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분 사회, 헌법 정신에 길을 묻다>사회 구조적 문제로 뒤틀린 분노 표출場 돼버린 젠더 갈등

박세희 기자 2021. 5. 2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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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⑥ 성 평등과 기본권 보장

- ‘페미’ 커지자 ‘백래시’도 확산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 혐오 범죄 심각성 부각돼

SNS 통해 결집… 2030 거리로

성폭력 고발 ‘미투’ 도 쏟아져

男 혐오도 주장… 젠더 갈등 격화

광고에 쓰인 손모양 갖고도 시비

“불공정한 구조 때문에 힘든데

청년들 분노의 방향 잘못된 것”

“내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임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린 지난 17일 저녁 서울지하철 강남역 10번 출구.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 꼭 5년이 된 그날, 여성들은 그곳에 다시 모였다. 28세의 대학생 문진주 씨는 “5년 전 오늘의 사건으로 여성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을 수도 있음을, 남성들과 동일한 안전을 누릴 수 없음을 알게 됐다”며 “밤늦은 시간 외진 길을 홀로 걸을 때 무섭고 자취방에 뭐가 설치돼 있는 건 아닐까 두려워하던 내가 유별난 게 아니었음을 그때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겠다는데 뭐가 문제냐”며 “우리 제발 인간답게 살자”고 외쳤다. 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함을, 성별에 의해 차별받지 않을 것을,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졌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지만 문 씨처럼 2021년 현재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여성들은 여전히 길거리에 나가 항변한다. 왜 헌법 정신이 지켜지지 않느냐고.

◇‘페미니즘 대중화’ 변곡점 된 강남역 살인사건 = 지난 2016년 5월 17일 오전 1시쯤 하모(당시 23세) 씨는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전혀 일면식도 없던 30대 남성 김성민의 흉기에 찔려 살해됐다. 당시 김성민은 하 씨가 화장실에 들어오기 전까지 숨어 있던 30분 동안 6명의 남성을 그냥 보냈다. 그는 살해 이유에 대해 “여성들이 나를 무시해서”라고 진술했다. ‘묻지마 범죄’가 아닌 ‘여성 혐오 범죄’임이 분명했다. 이후 헌법상 ‘안전할 수 있는 권리’가 성에 따른 차별 없이 평등하게 보장되고 있느냐는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이 사건은 한국의 여성운동과 젠더 갈등의 변곡점이 됐다.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었고 남혐(남성혐오)·여혐(여성혐오)으로 일컬어지는 젠더 갈등이 격해지기 시작했다. 여성들은 자신이 ‘여성 혐오’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음을, 더욱이 그 피해가 죽음에 이를 만큼 심각한 것일 수 있음을 자각했다. 반면 일부 남성은 “모든 남성을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하지 말라”며 반기를 들었다.

왜 2016년에야 ‘불’이 붙었을까. 사실 한국의 여성운동은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민주 대 반(反)민주’ 구도하에서 ‘독재 정권 타도’라는 구호에 움츠리고 있던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1991년 9세 때 자신을 강간한 이웃 아저씨를 살해한 김모 씨 사건, 1992년 13년간 자신을 성폭행한 의붓아버지를 남자친구와 함께 살해한 대학생 김모 씨 사건 등으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사회적 의제로 떠올랐고, 1994년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됐다. 1999년엔 군가산점이 폐지됐고 2001년 여성부 설립, 2004년 성매매특별법 시행으로 이어졌다. 2008년에는 호주제가 폐지됐다. 이와 함께 성 평등 교육 등으로 여성의 성차별에 대한 감수성과 권리 의식이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현실의 변화는 너무 더뎠다. 여성의 성장을 가로막는 ‘유리 천장’이 견고했을 뿐 아니라,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권 중 가장 기본이랄 수 있는 ‘안전할 수 있는 권리’조차 위협받는 퇴행적 사건들이 이어졌다. 스마트폰과 SNS 보편화로 대표되는 ‘초연결 환경’은 활동가가 아닌 여성도 온라인을 중심으로 뭉치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2018년 홍익대 남성 누드모델 몰카 사건으로 촉발된 혜화역 시위에는 총 36만 명(주최 측 추산)이 참여했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단일 의제로 여성들이 모인 최대 기록이다. 이후 자신이 당한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으로 여성들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엄존하는 성차별 = 지난 2월 통계청이 발표한 ‘2019년 임금근로일자리 소득(보수) 결과’ 자료에 따르면, 남성 임금근로자의 평균소득은 360만 원으로 여성(236만 원)의 약 1.53배다. 이전 해보다 남성은 14만 원, 여성은 11만 원 오르면서 남녀 평균 소득격차는 2만 원 더 벌어진 124만 원이 됐다. 미국 캔자스대 사회학과 김창환 교수와 오병돈 연구원은 ‘경력단절 이전 여성은 차별받지 않는가?’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20대 여성은 남성과 학교와 학과, 학점 등 ‘스펙’이 모두 같아도 남성의 82.6%밖에 벌지 못한다고 밝혔다.

