’(도끼로 나무를 쪼갰을 때 나타나는 거친 줄무늬)인데, 겸재는 크고 거친 붓질로 수차례 덧칠함으로써 치마바위의 벽면을 어둡고 무겁게 표현했다. 또 전통 그림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가로세로 138.2×79.2㎝ 엄청난 크기도 보는 이를 압도한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책 <겸재의 한양 진경>(2004)에서 “인왕산의 백색 암봉(바위봉우리)을 정반대의 흑색 묵찰법(붓을 쓸어내리는 먹칠법)으로 대담하게 쓸어내렸는데, 그 인상은 백색에서 느끼던 그것과 동질이니 이 무슨 신비의 조화란 말인가”라고 감탄했다. 그러나 사실 인왕산의 흰 바위벽은 비에 젖으면 어두운 빛을 띠므로 정선이 치마바위를 시커멓게 칠한 것은 오히려 ‘실제 모습’(진경)에 가깝다.

겸재 정선의 <서원소정>. 이춘제의 정자와 집을 그렸다. 정충기 소장

묵찰법, 흑백 조화, 강렬한 표현으로 압도

산봉우리들의 어두운 빛과 산자락의 하얀 비구름이 조화를 이룬 점도 높이 평가받는다. 미술사학자 최열은 책 <옛 그림으로 본 서울>에서 “만약 이 안개를 산 사이로 깔아두지 않았더라면 이 작품은 그저 먹물만 머금은 암흑천지였을 것이다. 짙은 바위산의 무게와 맑은 안개의 가벼움을 적절히 뒤섞어 흑과 백의 조화를 절정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평가했다.

<인왕제색도>는 많은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다. 가장 오랜 논쟁은 이 그림 오른쪽 아래에 그려진 기와집 한 채가 누구 집인가다. 이 논쟁은 그림의 성격과 직결된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겸재의 평생 절친이자 당대 유명 시인인 사천 이병연의 집이라는 가설이다. 당시 겸재보다 5살 많은 이병연이 와병 중이었는데, 겸재가 친구의 회복을 빌면서 우정을 담아 그렸다는 해석이다.

이 가설의 근거는 이병연의 사망 시기가 1751년 윤5월29일로, 이 그림 제작 시기와 겹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집을 서울 종로구 궁정동 육상궁(현재의 칠궁) 부근에 살았던 이병연의 집 ‘취록헌’으로 본다. 이 가설은 최완수 연구실장과 오주석 평론가가 제시했고 많은 이가 인용했다. ‘평생 우정’이라는 감동적 이야기가 호소력이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외엔 다른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백운동천 너머 이병연의 집 위치도 그림의 집 위치와는 거리가 멀다.

2011년 고미술사 연구자인 김가희는 이 집이 정선 그림의 주요 주문자 중 하나였던 판서 이춘제의 집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이춘제가 주문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근거는 이춘제가 그전에 겸재에게 주문한 그림 <옥동척강>(옥류동 언덕 오르기), <서원소정>(서쪽 정원 작은 정자), <서원조망>(서쪽 정원 조망) 등에 나오는 이춘제의 서원 위치가 <인왕제색도>에 나오는 집의 위치와 비슷하다는 점이다. 이춘제의 서원은 서울 종로구 신교동 세심대(선희궁터 서쪽)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이춘제가 자신의 집을 겸재가 그린 <오이당도>에 대해 시를 썼는데, 이 내용이 <인왕제색도>의 풍경과 매우 비슷하다. “필운산(인왕산) 아래는 연기와 안개로 가려졌지만 은자(숨은 사람)의 가옥은 옛날과 같다.”

그러나 이 시에서 보듯 이춘제가 겸재에게 주문한 자신의 집 그림은 <인왕제색도>가 아니라 <오이당도>였다. 또 다른 10여 점의 그림과 달리 이춘제가 <인왕제색도>를 주문했다거나 소장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오히려 <인왕제색도>는 겸재의 손자 정황에게 전해졌다가 1790년께 당대 권력가인 심환지에게 넘겨졌다. 주문받은 그림이 아니었던 것이다.

