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의 5·18을 기억하고 차별·혐오에 맞서는 K팝 팬들

인현우 2021. 5. 2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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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남미·유럽에서 '온라인 자경단' 활동
부정적 이미지에서 활동력 긍정 이미지로
광주 민주화운동의 내력을 설명하는 BTS 팬 계정. 트위터 캡처

"오늘은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일입니다. 한국의 역사적인 친민주주의 운동입니다. 슈가는 '518-062'라는 곡을 썼고, 제이홉은 '마 시티(Ma City)'의 자기 절에서 '062-518'을 노래한 적이 있죠."

18일 방탄소년단(BTS)의 해외 팬 계정 다수가 광주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메시지를 올렸다. 방탄소년단의 2015년 곡 '마 시티'는 각 멤버의 고향을 소개하는 곡인데, 멤버 가운데 제이홉은 '062-518'을 노래했다. 062는 광주의 지역번호, 5·18은 그대로 광주 민주화운동을 의미한다.

호기심 많은 BTS의 팬덤 '아미'들에게 이 부분이 광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이홉도 이날 BTS가 팬과 소통하는 플랫폼 '위버스'에서 한 팬이 남긴 '062-518' 메시지에 기도하는 이모지(emoji)를 사용해 덧글을 남겨 큰 반응을 불렀다. 그는 지난해 9월 KBS '뉴스9'에 출연해 "잊어서는 안 될 역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음악으로 풀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18일 빅히트 소속 아티스트 등이 팬들과 대화하는 커뮤니티 플랫폼 '위버스'에 올라온 한 BTS 팬의 글에 제이홉이 남긴 메시지. 이는 다시 SNS를 통해 널리 퍼졌다. 트위터 캡처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K팝 팬들의 '온라인 자경단' 활동

"봉쇄(잠금)를 풀자? 내 휴대폰 잠금은 이미 풀려서 백현(엑소 멤버)의 '러브샷' 사진이 배경으로 깔려 있는데." K팝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 사진을 올려 자신이 반대하는 해시태그를 장악한다. 트위터 캡처

K팝 스타를 비롯한 한국의 연예인이 정치적 입장을 밝히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해외의 K팝 팬들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정치 의제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토론하고, 주로 극우주의나 혐오 발언 등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데 능숙하다.

이들의 유명한 수법은 극우 진영의 해시태그를 쓰면서 그 자리에 K팝 아이돌의 사진과 영상을 잔뜩 올려 해당 해시태그를 장악하는 것이다. 지난달부터 시작된 콜롬비아 반정부 총파업 시위를 지지하는 활동이 대표적인 예다.

콜롬비아 보수 정부의 정신적 지주인 알바로 우리베 전 대통령이 경찰의 시위대 강경 진압을 옹호하는 트윗을 올리자, 우리베 지지자들은 SNS에서 '봉쇄 반대' '경찰 지지' 같은 해시태그를 써서 이를 지지했다.

그러자 K팝 팬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 사진을 해당 해시태그와 함께 올리면서 이를 덮어버렸다. 해시태그를 '하이재킹(hijacking)'한 셈이다.

2019년에서 2020년 사이 K팝 팬들의 이런 활동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①미국의 흑인 생명권 운동 '블랙 라이브즈 매터(BLM)' 시위를 지지하면서 극우 진영의 대항 해시태그인 '화이트 라이브즈 매터(whitelivesmatter)'를 K팝 스타의 이미지와 영상으로 장악해 버렸다. 한편으론 "시위의 폭력성을 증명하는 영상을 보내달라"는 댈러스 경찰의 애플리케이션에 K팝 영상을 잔뜩 올렸다.

②성소수자 행진에 대응하는 '헤테로 프라이드' 행진을 펼치자는 해시태그(#OrgulloHetero)가 올라오자 K팝 영상으로 이를 덮어버렸다.

③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의 2020년 6월 대중 연설에 허수 예약을 잔뜩 넣어 트럼프가 빈 자리 앞에서 연설하게 했다.

④2019년 10월부터 시작된 칠레 반정부 시위에도 K팝 팬들이 온라인에서 대거 지원 활동을 벌였다. 이들의 영향력 때문에 칠레 정부가 같은 해 12월 발간한 보고서에서는 K팝 팬들을 '외부 개입 세력' 중 하나로 지목하고 있었다.

MIT에서 출판하는 잡지 '테크놀로지 리뷰'는 이런 행동을 '온라인 자경단'이라고 표현하며 "온라인 운동이 활발한 시기에 K팝 팬들의 활동이 환영을 받고 있다"고 했다.


'악성 팬'에서 활동성의 상징이 된 'K팝 스탠'

2010~2020년까지 트위터 내 K팝 대화량을 측청한 세계지도. 트위터 제공

이전까지 K팝 팬에 대한 서구 주류 대중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들이 자신의 스타를 홍보하는 전략이 SNS를 어지럽히고, 스타의 일거수 일투족에 과몰입해 반응한다는 점 등을 들며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서구에선 흔히 K팝 팬을 'K팝 스탠'으로 지칭하는데, 원래 스탠은 미국 유명 래퍼 에미넴의 곡 제목에서 유래한, 스타들의 어린 열성팬을 향해 비하하는 뜻을 담아 묘사하는 표현이었다.

실제 찰리 푸스와 카디 비 등은 K팝 팬 일부와 마찰을 빚으면서 팬덤 문화의 위험함과 유독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또 K팝의 많은 요소가 힙합 등 흑인 문화를 기원으로 하고 있음에도 팬덤 내에서는 '흑인성'에 대한 부정적 경향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최근 K팝 팬들의 규모가 늘고 다양성이 강화되면서 팬덤 문화에 대한 이미지도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스탠'은 이들의 활동력을 포괄하는 표현이 됐고, 팬들 스스로도 이 표현을 적극 차용하고 있다.

K팝의 '흑인성 기원' 논쟁 역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K팝 팬들이 BLM을 지원하고, BTS와 씨엘을 비롯한 여러 아티스트들도 BLM을 지지하면서 흑인 음악의 영향을 인정하고 팬들에게도 지원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했다. 더구나 올해 들어서는 '아시아인 혐오' 문제가 부각되면서 K팝 아티스트와 팬도 더더욱 인종차별 및 폭력 반대 활동에 나서게 됐다.

물론 모든 K팝 팬들이 정치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이들의 성향과 활동 목적은 특정한 정파를 지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K팝을 매개로 수평적으로 소통하고, 표현의 자유를 긍정하며, 억압과 증오에 대항하는 것에 가깝다.

역시 K팝 팬들이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태국의 방콕포스트는 칼럼을 통해 "K팝 팬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논의하며, 하향식 권력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고, 발전한 민주 국가인 한국을 동경하고 있다"며 "이들은 누군가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결정권과 정치적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원하고 있다"고 평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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