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는 내가 알던 쿠바 아이들이 없었다 [40대 백수가 얼떨결에 간 쿠바]

이희동 2021. 5. 16.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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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백수가 얼떨결에 간 쿠바] 시엔푸에고스에서 만난 캐리비안 베이의 해적들

지난해 2월 19일부터 3월 1일까지 다녀온 쿠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행 직후 전세계적인 코로나19 확산으로 싣지 못했던 여행기를 1년을 맞아 공유하고자 합니다. <기자말>

[이희동 기자]

시엔푸에고스 역사지구
 
 시엔푸에고스 역사지구의 시청사
ⓒ 이희동
 
시엔푸에고스 중앙도로 끝에는 호세 마르티 광장이 있었고, 그 주변에는 역사지구라는 명칭에 걸맞은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안내도를 보니 모두 시청과 학교, 성당, 극장, 문화회관 등 19세기 말 당시 도시가 처음 만들어질 때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건물들이었다.

우리는 그중에서 토마스 테리 극장이라는 곳에 들어갔다. 작지 않은 규모에 화려함을 자랑하는 대극장이었는데, 베네수엘라 출신의 설탕산업과 노예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토마스 테리라는 이가 아버지를 위해 1889년 건립한 극장이라고 했다.

극장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천장의 화려한 그림과 고전적인 무대, 그리고 극장 곳곳에 걸려있는 포스터들이었다. 100여 년 동안 극장에서 열렸던 유명한 공연들의 자료였다. 실제로 이 극장에서는 초연으로 베르디 오페라가 공연되었고, 1890년에는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으며, 1920년에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성악가 카루소가 공연을 했다고도 했다.

화려한 극장을 둘러보고 있자니 다시금 쿠바의 화려한 옛 모습이 그려졌다. 비록 지금은 중남미의 가난한 공산주의 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쿠바는 19세기만 해도 수도 아바나도 아니고 이런 작은 도시에까지 화려한 극장을 세울 수 있을 만큼 풍요로운 나라였다.
 
 시엔푸에고스의 대극장
ⓒ 이희동
 
물론 미국과 유럽의 반(半)식민지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또 하나의 기회이기도 했다. 국가의 통제가 약한 덕에 오히려 설탕과 노예무역으로 부를 일군 자본들이 가장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고, 자본주의의 첨단에서 가장 화려했던 문물들이 실험삼아 펼쳐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탐욕스러운 자본들이 만들어낸 부작용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극심한 빈부격차로서 이는 호황이 끝난 뒤 쿠바의 사회경제를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대공항과 함께 외국 자본이 철수하자 민중들은 끔찍한 빈곤과 마주해야 했다. 어쩌면 쿠바에 공산주의 혁명이 발생했던 것은 맑스가 이야기했던 역사의 필연인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시엔푸에고스 역사지구를 둘러보자 아까만 해도 마냥 평화로워보였던 파스텔 톤의 거리가 묘하게 불편해졌다. 아바나에서 마주쳤던 쿠바인들의 신산한 삶들이 오버랩 되면서 오히려 역사지구가 화석화 되는 느낌이었다. 과연 이곳을 쿠바의 일상이라 부를 수 있을까?

쿠바의 아이들
 
 흔히 볼 수 있는 아이들의 모습
ⓒ 이희동
 
시엔푸에고스의 무균질 같은 역사지구를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던 나를 깨운 건 대극장 옆 삼삼오오 모여 있는 아이들의 무리였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깔깔대며 이야기하는 녀석들. 가까이서 보니 모바일 오락을 하는 듯 한 명이 핸드폰을 들고 나머지가 그 주위에 빙 둘러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핸드폰과 관련되어 너무도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풍경. 이곳 쿠바의 아이들도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동안 내가 편견에 빠져 있었을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공산주의 국가 쿠바의 아이들은 북한의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왠지 딱딱하고 비인간적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아바나에서도 나는 학교 등교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들의 웃음소리를 듣기 보다는 그들이 매고 있는 스카프에 집중했었고, 공원에서 k-pop에 맞춰 춤추는 아이들을 보면서는 그들의 생기발랄한 표정보다 쿠바에서 맹위를 떨치는 한류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었구나.