겸재 정선의 <인곡정사>. 겸재의 옥류동 집을 그렸다. 리움미술관

권력가 심환지, 수집상 손재형 거쳐 이건희 일가로

미술연구자인 정민영 아트북스 대표는 “이 집의 소유자에 대해선 여러 가능성이 있다. 이병연의 집이라는 가설에 너무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집이 겸재 자신의 집이라는 의견도 있다. 미술사가 홍선표는 이 집을 겸재의 집으로 해석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그림으로 성공한 겸재가 말년에 대표작에 자신의 집을 그려넣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집은 정선이 자신의 집을 그린 그림 <인곡정사>의 집과 매우 비슷하다. 겸재는 인왕산 자락을 그린 다른 그림인 <수성구지>에도 이와 비슷한 집을 그려넣었다. 이들 그림을 그릴 때 겸재의 집은 옥류동에 있었는데, 현재의 서울 종로구 옥인동 군인아파트 자리다.

겸재의 집일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다른 근거는 1790년께 이 그림을 넘겨받은 심환지가 이 그림에 붙인 시다. 이 시에서 심환지는 “늙은 주인이 깊은 장막 아래서 하도·낙서(<주역>을 뜻함)를 즐긴다”고 썼다. 실제로 겸재는 말년에 주역을 연구해 책을 쓰기도 했다. 당대 사람인 심환지가 이 집을 겸재의 집으로 인식했다는 뜻이다.

미술사학자 최열은 “겸재가 자신의 인생을 축하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본다. 평생 남을 위해 그렸던 전업 화가가 말년에 자신을 위한 그림을 한 점 그린 것이다. 손자에게 전해진 점도 그것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겸재의 외할아버지인 박자진의 집이라는 의견도 있다. 박자진의 집은 세심대에서 조금 북쪽인 청풍계에 있었는데, 그 모습이 겸재의 그림 <풍계유택>에 잘 나타나 있다. 청풍계는 청운초등학교 북쪽 일대다. 청운초 건너편 유란동(경북고등학교 안)에서 태어난 정선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어 외할아버지에게 많이 의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집의 규모를 보면, 정선의 외가는 상당한 재력을 가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기록을 떠나 순수하게 이 그림을 그린 관점(본 자리)만으로 평가하면 다른 결과가 나온다. <한겨레21>은 4가지 가설에서 제기된 집들의 5개 위치를 찾아가 사진을 찍어봤다. 이병연이 살았던 칠궁(종로구 궁정동) 근처에선 <인왕제색도>와 조금 비슷한 모습이 잡혔다. 그러나 이춘제의 집 세심대(선희궁 부근), 겸재의 집 유란동(경복고등학교 안)과 옥류동(군인아파트 부근), 외할아버지의 집 청풍계(청운초등학교 북쪽)에선 비슷한 모습이 잡히지 않았다. <인왕제색도>와 가장 비슷한 모습이 잡힌 곳은 종친부가 있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언덕이다.

겸재 정선의 <풍계유택>. 겸재의 외할아버지 박자진의 집을 그렸다. 리움미술관

최소 수백억, 최대 1천억원대 가치

<인왕제색도>는 겸재의 집안에서 소장하다 손자이며 화가인 정황이 삼청동에 살던 권력자 심환지에게 넘겼다. 심환지 사후 충남 당진에 살았던 그의 후손은 심환지의 친필이 붙어 있는 이 그림을 제사 때 모셨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에 이 그림은 서울의 최난식, 개성의 진호섭 손을 거쳐 서예가이자 유명 수집가인 손재형에게 넘어갔다. 손재형은 이 그림과 함께 김정희의 <세한도>도 소장했던 사람이다. 이것을 1970년대에 이건희·홍라희 부부가 수집품 1호로 매입했다. <인왕제색도> 가격은 최소 수백억원에서 최대 1천억원 이상으로 추정돼 국내 회화 중 최고 수준이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정민영, ‘<인왕제색도>의 기와집 주인은 누구인가?’, 2019
윤진영, ‘조선 후기 서촌의 명소와 진경산수화의 재조명’,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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