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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줌인]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다 '연개소문'

최경식 입력 2021. 06. 12. 00:15 수정 2021. 06. 19.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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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변의 역사>  
중화 패권주의에 대항한 마지막 불꽃
대막리지 연개소문 정변 전말 및 의미  
662년(보장태왕 21년), 제2차 고당 전쟁 당시 고구려의 실권자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평양성 부근 사수(蛇水)에서 방효태가 이끄는 당나라 10만 군대를 전멸시켰다.
[파이낸셜뉴스] "선악현부(善惡賢否)는 별 문제로 하고 당시 동방아시아 전쟁사에서 유일한 중심 인물이었으며, 조선 역사 4000년 이래 최고의 영웅이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中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사학자였던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은 오래 전에 살았던 한 '고구려인'(高句麗人)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근대역사학의 중요한 저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였다. 이전까지 김부식의 '삼국사기' 및 신라 역사서 등에서 나타난 사대주의 사관과 객관성이 결여된 중국의 역사서 등에서 평가절하됐던 한 인물이 고매한 역사가의 손에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고구려 말기의 실권자, 대막리지(大莫離支)였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이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한 유서 깊은 가문에서 출생했고, 정통 고구려인의 기개를 갖춘 인물이었다. 비록 호전적인 성격 탓에 주변 사람들이 어려워했고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부분도 있지만, 대륙에 있는 제국들에 대항해 고구려가 나아가야 할 방향, 즉 '자주적(自主的) 기조'를 명확히 각인시킨 인물이었다.

결과적으로 연개소문의 고구려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감히 (광의적 의미에서의) '중화 패권주의'(中華 覇權主義)에 대등하게 맞섰던, 아니 어쩌면 능가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세력이었다. 이후 이에 버금가는 세력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좀처럼 등장하지 않았고(일각에서는 발해를 거론하지만, 이 역시 고구려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게 중론이다.), 오히려 친중 사대주의(事大主義) 고착화라는 퇴행의 역사마저 나타나게 된다.

자주적인 한민족의 마지막 불꽃, '혼'(魂)으로 평가 받는 연개소문. 고구려는 대륙의 하수인이 아닌 '천자(天子)의 제국'이라고 선포하며 단행했던 연개소문 정변 및 의미 등을 되돌아봤다.

■고구려의 기개, 수나라 멸망
5세기 중반 이후의 국제 정세를 보면, 중국의 남북조, 북방의 유연, 동방의 고구려가 세력 균형을 형성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는 이전에 비해 안정적인 상황을 유지했다. 이 같은 국제 정세 하에서 고구려는 대륙의 여러 세력과 다각도로 외교 관계를 맺으며 장기간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6세기 말 수(隋)나라가 대륙의 통일제국으로 등장하면서 깨지기 시작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로의 개편을 추구했던 수나라는 북방의 돌궐(突厥)을 복속시키고 고구려를 위협했다. 즉각 고구려 왕이 직접 입조(入朝)해 머리를 조아릴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598년 영양태왕(고구려 제26대 왕)은 수나라 요서지역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이에 격분한 수나라 문제(文帝) 양견은 같은 해에 약 30만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다. 문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수나라 양제(煬帝) 양광은 612년에 무려 113만 대군을 동원해 침공했다.

문제와 양제에 걸친 이 같은 수나라의 침공은 총 4차례 이뤄졌다. 하지만 수나라는 요충지였던 고구려의 요동성(遼東城)을 돌파하지 못했다. 요동성이 막히자 양제는 우문술, 우중문 등으로 하여금 별동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남하해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이 병력은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에 의해 살수(薩水)에서 거의 전멸 당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살수대첩'이다. 사관은 "30만에 달했던 수나라 병력 중 요동으로 살아 돌아간 사람은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후에도 수나라 양제는 계속해서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요동성과 신성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내부의 반란도 발생해 자중지란(自中之亂)마저 겪게 된다. 결국, 수나라는 고구려 복속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더 나아가 오랜 기간 고구려와의 무리한 전쟁으로 수나라는 국력이 소진돼 극심한 정치적 혼란에 빠져들었다. 급기야 618년 양제는 우문술의 아들인 우문화급에게 살해당했고, 이듬해 수나라는 멸망했다.

■외교 노선 변화와 거듭된 굴욕
수나라의 멸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결과적으로 영양태왕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의 대중 강경노선이었다. 이는 동북아 강자로서의 고구려 위상을 확고히 해줬다. 이런 와중에 영양태왕이 세상을 떠났다. 영양태왕의 죽음은 곧 고구려 외교 노선의 급변을 야기했다.

