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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응징하지 않는 군 조직 문화가 문제의 온상

고성표 입력 2021. 06. 12.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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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성추행 사건
상관들, 피해 신고해도 조치 안해
무마·회유 등 조직적 2차 가해도
왜곡된 군 시각
여군 70% "문제 제기하기 어렵다"
남성 병사 10%"가벼운 접촉 괜찮다"
성범죄 해결책
군 내 양성평등센터 위상 높이고
성폭력 예방 교육 지속적으로 해야


군 성범죄 왜 반복되나
“딸을 죽인 범인을 꼭 잡아달라고 하셨죠? 그 범인이 장군님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중략) 7년 전에 그녀는 죽었습니다. 당신이 그녀를 외면했을 때 이미 그녀는 죽었습니다. 그녀를 죽인 건 당신입니다.”

1999년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장군의 딸’ 후반부에 나오는 주인공(존 트라볼타)의 대사다. 퇴역을 앞두고 부통령 후보로 지목된 장군의 딸이 부대 내 연병장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장군의 딸은 육군 사관학교 출신의 대위였다. 군 범죄 특수수사관 폴(존 트라볼타)이 사건을 수사한다. 그녀의 죽음은 7년 전 사관학교 생도 시절 군사훈련 중 동료 남성 생도들에게 집단 강간과 폭행을 당한 일과 관련돼 있었다. 당시 이 성범죄는 조용히 묻혔다.

장군의 상관은 “이 사실이 알려지면 육군의 명예가 실추될 것이다. 당신이 이 일을 무마시키면 진급을 보장해주겠다”고 했다. 장군은 딸을 설득해 사건을 묻었다. 그렇게 진실이 은폐된 채 7년의 세월이 흘렀다. 장교가 된 딸은 일부러 성적으로 타락한 생활을 하고 결국에는 죽음으로써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은 장군에게 복수한다. 만들어진 지 20여년이나 지났지만 이 영화는 미군은 물론 한국군 내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성범죄 사건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다. 성추행 피해를 당했다가 지난달 21일 스스로 생을 마감한 공군 이모 중사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이 중사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가해자뿐만이 아니었다. 사건을 무마하는 등 2차 가해를 한 군 관계자들이 공범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장교보다 여군 부사관들 차별 많아

이 중사는 지난 3월 상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뒤 다음 날 즉시 상관에게 피해 신고를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보호조치는 없었다. 소속 부대에 20여 차례 고충을 호소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부대 상관들은 이 중사를 회유했다. 군의 늑장 대응도 문제였다. 공군 검찰은 사건을 넘겨받은 후 두 달 동안 가해자를 조사하지 않았다. 또 이 중사 사건이 공군참모총장에게 보고되기까지는 40일이 넘게 걸렸다. 서욱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된 건 사건 발생 70일이 지난 5월 말이었다. 이미 피해자는 극단적 선택을 한 뒤였다. 군 법무관 출신의 이상욱 변호사는 “성폭력 피해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건 사건 그 자체도 있지만 범죄를 응징해 주지 않는 군의 조직 문화, 내 편이 돼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잊으라’거나 ‘없던 일로 하자’는 식의 회유도 크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피해자들은 이런 현실 속에서 군 조직 문화에 순응하거나 복무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막다른 길로 내몰린다”고 지적했다.

특히 여군을 바라보는 일부 왜곡된 군 내 시각과 남성 중심의 문화는 근본적인 문제로 지적된다. 2년 전 전역한 여군 부사관 출신인 박모(27)씨는 “여군을 대하는 일부 상관들의 잘못된 태도를 회식 자리에서 자주 경험하곤 했다”고 취재진에게 털어놓았다.

“‘오늘따라 피곤해 보인다. 어젯밤에 무슨 좋은 일 있었냐’ ‘술 좀 예쁘게 따라보라’는 식의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농담조로 하더라. 노래방에 가서는 춤을 추자더니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면서 허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내가 군인인지 아니면 술집 접대부인지 모르겠더라.”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당시 그는 부대 상관에게 보고할까 고민하다 포기했다고 한다. “심각한 일도 아닌데 괜히 분란을 일으킨다”며 오히려 질책을 받을 수 있어서였다. 박씨는 “내가 근무하던 부대의 다른 중대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문제 삼았던 동료 여군만 결국 이상한 사람으로 몰리는 것을 보고 (가해자를) 그냥 잘 피해 다니는 것이 최선이었다”고 말했다.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는 군 내 인권상황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당시 설문조사는 군 내 성 인식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성적인 농담이나 가벼운 신체접촉은 군대에서 있을 수 있다’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긍정 답변을 한 남성 병사는 10%가 넘었다. 또 성 문제 고발과 관련해 ‘군의 위계질서에서 낮은 위치에 있으면 피해 사실을 제기하기 어렵다’는 질문에는 70%가 넘는 여군이 ‘그렇다’고 답했다.

