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 대포 못 쏩니다" 군복 벗고 '무궁화 주유소' 차린 장군
황영시 참모차장 "전차 동원" 지시에
"시민에게 발포하란 말이냐" 정면 거부
신군부들 승승장구하던 1981년 예편
5·18 수사 때 황 차장 만나
"지금이라도 진실대로 말하십시오"
“생전 ‘어떻게 국민을 향해 대포를 쏘겠느냐?’고 하셨어요.”
5·18 때 군의 전차 동원 지시를 거부한 고 이구호(1933~1999) 장군의 장남 이상우(62)씨는 지난 10일 “전의 이씨 집성촌인 쌍촌동이 있는 광주를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신 분”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서울 출생인 그가 1979년 7월 광주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예하 육군기갑학교장(준장)으로 부임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80년 5월21일 계엄군의 집단발포 이후 시민들이 무장하기 시작했던 날, 이 교장은 신군부 핵심의 전차 동원 지시를 거부했다.
이 교장은 96년 1월6일 검찰에 참고인으로 나가 5·18 당시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80년 5월21일 오후 4시께 황영시 육군참모차장의 전화를 받았다. 황 차장은 대뜸 ‘나 참모차장인데 폭도들을 진압하고 도청을 점령하는 데 전차를 동원해야겠다. 1개 대대(32대)를 동원하시오’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 교장은 이 ‘지시’를 거부했다. 그는 ‘만약 (전차)동원을 요청하려면 정식 지휘계통을 통해 명령해달라’고 되받았다. 계엄부사령관인 황 차장은 ‘이 자식, 전차포를 쏘면서 밀고 들어가면 되는 것 아니야’라고 소리쳤다. 이 교장은 화가 나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두 사람의 충돌은 중앙정보부 ‘첩보’로 올라갔다. 중앙정보부 전남지부장 정석환씨는 그해 5월22일 긴급 전언통신보고문을 통해 ‘황영시 중장이 유혈사태가 나는 한이 있더라도 강력히 진압할 것을 지시해 왔다. (그런데) 기갑학교 교장은 광주시민이 적군이 아닌데 어떻게 시민을 향해 발포하란 말이냐고 지시를 정면 거부했다’고 보고했다. 이 교장은 검찰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 세력들이 법이나 절차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좌지우지했던 때였다. 군부의 정식 지휘계통 절차를 무시하고 지시해도 제가 순응해 전차를 동원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육군기갑학교는 5·18 때 육군보병학교 및 포병학교와 함께 외곽경비를 담당했다. 전교사에선 전차 1개 중대, 탱크 10대를 35사단에 배속했다. 전교사 작전일지엔 5월27일 광주 진압작전 때 ‘전차 18대와 장갑차 5대가 기갑학교 정문을 통과했고, 통합병원 앞에 집결’했다고 돼 있다. 이상우씨는 “1개 대대(전차 32대)를 다른 사단에 배속한 뒤 외곽경비 임무만 수행했다. 아버지는 5·18 때 무력을 행사한 사실이 없다”고 말했다.
신군부 광주진압 관련자들은 승승장구했다. 국방부에서 5·18민주화운동 진압에 참여해 전두환씨한테 훈포장을 받은 사람은 정호용·황영시 등 52명이다. 이상우씨는 “그들(신군부)이 시킨 대로 탱크 몇 대라도 보냈으면, 훈장 받았겠지요?”라고 말했다. 황영시는 육군참모총장과 감사원장을 지냈지만, 이 교장은 81년 5월 군복을 벗었다. 이후 홍성직업훈련원 원장, 대전직업훈련원장 등을 잠시 맡았다가 동생과 함께 주유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상우씨는 “애국자셨다. 무궁화를 좋아하셔서 ‘무궁화 주유소’라는 간판을 달았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12·12 및 5·18 수사 때 만났다. 황영시는 검찰의 대질신문 때 ‘전차 동원 지시’와 관련해 “기억나지 않는다. 이 같은 내용을 녹음해 두었다든지 비망록에라도 기재해 두었다면 인정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기억할 수 있겠느냐?”고 피해 갔다.
그러다가 황영시는 옆에 앉아 있던 이 교장을 보며 “하여간 내가 그런 일이 있었다면 미안하오”라고 했다. 이 말을 듣던 이 교장은 “지금이라도 진실을 진실대로 말씀하십시오”라고 촉구했다.
이상우씨는 지난달, 5·18 당시 시민협상대표였던 김범태씨 등과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했다. 그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군 시절 사진들을 모두 태워버릴 정도로 가족들의 충격이 컸다. 명예회복 문제를 포기하고 살다가 5·18 때 진압명령을 거부한 안병하 전남경찰국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이재의 5·18기념재단 연구위원은 “시민군이 집단발포에 맞서 무장했던 날 이 장군이 전차 동원 지시를 거부한 것에 새로운 역사적 조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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