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덕에 한평생 편히 살았던 '전직 일본군' 김종원

김형민 2021. 5. 22.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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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앞에서는 도둑고양이, 부하나 민간인에게는 식인 호랑이였던 전직 일본군 김종원. 이승만 덕에 한평생 편히 살다 세상을 떠난 그는 지금도 '우리 고장을 빛낸 인물'로 칭송받고 있다.
2006년 10월21일 전남 순천의 여순사건 위령탑 앞에서 한 유족이 사건 기록을 읽고 있다. ⓒ연합뉴스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하면서 일제는 자기네 국민을 총알받이로 내몬 것은 물론 조선과 타이완 등 식민지 백성들에게도 희생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1938년 조선에 실시한 ‘지원병 제도’는 그중 하나였지. 이 제도가 실시되면서 강제로 ‘지원당한’ 경우도 많았지만 출세하려는 마음으로, 일본인으로 살아보겠다는 꿍꿍이셈으로 ‘지원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오늘의 주인공 김종원(1922~1964)도 있었어.

포털사이트에서 김종원을 검색하다가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했단다. 2021년 5월5일 현재 경상북도 도청 홈페이지에 ‘경북을 빛낸 인물’로 그가 소개돼 있지 뭐냐. “1938년 일본군 지원병으로 입대 (···)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다시 소집되어 남양으로 파견.” 그는 태평양전쟁 때 파푸아뉴기니까지 나갔다가 살아 돌아왔는데 무슨 전투를 치렀는지 자세히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사람고기도 먹어봤다”라는 소리를 무용담으로 즐겨 떠벌리고 다녔다고 하지(〈한국일보〉 2020년 12월7일, ‘토벌대의 두 얼굴:차일혁과 김종원’).

해방 이후 신생 대한민국에서 군인으로 새 출발을 한 김종원은 미군으로부터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어. 경북도청 홈페이지 정보에 따르면 시비가 붙은 미군에게 혼찌검을 내주고 얻은 별명이란다. 엉뚱하게도 김종원은 백두산에서 2000리는 떨어진 경상북도 경산 출신인데도 스스로를 ‘백두산 호랑이’라 일컬었다.

1948년 10월 여순 사건에 진압군으로 투입된 김종원은 앞뒤 가리지 않고 박격포를 쏘아대는 바람에 아군에게까지 피해를 입혀 미군 군사고문들을 기겁하게 만들었어. 반란 진압 후에는 더욱 ‘일본군스러운’ 면모를 과시한다. 일본도를 들고 다니며 ‘빨갱이’ 포로들의 목을 쳐나간 거야. 이를 본 미군 군사고문 대로우 대위는 이렇게 분노했다고 해. “비인간적인 만행은 수도 없었지만 구구절절 언급하기도 싫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김종원은 3사단 23연대장으로 경북 일대에서 빨치산 토벌 작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경북 영덕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어. 1950년 3월14일 빨치산 내통 혐의자 3명에 대한 총살을 집행하는데 유치장에 갇혀 있던 좌익 혐의자 33명을 끌어내 이를 보게 했단다. 겁을 주려는 심산이었겠지. 그런데 그 가운데 철없는 한 명이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짖었다. 이에 격분한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은 “직접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시신의 내장이 튀면서 현장은 난장판이 됐고, 그걸 지켜본 사람은 며칠 동안 식사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경남도민일보〉 2015년 6월7일, ‘광복 70년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

“그의 힘으로 시내 도로가 포장되었고…”

좌우익의 사생결단 행보 속에 목숨들은 새털처럼 가볍게 흩날렸다. 김종원은 그 광풍 속에서 칼춤을 춘 망나니였지만 칼춤이 잔인할수록 애국자 대접을 받던 시절이었지. 예의 경북도청 ‘경북을 빛낸 인물’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어. “그의 용명과 과감하고 직선적인 성격이 부산 임시수도에 있는 이 대통령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 뒤 김종원은 영전에 영전을 거듭한다.

이 전직 일본군은 진짜 일본군과는 딴판인 점이 하나 있었어. 일본군 장교는 졸병에게 잔혹하고 민간인에게 악마같이 굴었지만 적군에게도 광기 어린 용감성을 보였는데 김종원은 그러지 못했던 거야. 미국 군사고문들은 가끔 귀신처럼 전장에서 사라지는 연대장 김종원을 찾아 헤매거나, 무턱대고 도망가려는 그를 제지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어. 적 앞에서는 도둑고양이 같고 부하나 민간인들에게는 식인 호랑이. 그의 활약은 갈수록 목불인견이었다.

