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서울·후쿠오카, 다른 듯 닮은 따뜻한 시선

서정민 입력 2021. 6. 12. 00:21 수정 2021. 6. 12.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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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들의 우정 '그들이 있던 시간'전
만난 적 없는 한·일 두 사진가
딸·아들이 인연 맺어 함께 전시
두 아이 모습 등 80여 점 선보여
"상냥·씩씩함 옛 향수 느꼈으면"

한영수·이노우에 코지 사진전
한영수 사진가의 작품. 똑같이 원피스를 맞춰입은 쌍둥이 자매의 세련된 패션이 눈에 띈다. 서울, 명동, 1960년. [사진 한영수 문화재단]
두 장의 흑백 사진이 있다. 너덧 살로 보이는 여자아이들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활짝 웃는 모습이다. 시대적 배경은 1950~60년대. 하지만 장소는 다르다. 한 장은 한국의 명동, 한 장은 일본의 후쿠오카가 배경이다. 한국 사진가 한영수(1933~99)씨와 일본 사진가 이노우에 코지(1919~93)씨가 각각 촬영한 두 장의 사진은 이처럼 닮은 듯 다르고 다른 듯 닮았다.
이노우에 코지의 사진작품. 새로 산 신발을 목에 걸고 동생과 함께 걸어가는 언니의 뿌듯한 웃음이 귀엽다. 일본, 후쿠오카, 1957년 7월. [사진 이노우에 코지 갤러리]
한영수와 이노우에 코지. 두 사람은 살아생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남긴 사진 중에는 뒤섞어 놓으면 어느 것이 누구의 사진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배경과 인물들의 분위기, 구도와 정서가 닮은 것들이 많다.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있는 사진갤러리 류가헌에서 6월 15일부터 7월 25일까지 열리는 사진전 ‘그들이 있던 시간’은 두 작가의 신기하리만치 서로 닮은 사진들을 전시하는 자리다. 물놀이 삼매경에 빠진 벌거벗은 아이들, 자전거에 아이를 태우고 달리는 아버지, 포대기로 아이를 둘러업은 어머니, 주인을 기다리며 목 빼고 있는 강아지, 그리고 층계를 오르는 한껏 차려입은 여인들의 ‘빠글빠글’ 파마머리까지 닮았다.

1950~60년대 양국 일상의 풍경 비슷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한껏 멋을 낸 여인의 모습은 전후 시대라고는 하지만 멋쟁이들이 많았던 당시 명동 풍경을 잘 보여준다. 서울, 을지로1가 (구)반도호텔 앞, 1956~63년. [사진 한영수 문화재단]
개성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한영수 사진가는 어린 시절 취미로 사진을 접했고, 한국전쟁 참전 후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한국 최초의 리얼리즘 사진연구 단체 ‘신선회’에서 활동했다. 70년대에 백화점 홍보 카탈로그를 찍은 것을 시작으로 광고·패션 1세대 사진가로 큰 성공을 거뒀다. 삼성전자, 쥬단학화장품 등 90년대 중반까지 그의 손을 거쳐 간 광고는 셀 수 없이 많다. 87년에는 한국전쟁 이후 서울과 역사적 발자취를 담은 사진들을 모은 사진집 『삶』을 출간했다. 작고 후 그의 딸 한선정(52)씨가 한영수 문화재단을 설립, 필름을 관리하면서 2014년 프랑스 아를 포토 페스티벌 참가 등 뉴욕·LA 등지에서 활발하게 개인전을 열고 있다. 주요 출판물로는 『서울 모던 타임즈』(2014), 『한영수 : 꿈결 같은 시절(2015)』, 『시간 속의 강』(2017),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2020)가 있다.

후쿠오카에서 태어난 이노우에 코지 사진가는 3세 때 사고로 청력을 잃었다. 16세에 취미로 사진을 시작했고 각종 공모전에서 수상하며 사진가로 활동했다. 89년 후쿠오카 이와타야백화점의 ‘추억의 거리’ 캠페인 광고에 그가 촬영한 50년대 사진들이 사용되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90년 파리 포토 페스티벌에 초대됐고, 93년 작고 직후 초대된 아를 포토 페스티벌에선 명예 아를 시민상을 수상했다. 유명 광고 사진가인 아들 이노우에 하지메(77)씨가 ‘이노우에 갤러리’를 설립하고 다양한 사진전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집 『추억의 거리』(1988), 『그 시절-1959년, 오키나와ㅡ이 하늘 아래서』(1991), 『아이들이 있던 거리』(2001) 등이 출판됐다.

