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권' 인정한 유럽.. "전자제품 안고쳐주면 불법"

이태동 기자 2021. 6. 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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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유럽 '수리권 법제화' 바람
게티이미지뱅크

고장 난 가전제품이나 스마트폰, 노트북PC 등을 고쳐 쓸 수 없어 버려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출시한 지 2~3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부품이 없거나, 공식 서비스센터의 수리비가 지나치게 비싸기 때문이다. 사설(私設) 수리센터에서 중고·호환 부품으로 수리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하면 제조사의 품질 보증이나 사후 관리가 거부되기 일쑤다. 한국에선 종종 겪는 이런 일이 유럽에선 이제 ‘불법’이다. 지난 3월부터 세탁기와 냉장고, TV를 10년 이상 쓸 수 있도록 ‘수리해 쓸 권리(right to repair·수리할 권리)’를 보장하는 법이 시행됐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수리할 권리’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소비자가 제 돈 내고 산 제품의 수리를 막거나 까다롭게 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제품의 안전한 사용이나 제조사의 지식재산권 보호 등을 이유로 ‘공식 수리 센터’ 이용을 사실상 강요하지만, 정작 수리를 맡겨도 지나치게 비싼 수리비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신제품을 사게 되는 경우도 흔하다. 오픈리페어얼라이언스(Open Repair Alliance) 등 수리할 권리를 요구하는 단체들은 “수리할 수 있어야만 제품을 진정으로 소유(own)한 것”이라며 “수리를 못 하도록 하는 것은 개별 소비자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신제품 더 팔려 수리 막는다”

EU의 수리할 권리 보장법은 크게 2가지 조처를 했다. 우선 부품의 단종(斷種)을 막았다. 제조사들은 앞으로 10년간 부품이 단종되지 않도록 관리할 의무를 진다. 지금까지는 부품 재고 비용 때문에 출시 후 3~5년이 지나면 부품 확보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장 난 제품을 못 고치게 해 신제품을 더 사도록 하려는 의도도 있다. 또 10년간 수리 매뉴얼(설명서)도 의무적으로 제공케 했다. 부품이 있어도 분해·조립법을 몰라 수리를 못 하는 일을 막겠다는 것이다. EU는 올해 안으로 스마트폰과 노트북, 태블릿 등 IT 전자 제품에까지 이 법을 확대 적용할 계획이다.

당장 애플과 삼성전자 같은 대형 업체들이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애플의 제품 사후 관리는 악명이 높다. 자사 제품을 수리하는 데 필요한 부품과 설명서를 공급하지 않은 것은 물론, 아예 수리가 아닌 대체품 교체만 허용하곤 한다. 2017년에는 배터리 용량이 줄어든 제품의 성능을 일부러 떨어뜨린다는 논란을 일으켰고, 최근엔 사설 업체에서 수리한 제품에 ‘경고’ 문구가 뜨게 해 비판을 받았다. 삼성전자는 프랑스에서 일부 가전제품에 수명이 2~4년 정도에 불과한 부품을 사용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른바 ‘계획된 노후화(planned obsolescence)’라는 얘기도 나온다. 이탈리아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2018년 “신제품을 사게 하려 고의로 제품 성능을 저하시켰다”며 애플과 삼성전자에 각각 1000만유로(약 135억원)와 500만유로(약 68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일부 소비자 단체들은 같은 법이 테슬라에도 확대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테슬라의 전기차 역시 공식 수리 센터에서만 수리가 가능하며, 수리용 순정 부품을 따로 구매할 수 없다. 사설 수리를 하면 패널티(불이익)를 주기도 한다. 미국 전기차 전문매체 일렉트렉은 “사설 수리된 테슬라 차량은 초고속 충전 기능이 중단되고, 유료로 업데이트된 기능(소프트웨어)이 제거되거나, 보증이 무효화되기도 한다”고 전했다.

◇'탄소 중립' 힘입어 법제화 성공

수리할 권리의 보장은 친환경적이기도 하다. 유럽환경국(EEB)은 “유럽 내에서 스마트폰 등 전자 제품 수명을 1년만 연장하면 약 400만톤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며 “이는 일반 자동차 200만대의 운행을 중지시킨 것과 같은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내왔다. 고장 난 제품을 버리는 대신, 고쳐서 더 쓰게 만들면 기후변화 예방에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유럽의 경우 2019년 기준 스마트폰 평균 수명은 3년, 노트북은 4.5년, 진공청소기는 6.5년이다.

수리할 권리의 법제화는 미국으로 확대 중이다. 이미 미국 27주에서 관련 법안이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애플과 테슬라 등 테크 기업들의 로비로 이 중 절반 이상이 무산될 위기다. 하지만 대세는 점점 기울어가는 분위기다. 미국 연방 무역위원회는 최근 “신종 코로나 사태 이후 (제품 공급 부족으로) 소비자가 받는 수리 제한의 영향이 더 악화하고 있다”고 미 의회에 보고했다. 소비자 단체의 압박도 커지고 있다. 미국과 유럽·영국·독일 등 4국 수리할 권리 추진 단체들은 매년 10월 세 번째 토요일을 ‘국제 수리의 날(International Repair Day)’로 기념한다. 올해도 10월 16일에 전 세계 50여 도시에서 수리할 권리를 요구하는 집회와 행사를 열 계획이다.

아직 한국은 수리할 권리에 대한 논의가 약한 상태다. 지난해에야 스마트폰과 노트북의 공식 품질 보증 기간이 2년으로 늘고, 태블릿PC는 처음으로 부품 보유 기간(4년)이 생겼다. 한국소비자원 김도년 책임연구원은 “국내 주요 제조사들은 공식 품질 보증 기간 연장 논의 때도 반대했었다”면서 “수리할 권리에 대한 관심이 커질수록 이들의 입장은 난감해질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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