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년 걸리는 '부채꼴 퇴적지형' 설악산서 하룻밤 새 만들어져

조홍섭 2021. 5. 24.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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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피플]
2006년 한계령 집중호우로 선상지 형성
세계적으로 드문 사례, 학술가치 주목
2006년 하룻밤 새 형성된 설악산 선상지 모습. 건천골과 한계천이 만나는 지점에 최고 지름 2∼3m의 바위와 자갈이 쌓여 있다. 퇴적물이 쌓이기 힘든 고산지대에서 이렇게 짧은 시간에 새로운 지형이 생기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손영관 경상대 교수 제공.

2006년 설악산을 강타한 집중호우로 설악산국립공원은 탐방로 16㎞가 유실되는 등 유례없는 큰 피해를 봤다. 이 폭우는 철제 다리와 계단, 난간을 쓸어가고 계곡에 집채만 한 바위를 남겼지만 지질·지형학계에는 ‘하룻밤 새 형성된 선상지’라는 세계적으로 보기 힘든 선물을 안겼다.

집중호우 피해가 집중된 한계령 건천골 계곡이 한계천과 만나는 곳에 크게는 지름 2∼3m에 이르는 큰 바위로 이뤄진 언덕이 7월 16일 생겼다. 전날부터 한계령에는 시간당 최고 113.5㎜의 비가 퍼부었다. 하루 강수량은 355㎜였지만 6시간 동안 내린 266㎜의 비는 200년에 한 번 오는 폭우였다.

주민들은 “호우가 온 날 한밤중에 우르릉하는 바위 구르는 소리와 함께 이런 지형이 생겼다”고 밝혔다. 선상지는 가파른 한계령 유역에서 폭우로 휩쓸려 내려온 큰 돌과 바위가 평평한 한계천과 만나면서 쌓여 길이 170m, 폭 330m 크기의 유선형 언덕을 이루었다.

2006년 7월 설악산을 강타한 집중호우로 설악산국립공원은 탐방로가 끊기는 등 큰 피해를 봤다. 수해 전(왼쪽)과 후의 설악산 주전골 탐방로 모습. 국립공원관리공단 제공.

손영관 경상대 지질과학과 교수 등은 과학저널 ‘퇴적 기록’ 최근호에 실린 논문에서 “선상지가 형성되기 힘든 조건인 설악산에서 폭우로 하천이 범람하면서 하룻밤 새 선상지가 만들어졌다”고 밝혔다. 연구자들은 설악산을 세계자연유산에 올리기 위한 사전준비로 문화재청의 연구용역을 받아 외설악 일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 선상지를 발견했다.

선상지는 좁은 산지에서 넓은 평지로 하천이 흘러나오는 곳에 형성되는 부채꼴 퇴적 지형으로 강릉 금광평 선상지, 제천 선상지, 경주 안강 선상지, 사천 선상지 등 국내에 10여 곳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단층운동으로 지형에 기복이 생긴 곳에서 수천∼수만 년 동안 형성됐다.

손 교수는 “장구한 지질학적 시간 속에서 꾸준히 지속하는 ‘동일 과정’에 의해 지표 지형이 만들어진다는 것이 지질학의 상식인데 설악산 선상지는 지표의 지질작용과 지형변화가 극단적으로 빠르게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실제로 국내 선상지의 형성과정에 대한 연구를 보면 이광률 경북대 교수 등은 대구 달성군 유가 선상지가 11만년 전부터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밝혔고 박지훈 공주대 교수팀도 충남 부여의 금성산 선상지가 5900년 전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선상지가 생기기 전까지 건천골과 한계천 합류부는 숲으로 덮여있었다(A). 2006년 홍수로 형성된 선상지는 큰 바위와 돌로만 이뤄졌고 잔 자갈이 없었지만 이후 점차 퇴적층으로 덮이고 있다. 김지수 외 (2021) ‘퇴적 기록’ 제공.

애초 설악산은 선상지가 생기기 힘든 곳이다. 능선과 계곡이 1000m 이상의 고도차가 날 정도로 가파르고 집중호우가 잦아 토양침식이 심하다. 토양층이 빈약하니 퇴적 지형인 선상지를 이룰 퇴적물도 부족하다. 2006년 이전에 설악산에 선상지가 보고된 적도 없다.

연구자들은 2006년 집중호우가 일종의 방아쇠 구실을 했던 것으로 설명했다. 손 교수는 “설악산 선상지의 유역이 2006년 무렵 지형적 임계점에 도달했다”며 “매우 작은 외부 충격에 의해서도 마치 방아쇠를 살짝 당겨 총알이 격발되는 것처럼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2006년 설악산에 많은 비가 오긴 했지만 1990년 2003년 2011년에도 그와 비슷하거나 더 많은 강우량을 기록했다. 손 교수는 “2006년에 ‘격발’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후에 새로운 선상지가 더는 만들어질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결과는 설악산의 독특한 생태가치를 높여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신청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연구에 참여한 이광춘 상지대 명예교수는 “세계적 지형 전문가가 건천골 선상지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 인근 장수대 선상지를 보고 중국의 황산 등에서도 볼 수 없는 지형이라며 놀랐다”고 소개했다. 손 교수는 “설악산은 몬순 기후의 영향을 받는 바닷가 산악지역으로 미국의 요세미티 국립공원 등 다른 나라 화강암 지형과 구별되는 차별성을 지닌다”고 말했다.

정부는 국제자연보전연맹의 권고에 따라 금강산과 함께 설악산을 세계자연유산으로 신청하기 위해 지질·지형 등 그동안 규명되지 않은 학술가치를 발굴하고 있다.

인용 논문: TSR The Sedimentary Record, DOI: 10.2110/sedred.2021.2.2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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