얼음에 혀를 대고 살짝 맛 보는 소년 사진은 코지 작가의 대표작이다. 까까머리 땜통 소년의 꾸러기 같은 행동이 한국 풍경과 참 닮았다. 일본, 후쿠오카, 1954년 7월. [사진 이노우에 코지 갤러리]
동시대를 살았지만 50~60년대 서울과 후쿠오카에서 각각 활동하면서 교류가 없던 두 사진가의 작품이 70여 년을 넘어 한자리에 모인 건 하지메씨와 선정씨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다.

2008년 대구사진비엔날레에 관람차 방문했던 하지메씨가 한영수 사진가의 사진을 보고 “마치 아버지의 사진을 보는 것 같았다”며 선정씨의 연락처를 수소문한 것. 엇갈리는 일정 때문에 바로 만날 수는 없었지만, 하지메씨가 아버지의 사진집 두 권을 선정씨에게 선물로 보내면서 인연은 시작됐다. 선정씨는 “단번에 그 책들을 알아봤다”며 “일본에 갈 때마다 아버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일본 사진가들의 사진집을 구매했는데 그 중 ‘아버지의 사진과 참 비슷하다’ 감탄했던 사진들이 코지씨의 사진들이었다”고 했다.

서로에게 안부 메일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2010년 후쿠오카에서 처음 만난 후 부부 동반으로 1년에 서너 번씩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우정을 쌓았다. 선정씨는 “스무 살 넘는 나이 차와 휴대폰 번역기를 써야 하는 언어의 장벽도 있지만 매번 인생 선배를 만난 것처럼 좋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건강·코로나 탓 곡절 끝 전시회 열려

이노우에 하지메(左), 한선정(右)
이번 전시도 사진갤러리 류가헌, 이노우에 코지 갤러리, 한영수 문화재단이 공동 기획으로 오랫동안 함께 준비한 것인데,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2019년 하지메씨가 뇌출혈로 병원에 입원하면서 중단된 것. “쓰러지신 다음 날 하지메씨의 큰딸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좀 와줄 수 없느냐고. 바로 일본으로 날아갔죠. 병실에서 저를 보자마자 70대 노인이 엉엉 우시는 거예요. 자기 때문에 전시 준비에 차질이 생겨서 미안하다면서요.” 퇴원은 했지만 일부 뇌손상으로 하지메씨는 말을 못하고 동작마저 불편해졌다. 부인·딸·아들(그 역시 광고사진가다)의 도움으로 이메일과 문자로 사진전 준비를 이어갔는데, 설상가상으로 지난해 코로나19로 전시 일정이 또 연기됐다. “천천히 준비하라는 하늘의 뜻이라 생각했어요. 꾸준히 두 아버지의 필름을 비교하고, 닮은 사진을 선별하고, 하지메씨의 의견을 듣고, 프린트를 하면서 준비했죠.”

아쉬운 건 더 많은 사진들을 전시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버지의 필름을 모두 직접 프린트했던 하지메씨의 건강 때문에 기존에 해둔 프린트만 전시하게 됐기 때문이다.

“필름을 다 보낼 테니 저보고 프린트를 하라고 했지만 할 수 없었어요. 수십 년 동안 직접 흑백 프린트를 했던 이유는 아버지의 사진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하지메씨만의 감성과 디테일이 있기 때문인데 그걸 제가 표현할 순 없죠. 이번엔 80여 점을 선보이는 데 만족하고 다음 전시를 기약하자 설득했죠.”

우여곡절 끝에 열린 전시마저 보러 오지 못한 하지메씨는 중앙SUNDAY와의 짧은 서면 인터뷰를 통해 “아버지들이 남긴 수많은 사진들을 보관·출판하면서 당시의 시대상과 분위기, 조형미와 아름다움을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나와 한선정씨의 바람이 깊은 인연이 되어 준비한 첫 전시”라며 “가난했지만 상냥함, 따뜻함, 씩씩함이 살아 있던 시절의 향수를 관람객들이 느끼실 수 있다면 좋겠다”고 전했다. 무료.

서정민 기자/중앙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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