1951년 거창 양민학살 사건이 폭로되고 발칵 뒤집힌 국회는 조사단을 파견했다. 당시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이었던 김종원 대령은 국군 1개 소대로 하여금 공비를 가장한 뒤 조사단에 위협 총격을 가한다. 즉 국군을 인민군으로 위장시켜 국회의원들을 공격했던 거야. 이 일이 폭로됐을 때 김종원은 군법회의에 회부돼 징역 3년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이승만이 직접 나서서 사면을 지시했어. 이때 이승만이 이종찬에게 했다는 얘기는 그가 제정신이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야. “김종원이 우국충정이 대단한 사람으로 이순신 장군에 비교할 만하다(〈프레시안〉 2013년 11월14일,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사면 이후 군복을 벗은 김종원은 경찰 제복을 입고 활개 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56년 내무부 치안국장이라는 어마어마한 보직을 차지하게 되지. 그 비결은 다름 아닌 “이 박사의 명령이면 죽기라도 할 수 있는 충성(경북도청 홈페이지)”이었지. 이 단순 무식 과격한 일본식 백두산 식인 호랑이가 치안국장으로 장안을 호령할 무렵, 장면 부통령이 총을 맞는다.

경찰은 민주당 계파 갈등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라고 우겼지만 내막은 전혀 달랐어. 고령의 이승만이 갑자기 사망한다면 그 뒤를 이을 사람은 야당의 장면 부통령이었기에 당시 여당 인사들에게 장면은 제거 대상 1호였고, 기어이 이를 실행에 옮겼던 거야. 치안국장 김종원은 이 암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된다. 1957년 3월6일, 재판을 받던 도중 그는 또 한 번 기막힌 행동을 벌인다. 판사에게 이렇게 호통을 친 거야. “재판 공정히 하시오! 나를 근거도 없이 배후로 몰고 있어! 맘대로 해! 당신은 일개 판사지만 나는 헌병 사령관이었어.” 판사가 법정모욕이라며 퇴정을 명령했지만 그마저 무시한 채 김종원은 재판정을 뒤집어놓았지.

민간인 살해, 국회의원들의 공무집행 방해, 적전(敵前) 도주, 살인교사, 법정 모독 등 비전문가가 주워섬겨도 10개는 넘을 듯한 범죄를 저지른 김종원은 4·19 혁명 이후에야 겨우 그 악행에 대해 가벼운 처벌을 받는다. 장면 암살 음모 재판에서 하수인들은 중형을 선고받았지만 ‘몸통’ 김종원은 겨우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그마저도 병보석으로 풀려났고 편히 살다가 1964년 세상을 떠난다. 마흔둘. 하늘도 이 자를 더 이상 살려두고 싶지 않았던 거라고 생각하고 싶을 뿐이다.

어떻게 이런 범죄자가 그토록 승승장구할 수 있었는지 의아할 것 같구나. 아빠는 역시 오늘날에도 ‘경북을 빛낸 사람’으로 이 호랑이를 꼽고 있는 경북도청 홈페이지에서 그 이유 한 조각을 발견할 수 있었어. “민주정치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나 그의 외골수의 충성심으로 생각된다. (…) 비록 온당한 절차가 아니었지만 향토를 그 나름으로 돌보았다. 그의 힘으로 경산 시내 도로가 포장이 되었고, 대형 소방차가 배치되기도 하였다. (…) 공도 있고 허물도 있고 세평이 한결같지야 않으려만, 경산이 낳은 범상치 않던 인물이었다.” 인간의 존엄함을 기본으로 한 민주주의보다도 ‘충성’을 더 높은 가치에 두었던 사회, 온당한 절차가 아니라 해도 ‘우리 고장’에 이로움을 가져온 이를 칭송하고, 과오가 많아도 비범하게 ‘출세한 사람’이 최고인 사회, 그런 나라가 대한민국이었다는 뜻이야. 결국 그는 ‘비범한’ 대한민국이 낳았던 ‘비범한’ 괴물이었다.

김형민 (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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