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태의 시사哲] '조국의 시간'에 열광하는 앵무새들.. 이제 그만 자아도취서 깨어나길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2021. 6. 12.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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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나르키소스 신화로 본 악성 자아도취의 비극

강의 신 케피소스는 물의 요정 리리오페를 겁탈했다. 그렇게 태어난 나르키소스는 “소년 같기도 하고 성인 남자 같기도 한”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다들 홀딱 반해 탄식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늘 냉담한 나르키소스는 모든 이의 구애를 뿌리칠 뿐이었다.

일러스트=안병현

헤라 여신의 시종인 요정 에코도 거절당했다. 에코는 원래 수다쟁이였지만 헤라의 저주를 받았다. 자기 말을 못 하고 남의 말을 반복해야만 했다. 그러니 가슴이 찢어졌을 것이다. 나르키소스가 야멸차게 내뱉은 말을 자기 입으로 되풀이해야 했으니 말이다. “저리 꺼져. 네 품에 안기느니 죽는 게 나아.”

상심한 에코는 목소리와 뼈만 남았다. 그 뼈마저도 돌로 변해버렸다. 그 사연을 접한 이들이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에게 청했다. “그도 이렇게 사랑하다가 사랑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하소서!” 네메시스 역시 나르키소스에게 ‘차인’ 전력이 있는 터라, 일사천리로 청원은 접수되었다.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해버린 나르키소스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물가에서 죽어버리고 만다.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변신 이야기>에 기록한 나르키소스 신화다.

나르키소스는 수선화가 되었다. 에코는 메아리가 되어 지금도 남이 한 말을 따라 하고 있다. 이 비극적 이야기는 수많은 이에게 영감을 주었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이 대표적이다.

프롬은 <인간의 마음>에서 악(惡)을 탐구한다. 그가 볼 때 악의 본질은 다음 세 가지로 구성된다. 죽음에 대한 사랑(네크로필리아), 자아도취(나르시시즘), 근친상간. 프롬은 이 중 상대적으로 가장 무난해 보이는 자아도취야말로 악의 근원이라고 지목한다. 왜 그럴까?

사실 자아도취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인간 정신의 작동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태어난 직후의 아기를 생각해보자. 나와 세상을 구별할 능력이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내가 울면 젖을 주고 달래준다. 모두가 나를 보며 웃어준다. 나는 곧 세상과 동일하므로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나르시시스트였다고 할 수 있다.

성장한다는 것은 그런 자아도취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나’의 바깥에도 세상이 있고, 그 세상은 나와 같지 않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일이 늘 벌어진다.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렇듯 ‘나’를 넘어서는 객관적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말과 같다.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은 세상에 나를 맞추는 대신 나에게 세상을 맞추려 든다. 그런 태도는 때로 창조력의 원천이 된다. 가령 스티브 잡스가 그렇다. 잡스는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고 남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일삼았다. 동료들은 잡스가 ‘현실 왜곡장’을 펼친다고 농담 삼아 빈정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리더십과 비전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스마트폰 세상은 오지 않았거나 퍽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반면 히틀러는 어떨까. 히틀러는 자신을 영웅으로 생각했다. ‘순수한 아리안 민족’의 영광을 부활시킬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는 자아도취에서 깨지 않기 위해 다른 이들까지 그의 망상 속으로 끌어들였다. 히틀러의 개인적 자아도취는 독일 전체의 집단적 자아도취로 확장됐고, 그 속에서 유대인 학살이라는 엄청난 악행이 벌어지고 말았다.

프롬은 종양을 진단할 때 쓰는 의학적 용어를 빌려, 자아도취를 양성(benign)과 악성(malign)으로 구분한다. 생명에 대한 사랑, 범인류적 차원으로 나아가는 개방적 태도, 그런 것이 함께할 때 자아도취는 긍정적 에너지로 승화될 수 있다. 반면 죽음과 고통을 찬미하며 가족이나 부족, 민족 같은 폐쇄적 혈통에 집착할 때 자아도취는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개인적 자아도취가 집단적 자아도취로 커지면 그 여파는 개인을 넘어설 수도 있다.

한국 사회는 자아도취의 폭풍에 시달리는 중이다. 지난달 출간한 조국 전 법무장관의 책 <조국의 시간> 때문이다. 제목부터 범상치 않다.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기술하고 있다. 요즘은 연예인 에세이도 이런 식으로 제목을 붙이지 않는 편이다. 그런 자의식에 독자들이 부담을 느낀다는 판단 때문이다.

저자의 말을 몇 구절 읽어보자. “제가 누구를 만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 자체로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유폐 상태였다고 토로한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는 것. 전형적 자아도취 증상이다. “이유 불문하고 국론 분열을 초래한 점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그 ‘이유’가 문제인데,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는 소리. 나르시시스트는 불리하면 이런 식으로 논점 일탈을 한다. 압권은 이 대목. “가족의 피에 펜을 찍어 써 내려가는 심정이었습니다.” 이토록 비장한 표현에서 우리는 일본 사무라이들이 선호하는 죽음의 미학을 엿볼 수 있다. 조국의 자아도취는 양성보다 악성에 가까운 듯하다.

문제는 이 자아도취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에서 근무하며 고액 사모펀드에 가입할 재산도 인맥도 없는 사람들, 자기 자식을 인턴으로 꽂아 넣고 입시 특혜를 안겨줄 능력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 그런 이들이 <조국의 시간>을 구입하여 인증샷을 올리며 ‘우리가 조국이다’라고 외친다. 자신의 현실을 잊기 위해 우상(idol)에 자아를 투영하는 팬클럽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모두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작은 나르시시스트였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자기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남들처럼 공부하고 일하고 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다. 이 평범한 진리를 조국과 그의 팬클럽만 모르는 것 같다. 마트에서 나뒹굴며 소리 지르는 어린이처럼 ‘무죄판결 내 거야’라며 떼를 쓰고 있으니 말이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조국을 SNS에 비친 자기 모습에 넋이 나간 나르키소스라 한다면, 그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이들은 그에게 반한 에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화와 달리 현실은 꼭 비극으로 끝날 필요가 없다. 그들 스스로는 진지한 비극의 주인공 행세를 하겠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는 엉터리 희극일 뿐. 조국과 그의 팬들 모두 자아도취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성숙한 존재가 되시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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