618년, 영양태왕의 뒤를 이어 이복동생인 영류태왕(고구려 제27대 왕)이 즉위했다. 그는 수나라와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가를 회복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설정했다. 이와 더불어 수나라에 뒤이어 등장한 강대한 당(唐)나라와 평화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자 노력했다. 더 이상 대륙에 대항하는 것은 무리수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고구려를 향한 당나라의 오만한 태도였다. 당시 당나라의 황제는 그 유명한 '당 태종 이세민'이었다. 622년, 당나라는 우선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때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중국인들의 대거 송환을 요구했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침공했던 적국의 포로를 당연히 잡아두고 있는 것이었지만, 당나라의 일방적 요구에 1만 여명에 달하는 포로들을 아무 조건 없이 풀어줬다.

이후에도 오만함이 묻어나는 당나라의 요구가 계속됐는데, 그 중에 가장 굴욕적인 일이 631년에 발생했다. 당시 고구려에는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때 죽은 병사들의 해골을 파묻고, 수군(隋軍) 격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경관(승전탑)이 있었다. 그런데 이세민은 광주사마 장손사를 보내 이를 철거하라고 요구했다. 이 사안을 놓고 고구려 조정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오고 갔다. 결국, 최종 결정권자였던 영류태왕은 이번에도 온건 노선을 견지하며 당나라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줬다.

■내부 노선 갈등 심화
경관 사건 등을 계기로 고구려 내부는 대당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극심하게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한 군부 소장파들은 저자세 외교를 비판하며 다시금 영양태왕 때의 강경 노선을 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속 밀리면 당나라가 더 심한 요구를 해올 것이 분명했고, 유화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해도 결국 당나라의 침공을 피할 순 없을 것이라고 봤다. 반면, 장년·원로 대신들은 군부 소장파들의 주장을 현실을 도외시한 치기 어린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며 영류태왕의 온건 노선이 지속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후대의 역사가들은 고구려가 어떠한 노선을 취했든지 간에 당나라의 침공은 예정돼 있었다는 견해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수나라까지 물리쳤던 고구려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이세민에게 작지 않은 걸림돌로 여겨졌다. 아울러 연개소문도 집권 초기 전략적 차원에서 당나라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도교'(道敎) 진흥 정책을 잠시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당 태종 이세민과 장손무기, 등소 등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고구려에 대한 침공 계획을 구체적으로 논의, 추진했다. 더욱이 644년 정월에 당나라는 이세민의 조서를 통해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군사 행동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고구려를 정벌하겠다는 노골적인 경고를 가하기도 했다. 고구려 침공을 위한 구실을 어떻게든지 찾고 있었던 셈이다.

■연개소문 정변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한 군부 소장파들의 노선 변화 요구가 거세지면서 장년·원로 대신들의 위기감은 높아져 갔다. 특히, 그 수장이었던 연개소문은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연개소문은 자신의 아버지 연태조가 막리지였고, 예로부터 가문 자체가 힘이 있었다. 앞서 장년·원로 대신들은 연개소문을 견제하며 그가 아버지의 관직을 승계하는 것을 반대하기도 했었다. 결국, 이들은 영류태왕을 설득해 연개소문 제거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 첫 단계로 당나라의 침공에 대비해 축조하고 있던 천리장성(千里長城)에 대한 감독 업무를 연개소문이 맡도록 했다. 천리장성은 수도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고구려의 서쪽 국경에 있었다. 연개소문을 중앙정치 무대가 아닌 변방으로 보낸 후 서서히 힘을 약화시키려는 복안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연개소문에게 은밀히 보고됐고, 그는 당하기 전에 먼저 거사(擧事)를 일으키기로 마음 먹었다. 642년, 연개소문은 자신이 관장하는 부(部)에 소속된 사병들을 중심으로 평양성 남쪽에서 열병식을 거행하기로 했는데, 이 자리에 장년·원로 대신들을 초청한 후 모조리 척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실제 열병식에는 100여 명에 달하는 대신들이 참석했다. 그리고 열병식이 화려하게 진행되던 중 연개소문은 사병들에게 미리 약속한 신호를 보냈고,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대신들이 대거 죽임을 당했다.

열병식 거사가 성공하자 연개소문은 곧바로 대궐로 쳐들어갔다. 그는 대궐을 장악한 후 영류태왕을 죽이고 왕의 시신을 토막 내 구덩이에 던져 버렸다. 살수대첩 당시 대동강 주변에서 수나라 해군을 격퇴해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았던 고건무, 영류태왕은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거사가 최종적으로 성공한 후 연개소문은 영류태왕의 조카였던 장(臧)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는데, 이 왕이 바로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태왕이다. 그리고 연개소문 자신은 병권(兵權)과 인사권을 총괄하는 대막리지에 올랐다.