결국 그것은 이방인으로서, 관찰자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한계였다.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와 다른 체제라고는 하지만 사람 사는 것에 있어서는 크게 다를 바 없을 텐데, 나는 그 속에서 같음보다 다름을 찾느라, 그들의 일상을 놓치고 있었다.
 
 시엔푸에고스 9월5일 야구장
ⓒ 이희동
 
이런 나의 편견은 시엔푸에고스 역사지구를 나와 숙소로 가는 길에 다시 한 번 깨졌다. 가이드는 우리를 나름 도시의 명물이라는, 시엔푸에고스 엘레판떼스의 홈구장인 '시엔푸에고스 9월 5일 야구장'에 내려놓았는데, 그곳에는 내가 상상하는 어린이들이 없었다. 쿠바하면 야구고, 모든 아이들이 야구를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웬걸, 쿠바의 아이들은 그 경기장 옆의 공터에서 열심히 축구를 하고 있었다.
쿠바의 아이들은 미국 메이저리그 진출을 꿈꾸며 모두 야구를 하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 그것은 편견이었다. 어쨌든 최소한의 장비가 필요한 야구보다는 공 하나만 있으면 해결되는 축구가 아이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스포츠일 텐데, 나는 그 당연한 모습에도 놀라고 있었다. 그곳에는 내가 알던 쿠바의 아이들이 없었다.
 
 쿠바 아이들도 축구를 한다
ⓒ 이희동
 
캐리비안 베이의 노을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기 전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 바닷가에 있는 공원으로 갔다. 가이드가 꼽는 쿠바에서 노을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는데, 실제로 현지인인지, 여행객인지 구분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모히토 한 잔과 함께 일몰을 기다리고 있었다. 분주했던 아바나에서 볼 수 없는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노을 녘의 바다는 한낮에 봤던 파아란 바다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어느 바다에서 보든 똑같은 일몰이겠으나, 이곳은 말로만 듣고 상상만 했던, 그리고 이름만 빌려 쓰던 바로 그 캐리비언베이의 일몰 아니던가.

빨갛게 물드는 노을을 배경으로 지나가는 선박 한 척을 보고 있자니, 17세기 무렵 대항해 시대가 떠올랐다. 당시 해적의 소굴이었던 이곳 캐리비안 베이에서 해적들도 지금 나와 같은 풍경을 보면서 고향을 떠올렸겠지.
 
 캐리비안 베이의 노을
ⓒ 이희동
 
비록 지금은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지만, 17세기 대항해 시대만 해도 이곳 캐리비안 베이는 해적의 소굴로 유명했다.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라틴 아메리카를 오고가던 스페인, 영국 등 각국의 선박을 대상으로 약탈을 하던 해적들이 쿠바와 바하마 군도, 자메이카 등지에서 살면서 자신들의 공화국을 만들었다.

우리야 해적 하면 바다의 무법자를 떠올리기 쉽지만, 당시 해적들은 그들의 세계관 안에서는 외부 세계와 달리 오히려 민주적이었다. 선장을 선출하거나 약탈한 재화를 나누는 방법 등이 나름 체계적이고 평등했으며, 때로는 노예상선을 탈취하여 흑인 노예들을 선원으로 기용하기까지 했다. 시대를 앞서서 노예해방을 직접 행한 것이다.

비록 당시 사회에서는 인간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하층민들이었지만, 자신들이 만든 세계에서는 떳떳한 구성원 중 한 명이 되어 주체적인 삶을 살았던 해적들. 아직도 대항해 시대 해적과 관련된 수많은 작품들이 등장하는 건 어쩌면 그런 해적들의 삶을 동경했던 역사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본디 시대의 변화는 항상 사회의 주변에서 시작되며, 사람들은 그 경계 속의 삶을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부러워하는 법이다.

해가 지자 곧 어둠이 찾아왔고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럼주와 함께 시작되는 또 다른 여정. 그늘 밤에는 특히 일행 중 부산 출신 누님에게 살사춤도 함께 배웠다. 그래도 쿠바에 오면 정열의 살사는 한 번 춰봐야 하지 않겠냐며 모두들 단체로 술이 취한 채 열심히 스텝을 밟았다. 과연 앞으로 이 스텝을 써먹을 때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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