성차별을 겪었다는 응답률도 여성과 남성 간 차이가 크다. 지난 3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만19~34세 청년 657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 청년층 남성의 51.7%가 우리 사회가 ‘남성에게 불평등하다고 생각한다’고 답한 반면 ‘여성에게 불평등하다고 생각한다’고 답한 여성은 74.6%에 달했다. 중·고교 재학 시절 성적으로 불쾌한 말이나 문자 메시지, 신체 접촉 등을 당했다는 응답은 여성 27.0%, 남성 11.5%로 여성이 남성의 두 배를 넘었다.

◇‘백래시’의 시대 … 성차별 해소에 역행 =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backlash·반발성 공격)’로 대표되는 최근의 여성 혐오 현상은 성 평등을 더욱 요원하게 보이게 한다. 성 평등을 위해 남성과 여성이 힘을 합치기는커녕 여혐과 남혐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양상이다.

특히 ‘이대남(20대 남성)’을 비롯한 젊은 남성들의 목소리가 높은데, 이들은 “차별받는 것은 오히려 남성”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편의점 GS25가 내놓은 캠핑 행사상품 광고에 남혐 손가락이 그려져 있다는 논란이 일었다. 한국 남성의 성기 크기가 작다고 조롱하는 뜻의 손동작과 비슷하다는 주장이었다. 이 포스터를 디자인한 디자이너 A 씨는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 올린 글에서 자신을 “아들이 있고 남편이 있는 워킹맘”이라 소개하며 “남성 혐오와는 거리가 아주 멀고, 그 어떤 사상을 지지하지도 않는다”고 해명했지만, GS25 불매운동이 벌어지는 등 논란은 이어졌다. 일부 남성은 또 ‘허버허버(급하게 음식을 먹는 남성의 모습)’ ‘오조오억(남성의 정자 개수를 의미)’ 등 남혐 용어를 사용한 방송사나 기업에 항의하고 있다. 이른바 ‘남초 사이트’에는 “썸 타던 친구가 페미니스트인 것 같아 바로 썸을 그만뒀다” “여자친구가 페미니즘 시위에 다녀왔다고 해서 바로 헤어졌다” 식의 ‘안티페미(Anti-feminism) 인증글’도 넘쳐난다.

정치권의 움직임도 젠더 갈등 격화로 이어지고 있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지난 4월 재·보궐선거 당시 서울시장 선거 출구조사 결과 20대 남성의 72.5%가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를 지지한 것으로 나오자 “더불어민주당이 여성에게만 ‘올인’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전 최고위원이 ‘이대남 대변인’을 자처하면서 여성계에선 “안티페미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반발이 나온다. 최근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한 박용진 민주당 의원의 ‘남녀평등복무제’를 둘러싸고도 젠더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징병제 대신 모병제를 도입하고, 남녀 모두 40~100일간 기초군사훈련을 실시하자는 제안과 함께 ‘여성도 징병 대상에 포함시켜 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제기됐다.

◇“서로를 향한 분노, 분노의 방향을 잘못 잡은 것” =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적대시하는 현상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매우 우려하면서 그 원인이 그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분석한다. 현재 젊은이들은 양질의 일자리 부족으로 경쟁이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취업 문도 굳게 닫혀 있으며, 부동산 가격 급등으로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커졌다. 윤미영 서울여성회 사무처장은 최근 젊은 남성들의 여성 혐오에 대해 “지금 청년들이 살기 힘든 것은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문제, 그리고 기득권층이 만들어 놓은 불공정한 구조 때문인데 분노의 방향이 여성으로 잘못 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젠더 갈등이 격화하면서 성 평등을 향한 노력은 물론이고 청년 일자리 문제 등 젠더 갈등의 근본이라 꼽히는 사안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청년이 살기 힘든 세상이니 서로에게 더욱 예민해져 있는 것인데, 이렇게 남녀가 갈등하면 가장 손해를 보는 것은 청년층”이라며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분열돼서 싸우지 말고 진짜 청년의 삶을 개선할 건설적인 논의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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