■한민족의 마지막 불꽃
연개소문이 집권한 후 당나라를 향한 고구려의 외교 노선은 이전과 달리 비타협적이고 도전적으로 변했다. 아니 어쩌면 고구려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신라에 대해서도 강경한 태도를 취했고, 백제와 연합해 신라의 40여 개 성(城)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 같은 모습에 격분한 이세민은 645년 드디어 고구려를 침공했다. 그런데 이세민이 누구였던가. 그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도 보여지듯 역사상 보기 드문 '명군'(名君)으로 칭송받았던 군주다. 김부식은 "당 태종 이세민은 매우 총명하여 세상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임금이었다. 난을 평정함은 탕왕과 무왕에 비할 수 있고, 다스림을 이룬 것은 성왕과 강왕에 가까웠다. 때에 이르러서는 기묘한 계책을 내는 것이 무궁하여 향하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다"고 전했다. 지금까지도 이세민은 청나라 강희제, 한무제와 더불어 중국의 3대 명군으로 불리고 있고, 그의 치세(治世)를 기록한 '정관정요'(貞觀政要)는 정치인들의 필독서로 읽혀지고 있다.

이러한 이세민을 상대로 한다는 것은 이전에 수나라를 상대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실제로 제1차 고당 전쟁 초반에 이세민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수나라가 돌파하지 못했던 요동성 등을 함락시키며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 자칫 평양성이 적들의 사정거리에 그대로 노출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연개소문과 양만춘 등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군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강력한 당나라 군에 맞서 분전(奮戰)했고, 끝내 안시성(安市城) 전투에서 당나라 군의 전의를 꺾는데 성공했다. 이후 겨울 추위도 겹쳐 당나라 군은 퇴각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연개소문의 고구려 군이 빠르게 추격해 진흙이 많은 요택(遼澤)에서 이세민의 눈에 화살을 명중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중국 측이 기록한 정사(正史)에는 이 같은 내용이 나와있지 않지만, 적지 않은 야사(野史)와 구전에는 이 같은 내용이 기정사실처럼 담겨있다. 심지어 고려시대 목은(牧隱) 이색의 시에도 "이(고구려)는 주머니 속의 물건이라더니, (이세민) 눈이 흰 깃(화살)에 떨어질 줄 누가 알았으랴"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세민의 사망 원인이 이 때 입은 눈 부상 때문이라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다. 더 나아가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의 추격대가 천리장성을 넘어 중국 북경(北京) 북쪽의 상곡지방까지 공격했다고 전하고 있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 여부에 있어 역사가들마다 의견이 엇갈리는 부분도 있지만, 중국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명군 이세민이 연개소문의 고구려 군에게 대패했고 비참하게 퇴각 길에 올라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扶支)했다는 것은 역사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일치한다. 이전까지 그 수많은 전쟁에서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던 이세민이었다. 이세민은 1차 고당 전쟁 4년 후인 649년에 숨졌는데, 유언으로 "다시는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로부터 한동안 평화가 유지된 후 661년 제2차 고당전쟁이 발발했다. 이때까지 연개소문은 생존해있었고, 평양성 부근 사수(蛇水) 전투에 직접 출전해 방효태가 이끄는 당나라 10만 군대를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리며 2차 고당 전쟁도 승리로 이끌었다. 연개소문의 고구려 군은 그 당시 세계 최강으로 불렸던 당나라 군을 연이어 격파했던 것이다. 고당 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연개소문의 권력과 명성은 더욱 공고해졌고, 당나라는 연개소문이 살아있는 한 감히 고구려를 넘볼 수 없었다.

하지만, 연개소문도 당해내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세월의 무게였다. 666년, 연개소문은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고 세 아들인 남생, 남건, 남산을 불러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너희들이 화합하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당나라가 여전히 우리의 허점을 노리고 있다. 내가 죽더라도 너희들이 힘을 모아 나라를 이끌면 당나라가 넘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서로 싸운다면 고구려의 운명을 알 수 없다." 연개소문은 죽을 때까지 사이가 좋지 않은 아들들의 권력 다툼과 그로 인한 국가의 존망(存亡)을 걱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죽음은 곧 고구려의 끝을 의미했다. 호랑이의 몸에서 살쾡이들이 나왔다고 했던가. 연개소문이 사망한 후 우려했던 대로 철 없는 아들들 간의 권력 다툼이 발생했고, 당나라는 내분(內紛)을 적극 활용하며 고구려를 또 다시 침공했다. 무엇보다 당나라에게 있어 연개소문이 없는 고구려는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 없었다. 결국, 연개소문이 사망한 지 2년 밖에 안 된 668년에 고구려는 멸망했다. '자주적 기조'를 바탕으로 중화 패권주의에 대등하게 맞섰고 더 나아가 승리하기까지 했던 한민족의 마지막 '혼'(魂)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매우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이후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구려와 연개소문에 버금가는 국가 및 인물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았고, 오히려 친중 사대주의(事大主義)로의 퇴행마저 나타나게 된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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