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한국일보

반복되는 철거현장 사고.."하도급 관행·형식적 규제가 부른 참사"

이승엽 입력 2021. 06. 11. 13:00

기사 도구 모음

음성 기사 옵션 조절 레이어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9일 오후 4시 22분쯤 광주 동구 학동4구역 재개발 현장에서 철거 중이던 5층 건물이 도로 쪽으로 무너지며 시내버스를 덮치고 있다. 이 사고로 시내버스 승객 9명이 숨지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광주=뉴스1

지난 9일 광주 재개발 공사현장 5층 건물이 통째로 붕괴한 사고를 두고 건축 안전 전문가들과 철거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터질 게 터졌다"는 말이 나온다. 불과 2년 전 서울 잠원동 철거 현장 참사를 비롯해 수년째 비슷한 사고가 반복되고 있지만 건설 현장의 '안전 불감증'은 여전하다는 게 한결같은 지적이다.

지난 9일 광주 동구 학동 재개발 현장에서 철거 공사를 하던 5층짜리 상가 건물이 통째로 무너지면서 건물 앞 정류장에 정차해 있던 시내버스 1대가 잔해 아래에 깔렸다. 함몰된 버스에 갇힌 17명 중 9명이 숨지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재하도급 관행에 무리한 공사...'예고된 인재(人災)'

노형욱 국토교통부 장관이 10일 광주 동구 학동 철거 건축물 사고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국토교통부 제공

전문가들은 이번 참사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공사 비용 절감을 위한 재하도급 관행을 꼽는다. 철거는 인테리어 등과 달리 전문기술이 없어도 일부 중장비만으로 작업이 가능하다. 현행법상 철거업체 등록도 초급 이상 건설기술인이나 관련 종목 기술자격취득자 2명과 자본금 1억5,000만 원 이상만 있다면 누구나 가능하다. 이러니 공사를 수주하기 위해 수많은 영세업체가 경쟁하는 구조다. 적은 인원으로 무리한 작업을 하다 보니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충북·세종 일대에서 철거전문업체를 운영하는 A씨는 "5층 건물을 철거할 경우 콘크리트 절단기로 각 층 바닥에 큰 구멍을 뚫고 구멍으로 1층까지 철거한 자재를 내려 보내는 방식으로 무게중심을 유지한다"며 "광주 사고의 경우 공정률이 90%였다고 하니 막판 공기를 맞추기 위해 급하게 작업을 하다 사고가 난 것 같다"고 말했다.

도급 단계를 거칠수록 공사비용이 내려가 영세업체로서는 전문 인력을 충분히 고용할 만한 여력이 없는 경우도 태반이다. 광주 사고 당시 현장 근로자는 내부 2명, 외부 2명으로 모두 합쳐 4명에 불과했다. 건설노조 관계자는 "3층 이상의 철거 작업 시에는 하중 때문에 가벼운 장비를 올려야 하는데, 기한을 맞추려고 중장비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위험성이 크다"며 "여유 인력을 두고 신호수 등을 운영해야 하는데, 사람이 없으니 적은 인력으로 안전관리부터 작업까지 모두 해야 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형식상' 작성하는 해체계획서..."투명하게 공개해야"

10일 오후 광주 동구 학동 재개발지역 건물 붕괴 현장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관계자들이 합동감식을 진행하고 있다. 광주=뉴스1

반복되는 사고에 정부는 규제를 강화했지만, 현실성 없는 제도에 참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지난달부터 일정 규모를 넘어선 건축물 철거를 위해서는 관할 지자체의 허가를 의무화하는 건축관리법 개정안이 시행됐다. 일정 규모(연면적 500㎡ 이상·높이 12m 이상·지상, 지하 포함 3개 층 초과)의 해체 공사 때는 지자체가 감리를 직접 지정할 수 있지만, 모든 철거 현장에 감리가 상주해야 하는 의무 규정은 없다. 대한건축사협회 관계자는 "철거는 대부분 공사 기간이 촉박한 데다 공정 자체가 착공에 비해 위험하다"며 "철거 때는 감리가 상주해 안전 문제를 실시간으로 지적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홍성걸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는 "시공의 역순인 철거는 건물 구조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전문가가 꼼꼼하게 계획을 세운 뒤 진행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며 "안전기술사 등 구조전문가의 철거 작업 참여가 의무화돼야 한다"고 밝혔다. 원정훈 충북대 안전공학과 교수도 “철거업체들은 건설 분야 중에서도 유독 영세한 편”이라며 “산업안전법과 건설기술진흥법에 따라 안전관리계획서를 제출하더라도 현장에서 이를 이행할 경제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아 원청의 의무를 강화하는 방향의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불투명한 해체공사계획서의 형식적인 승인 과정도 문제로 지적된다. 사업주는 전문가에게 검토받은 해체공사계획서를 관할 관청에 제출해야 하는데, '어떻게' 안전 조치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기술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 소수의 담당자가 수천 곳의 현장을 직접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김근영 강남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안전지지대 몇 개를 어떻게 설치하겠다든지, 근처 버스정류장 등 다중이용시설을 임시 이전하겠다든지 등 구체적인 내용 없이 '안전 조치를 취하겠다'는 식으로만 철거 계획을 보고하는 사례가 많다"며 "해체계획서와 안전조치계획서 등을 투명하게 공개해 검증받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

ⓒ한국일보 www.hankookilbo.com (무단복제 및 전재,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포토&TV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