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 교육이 '조직적 세뇌'라고?..근거없는 의혹에 위축되는 교사들[플랫]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2021. 5. 17.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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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조직적으로 학생들을 세뇌하려 하고 있는 사건에 대해 수사, 처벌, 신상공개를 청원합니다.”

지난 5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등록된 청원의 제목입니다. 청원인은 글에서 페미니스트 교사들이 ‘지하조직’을 통해 ‘세뇌 매뉴얼’을 만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폐쇄적인 웹사이트를 만들어 ‘비밀 교육 자료’를 공유하며 학생들을 세뇌하고, 이 과정에서 고의로 일부 학생을 따돌리기까지 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청원인은 제로보드로 만든 웹사이트의 아카이브 페이지(특정 시점의 웹사이트 화면을 갈무리해 작성자나 게시자 등이 글이나 사이트를 수정·삭제하더라도 나중에 볼 수 있도록 한 페이지)가 사건의 ‘명백한 증거’라고 덧붙였습니다.

이미지컷

청원 내용은 남초 커뮤니티 등에서 ‘페미게이트’라 불리며 공분을 샀고, 청원 등록 하루 만에 청와대 답변 요건인 20만명 동의 기준을 넘었습니다. 이에 교육부는 지난 12일 해당 의혹과 관련해 경찰에 수사 협조를 요청했다고 밝혔습니다.

페미니즘 교육을 둘러싼 공방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선 초등학교의 교육 자료가 ‘(페미니즘) 지하단체의 세뇌 자료’라며 손가락질당하기도 합니다. 검증되지 않은 의혹 속에 페미니즘 교육 자체가 찬성·반대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상황입니다. 여성계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성평등 교육을 하는 일선 교사들조차 위축되지 않도록 철저한 사실 검증과 교사에 대한 보호·지원이 필요하다고 얘기합니다.



실체 없는 ‘페미게이트’




우선 페미니즘 세뇌 교육의 배후로 꼽힌 단체는 바로 ‘영미문학페미니즘학회’입니다. 논란이 된 아카이브 페이지에 이 단체의 로고가 있다는 것인데요. 이 때문에 한때 영미문학페미니즘학회 홈페이지는 접속이 몰리며 먹통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국영미문학페미니즘학회 홈페이지 캡처



학회는 황당하다는 입장입니다. 학회 관계자는 지난 12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저희는 학술단체라 교수님들은 (최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잘 모른다. 메갈리아 단어 자체를 모르는 분들도 많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영미문학페미니즘학회가 배후로 지목되고 홈페이지가 마비된 것에 대해서는 “그저 황당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학회 관계자는 “누가 로고를 무단으로 가져다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하단체와 우리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했습니다.

영미문학페미니즘학회는 1992년 설립돼 약 30년간 페미니즘 문학과 관련해 학문 교류를 해오고 있는 유서깊은 단체입니다. 홈페이지에 올라온 투고 논문만 해도 507건에 달하는데 ‘딕테에 나타난 여성적 상상력과 혼란의 정치성’ ‘오드리 로드의 시에 나타난 교차성과 퀴어 담론’처럼 모두 영미문학 관련 논문입니다. 초등교육과는 거리가 먼 학술단체로 보입니다.

페미게이트의 명백한 증거로 꼽힌 웹사이트는 실체를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청원인은 해당 웹사이트에 첫 게시물이 올라온 날짜가 ‘2017년 12월29일’이라는 점을 들어 해당 단체가 수년 이상 지속적인 활동을 벌여 왔으며, 작성자 아이디 가운데 실제로 있는 초등학교 이름이 포함됐다는 점 등을 들어 ‘페미니스트 지하단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익명을 요청한 한 웹 개발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웹페이지 자체를 조작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지적했습니다. 해당 페이지는 ‘제로보드’라는 웹 게시판 시스템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프로그램은 개발자가 날짜와 게시자 모두를 임의로 바꿀 수 있다는 겁니다. 다른 웹 개발 전문가 역시 “저 정도 페이지는 일반인 기준 하루면 뚝딱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어 “제로보드는 2009년에 개발이 중단됐을 정도로 잘 쓰지 않는 프로그램인데 굳이 제로보드로 웹 페이지를 만든 게 이상하다”고도 했습니다.

논란이 된 ‘페미게이트’ 아카이브 페이지. 페미게이트의 명백한 증거로 꼽힌 웹사이트, ‘제로보드’로 만들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페이지 캡쳐



조작 논란도 있습니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엔 ‘페미게이트 실제 자료’라며 한 문서가 돌아다녔는데요. 자신을 초등학교 교사라고 밝힌 한 트위터리안은 이 자료가 자신이 만들어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교육과정 자료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페미게이트 사이트 주소도 모르고, 들어가본 적도 없는데 내 자료가 불법 촬영돼 ‘페미게이트 자료’가 됐다”며 “유포자를 날조와 저작권법 위반으로 고소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페미게이트 실제 자료’의 원 작성자라고 밝힌 트위터리안의 트윗. 트위터 캡처





페미니즘 공격에 위축되는 교사들




‘페미게이트’ 의혹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온라인상에선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반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신상털이 게시물을 올리는가 하면 과거 페미니스트 선언을 했던 교사들의 얼굴을 박제해 악플을 달기도 합니다.