전문가들은 여군도 똑같은 군인으로서 생활할 수 있는 양성평등의 문화가 하루빨리 정착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여성을 ‘전우’가 아닌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남아있는 한 군내 성범죄는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지난 3일 한국국방연구원에서 열린 모병제 관련 정책세미나에서 김은경 젊은여군포럼 대표는 “여군 개개인이 느끼는 차별은 제도적 차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시와 거리두기, 승진과 보직에 영향을 미치는 편향적 인사평가, 심지어는 왕따 현상까지 있다”고 지적했다. 김 대표는 특히 “장교보다 여군 부사관은 그 신분과 정체성이라는 이중 구조의 차별을 받고 살아간다”고 덧붙였다.

군내 양성평등을 위한 제도도 중요하지만 이를 운용하는 사람이 제대로 된 인식을 갖고 있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공군 이 중사 사건 때도 공군본부 양성평등센터는 피해 발생 사흘 만에 사건을 인지했지만 한 달이나 지난 후에야 국방부에 피해 신고를 접수했다. 피해 내용 등 사건의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는 형식적인 보고였다.

양성평등센터 인력·예산도 태부족

군사 문제 전문가인 김종대 전 정의당 의원은 “(성 문제를 포함해)인권 관련 시스템과 제도, 매뉴얼이 잘 갖춰져 있어도 극단적으로 비대칭화 돼 있는 군의 권력관계라는 울타리에 매번 가로막힌다”며 “제도 개선 여지도 있지만 민주적 조직이 아닌 군에서 어떻게 인권 문제를 다룰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군에는 47명의 성고충상담관(7급 상당)과 각 군 과장급을 책임자로 한 양성평등센터가 운용 중이다. 하지만 적은 인력과 예산, 낮은 직급의 인원이 각종 성범죄 신고와 상담, 예방 교육, 대책 수립의 임무를 맡고 있는 형편이다. 이들 역시 부대 내 지휘관의 영향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다. 때문에 조직의 위상을 높이고 독립적 지위를 갖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성범죄에 대한 꾸준한 인식 교육도 필요하다. 방혜린 군인권센터 팀장은 “피해자가 신고했을 때 주변 관계자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2차 가해라는 것이 무엇이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등을 지속적으로 교육해야 한다”고 했다.

■ 미 국방부, 군 성범죄 자문위 구성…프랑스는 독립적 조사기구 설립

지난해 7월 미국 LA지역에서 열린 바네사 기옌 일병 추모제. [AFP=연합뉴스]
세계 각국도 여군에 대한 성범죄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해 6월 미 육군 기지인 텍사스 포트후드에서 근무하던 여군 특수요원 바네사 기옌(20) 일병이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는 실종되기 전 가족 등 주변 사람들에게 “상관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신고하려 해도 보복이 두렵다” 고 말했다고 한다. 범인은 동료 특수요원이던 아론 로빈슨 상병이었다.

독립 조사위가 꾸려져 조사한 결과 성범죄에 노출돼도 상관으로부터 보복이 두려워 신고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만연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지휘계통을 통한 보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누락된 사실도 드러났다. 미 육군은 부대 지휘관 등 21명을 중징계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미군 내 성범죄를 ‘재앙’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미군 내 성범죄가 심각하다는 점은 오래전부터 지적됐다. 2008년 제인 하먼 연방 하원의원은 “조국을 지키겠다고 선서한 여군들이 적군 공격으로 죽는 것보다 동료 군인으로부터 강간당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달 9일(현지시각) 마크 밀리 미국 합동참모본부 의장도 “지난해 2만명 정도의 남녀 미군이 성범죄 대상이 됐다고 추정한다. 이는 미군 병력의 1%에 해당한다”고 했다.

미 국방부는 지난 2월 독립적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성폭력·성추행 사건에 군 지휘관이 관여할 수 없도록 하는 방안을 구상 중이다. 미 연방법은 국방부가 군대 성폭력과 관련된 보고서를 매년 의회에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

2015년 4월 캐나다에서도 여군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남성 우월주의 문화가 만연하다는 특별보고서가 나왔다. 당시 캐나다 ‘군내 성적 비행 및 학대’ 조사위원회는 여군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관행의 일상화, 폐쇄적인 조직문화로 캐나다군이 오염돼 있다고 지적했다. 2014년 프랑스에서 군대 내에 만연한 성범죄 실태를 폭로한 책(La Guerre Invisible·보이지 않는 전쟁)이 발간됐다. 이 책에는 군대 내 성폭력 사례 35건이 적나라하게 담겼다. 이후 군의 대대적인 내부조사를 통해 15개월간 성폭행 사례 총 86건이 자행됐음이 밝혀졌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 정부는 국방부 내 독립적인 조사기구인 ‘테미스(Themis)’를 설립해 군 성범죄 차단에 나섰다.

테미스는 사건 조사 뿐 아니라 피해자들이 정상적 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장기적인 피해자 지원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1948년 독립 때부터 여군 징병제를 실시해 온 이스라엘도 성범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스라엘 방위군 성범죄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1542건의 성폭력 민원이 접수됐고, 피해자 대다수는 여군이었다.



고성표 기자 muze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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