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마지막 독재자', 여객기 강제 착륙시켜 야권인사 체포

윤기은 기자 2021. 5. 24.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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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3일(현지시간) 벨라루스 당국에 의해 체포된 반정부 텔레그램 매체 ‘넥스타’ 전 편집장 라만 프라타세비치. CNN 화면 캡쳐


벨라루스 정부가 야권 인사를 체포하기 위해 다른 나라로 향하던 민간 항공기를 전투기까지 동원해 자국 공항에 강제 착륙시켰다. 대선 결과 조작 의혹에 퇴진 요구를 받고 있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권력 유지를 위해 민간인을 위협하는 ‘선 넘는 행동’을 했다는 국제사회의 비판이 쏟아졌다.

러시아 노바야가제타, 타스통신 등은 벨라루스 정부가 23일(현지시간) 그리스 아테네에서 리투아니아 빌뉴스로 향하던 아일랜드 항공사 라이언에어 여객기 FR4978편을 벨라루스 민스크 공항에 착륙시키고, 비행기에 타고 있던 야권 인사 라만 프라타세비치(26)를 체포했다고 보도했다.

라이언에어에 따르면 벨라루스 관제센터는 벨라루스 영공을 지나던 여객기 측에 “비행기에 폭발물이 있으니 착륙하라”고 지시했다. 벨라루스 국영 벨타통신은 루카셴코 대통령이 폭발물 관련 소식을 접하고 직접 해당 여객기를 비상 착륙시키라고 지시했으며, 미그-29 전투기 출격을 허가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착륙 후 벌인 점검에서 폭발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 기내에는 승객 171명이 있었다.

라이언에어의 마이클 오리어리 대표는 24일 뉴스토크 라디오 인터뷰에서 “벨라루스 비밀경찰 요원들이 항공기에 타고 있다가 같이 내린 것으로 보인다”며 “국가가 지원한 항공기 납치”라고 말했다.

유럽연합(EU) 대외관계청(EEAS)은 24일 EU주재 알렉산드르 미흐네비치 벨라루스 대사를 초치하고 프라타세비치를 즉시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여객기는 이날 저녁 민스크 공항을 이륙해 예상보다 7시간 늦은 시간에 원래 목적지인 빌뉴스에 도착했다.

옛 소련 국영농장 책임자 출신의 루카셴코 대통령은 ‘유럽 최후의 독재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헌법을 수차례 바꿔 1994년부터 현재까지 재임하고 있다. 취임 이후 정부를 비판하는 매체들을 모조리 폐간시켰으며, 2011년 반정부 시위대가 항의의 의미로 단체로 박수를 치자 ‘박수 금지법’을 만들었다. 벨라루스 시민들은 그의 인권·언론 탄압 행보에 더욱 분노했다. 지난해 대선에서 80.2%의 득표율로 루카셴코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해 개표 조작 의혹이 제기됐다. 시민들은 대선 직후부터 7개월이 넘도록 불복 시위를 지속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루카센코 정권은 지난 3월 반체제 인사 100여명을 체포하는 등 야권 인사를 잇따라 잡아들이고 있다.

대선 개표 결과 조작 의혹을 보도한 프라타세비치 역시 루카센코 정권의 눈엣가시였다. 그는 지난해 구독자 180만명을 보유한 인기 정부 비판 텔레그램 매체 ‘넥스타’를 운영하며 반정부 시위를 조직했다. 벨라루스 검찰은 2019년부터 폴란드에서 망명 생활을 하는 그를 공공질서 위반, 선동 등의 혐의로 지난해 11월 기소했다. 같은달 벨라루스 국가안보위원회는 프라타세비치를 테러리스트로 지정했다.

루카셴코 대통령의 대선 경쟁 후보였던 야권 지도자 스베틀라나 티하놉스카야는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프라타세비치를 체포하기 위해 (벨라루스) 보안기관이 여객기를 납치하는 작전을 편 것이 명백하다”고 말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성명을 내고 “충격적 행위”라며 “이번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최대한 빨리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회의를 개최하는 방안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옌스 스톨텐베르크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사무총장도 이번 비행기 착륙건과 관련해 조사가 필요하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프라타세비치가 거주하는 폴란드의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총리는 “여객기를 건드린 행위는 처벌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테러리즘”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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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사진)이 지난달 16일(현지시간)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미하일 미슈스틴 러시아 총리와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민스크|로이터연합뉴스

윤기은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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