백래시는 페미니즘 교육 전반에 대한 공격으로 번지는 모양새입니다. 초등학생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치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 트위터 이용자(@cfr**)는 “초등학교에서 페미니즘 교육을 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며 “초등학교 레벨에서 필요한 건 ‘사상’이 아니라 ‘주위 사람을 존중해라, 예의를 갖춰라, 조롱하지 마라’와 같은 간단한 것들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썼습니다. 이에 다른 트위터 이용자(heyj*****) “지금 말씀하시는 그게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의 페미니즘 교육”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초등학생에게 페미니즘 교육을 하는 게 정말 위험한 사상을 주입하는 것일까요? ‘페미게이트 실제 자료’라고 불리며 많은 비난을 받은 문서를 보면 성평등 교육에 가깝습니다. 교육 계획서엔 ‘책을 통해 여자다움/남자다움의 이분법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감정 표현하기’ ‘바보온달과 평강공주를 재구성해 결혼을 강요한 아버지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등의 내용이 담겼습니다. ‘생리 전 증후군, 생리통에 관한 교육’같은 성교육 교과도 있었습니다. “교사가 학생을 따돌리고 위험한 사상을 주입한다”는 국민청원과 남초 커뮤니티의 주장과는 거리가 먼 겁니다.

문제는 근거 없는 비난 때문에 성평등 교육에 힘쓰는 교사들이 점점 위축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강원도의 한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는 이우혁 교사는 “제가 페미니즘 교육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국민신문고에 민원이 올라와서 교육청 장학사가 찾아온 적도 있다”며 “저 같은 경우는 이미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교육과정 편성권 등이 교사의 고유 권한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등 대처 방안을 알고 있었지만, 대응 방법 자체를 모르는 선생님들은 굉장히 두려울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학교에 터무니없는 민원이 들어오거나 누가 찾아오게 되면 특히 여성 선생님들은 신상에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도 했습니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는 최현희 교사는 4년 전 언론 인터뷰에서 초등학교 페미니즘 교육 필요성을 언급했다가 누리꾼들의 비난 세례를 받고 보수단체들로부터 검찰에 고발까지 당한 적이 있습니다. 이후 최 교사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는데요. 하지만 그는 긴 시간 동안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최 교사는 “일선 교사가 부당하게 공격받는 상황이 왔을 때 그 어떤 보호도 받을 수 없다. 학부모의 민원, 관리자의 보수적인 태도, 교사의 무관심이라는 삼중고를 겪어야 한다”고 털어놨습니다.



위협받는 교사에 대한 보호와 지원이 절실하다




2018년 2월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전교조와 전국여성민우회 및 페미니즘 단체 회원들이 ‘초중고교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있다. 이준헌 기자



무엇 때문에 페미니즘 교육에 대한 비난이 계속되는 것일까요? 윤김지영 창원대 철학과 교수는 불확실한 출처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여과 없이 받아들여 확산하는 언론, 정치인들이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윤김 교수는 “2015년 이후 페미니즘이 대중화·공고화되면서 그에 못지않게 페미니즘에 대한 저항도 강력해졌다”고 말했습니다. 윤김 교수는 “이제는 사실 여부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페미니즘이라는 말 자체가 일부 남성을 결속하게 만드는 단어가 됐다”면서 “허위 사실을 검증하지 않는 언론과 정치적 포퓰리즘으로 이용하는 정치인들 때문에 문제가 더욱 커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언론, 정치권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대변해준다는 ‘효능감’이 생기면서 더욱 근거 없는 백래시가 만연하게 되는 구조라는 것입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정부 역할이 수동적인 진상 조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에 대해선 잘못됐다고 말하는 등 적극적으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했습니다.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대표는 “정부가 명확한 입장을 갖고 성평등 원칙을 확인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냥 민원 창구가 되어버렸다”고 지적했습니다. 김수자 충청남도청소년성문화센터장은 “정부가 성평등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가치를 계속 강조하고 얘기해야 한다”면서 “다만 이를 위한 접근은 섬세하고 촘촘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지난해 8월 ‘동성애 미화’, ‘성관계 노골적 묘사’라는 국회의원 지적이 나오자 여성가족부가 즉시 성인지 감수성 향상 교육용 도서 7종을 전량 회수한 사례를 보면 아직 갈 길은 멀어보입니다. 당시 여성가족부는 인권과 다양성, 성평등과 존중의 가치를 부정하는 발언을 한 국회의원과 일부 혐오세력의 주장에 대해 제대로 된 반박도 하지 않은 채, ‘문화적 수용성’이란 이유를 붙여 정책 철회를 밝혔습니다.

교사에 대한 보호·지원도 필요합니다. 위협이 있는 상황에서 교사가 소신 있는 교육을 지속해나가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최현희 교사는 성평등 교육을 하면서 부당한 위험에 처했을 때 교육청 등 상급기관에서 철저히 보호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걸 바라지 않아요. 내가 보호받는다는 믿음만 있으면 좋겠어요. 그런 확신이 있다면 아무리 극우 사이트·종교단체·학부모 등으로부터 악의적 민원이 들어와도, 정말 고통스럽긴 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견딜 수 있지 않을까요.”(최 교사)


이홍근 기자 redroot@khan.kr
강은 기자 eeun@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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