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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여왕이 된 발레리나 박세은

박돈규 기자 입력 2021. 06. 12. 03:12 수정 2021. 06. 14.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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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인 최초로 파리오페라발레단 수석에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POB)에서 1급 무용수로 활약해온 박세은(32)이 10일(현지시각) 수석 무용수인 에투알(étoile·별)로 지명됐다. 1669년 창단한 POB는 역사가 가장 긴 세계 최정상 발레단. 외국인이 5%에 불과할 만큼 자존심 강한 POB가 동양인을 에투알로 호명한 것은 박세은이 처음이다.

2007년 스위스 로잔콩쿠르 때 박세은. /박세은 제공

박세은은 이날 파리 바스티유 극장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개막 공연을 마친 후 커튼콜에서 에투알 승급을 통보받았다. 본지 전화 통화에서 박세은은 “오랜 꿈이었는데 현실이 되자 멍해지고 눈물이 쏟아졌다”면서 “관객에게 진심이 전해지는 춤을 계속 추고 싶다. 내가 오늘 줄리엣으로 춘 춤들을 복기하다 잠들 것”이라고 말했다.

파리오페라발레단 '로미오와 줄리엣' 개막공연을 마치고 에투알로 지명된 박세은 /박세은 제공

박세은은 10대 시절 세계 4대 발레 콩쿠르(바르나·잭슨·모스크바·로잔) 중 세 봉우리를 정복한 콩쿠르의 여왕이었다. 이제 프로 발레리나로 가장 빛나는 자리에 오른 셈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김선희 교수는 “신체 조건이 불리한 한국 무용수가 POB 에투알이 된 것은 김연아의 피겨 세계 제패 못지않은 사건”이라고 평했다.

파리오페라발레단 '로미오와 줄리엣' 개막공연을 마치고 에투알로 지명된 박세은 /박세은 제공

박세은, 파리오페라발레단 별이 되다… “김연아 세계 제패 같은 사건”

동양인 최초로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POB) 에투알(별)이 된 박세은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발레를 시작했다. 아빠 친구 딸이 출연한 국립발레단 ‘호두까기 인형’을 보고 나서였다. 초급반에서 중급반으로 올라갈 때 혼자 유급될 정도로 더딘 출발이었다.

1년만에 연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 후 날아든 희소식 -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이 10일(현지 시각) 파리 바스티유 극장에서 올린 ‘로미오와 줄리엣’ 개막 무대에서 줄리엣(박세은)이 로미오와 함께 춤추고 있다. 1급 무용수 박세은은 이날 공연이 끝난 뒤 에투알로 지명됐다. 1669년 창단한 이 발레단에서 동양인 에투알이 나오기는 처음이다. /파리오페라발레단 홈페이지

서울 예원학교 1학년 때 변곡점이 왔다. 학교 축제에서 15초짜리 솔로(독무)를 처음 맡은 것이다. 박세은은 “늘 뒤쪽에 맹하게 서 있던 저를 누군가 주목하고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며 “더 잘하고 싶어 난생처음 진지해졌고 발레의 매력에 빠졌다”고 술회했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교사가 건드려준 셈이다. 실력이 수직 상승해 졸업할 땐 수석이었고 서울예고로 진학했다.

박세은은 2006년 미국 잭슨발레콩쿠르에서 금상 없는 은상, 이듬해 스위스 로잔콩쿠르에선 1위를 차지했다. 2010년 불가리아 바르나콩쿠르에서도 금상을 받았다. 2011년 한국 발레리나 최초로 POB에 입단한 그녀는 강수진 전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 수석(54·현재 국립발레단장)이 그랬듯이 ‘발레단의 등뼈’라 불리는 군무진으로 출발했다. 에투알까지 10년이 걸렸다.

“강수진 선생님을 존경한다. 완벽이라는 게 존재할 수 없는 발레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 만족할 수 없는 자신과의 싸움을 즐기고 계신 분이다. 그래서 강하고 오래 남는다. 수석 무용수보다는 ‘예술가’라는 호칭이 더 잘 어울린다. 10년 후 나도 사람들의 마음에 남는 발레리나가 되었으면 좋겠다.”

박세은이 2010년 조선일보 타임캡슐에 묻은 ’10년 뒤 박세은에게 보내는 편지'. /박세은 제공

박세은이 2010년 조선일보 타임캡슐에 묻은 ’10년 뒤 박세은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다. 이 발레리나는 이제 그 우상을 뛰어넘었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은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 등과 함께 세계 최고 발레단으로 꼽힌다. 박세은은 2018년 무용계 ‘아카데미상’으로 통하는 ‘브누아 드 라 당스’를 받았다.

그러나 삶은 소 잔등처럼 부드럽게 흘러가지 않는다. 박세은에게 2015년은 최악의 해였다. 연습 중 앞에 있던 무용수의 신발 굽이 이마를 강타했다. 피가 뚝뚝 떨어졌고 세로로 6㎝를 꿰맸다. “무용수에게 중요한 안면이 찢어져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 근본적인 걱정을 한 시기예요.” 그녀는 시련을 이겨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코로나로 문을 닫았던 POB가 약 1년 만에 올린 전막 발레였다. 줄리엣으로 춤추는 5명 중 박세은을 뺀 4명은 모두 에투알. 개막 공연을 맡은 것도 좋은 신호였다. 이날 박세은이 에투알로 지명되자 객석에서 “브라보!”와 갈채가 쏟아졌다. 파리에서 전화를 받은 박세은은 “1막 끝나고 예술감독이 ‘오늘 춤은 흠잡을 데가 없다. 끝까지 잘하자’고 격려했을 때 예감했지만 김칫국을 마실까 봐 배역에만 집중했다”며 “비극의 여주인공 줄리엣을 처음 맡아 무대에서 만족스럽게 춤추고 죽은 날에 에투알이 돼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기쁘다”고 했다.

박세은 약력

POB에서 에투알은 예술감독과 이사회가 정한다. 1급 무용수부터는 승급 시험에서 해방되는 대신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남편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어요. 긴장했는지 오늘 새벽에 저보다 더 일찍 일어났거든요(웃음). 회사에 반차를 내고 객석에서 현장을 지켜봤습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게 저를 믿어주고 정말 많이 도와줬어요.”

에투알이 되면 뭐가 달라질까. 정년은 42세로 똑같다. “자리에 연연한 적은 없어요. 연습량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월급은 달라지겠지요. 하하하. 공연을 차분하게 준비할 수 있는 개인 탈의실이 주어진다는 게 좋고요. 오늘 백스테이지에서 동료 몇십 명이 한꺼번에 저를 안아주는데 ‘정말 가족이구나’ 싶었어요.”

파리 시각으로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다. 에투알이 된 줄리엣은 귀가해 샴페인을 마시는 중이라고 했다. 휴대전화로는 축하 메시지가 쇄도하고 있었다.

“축하 문자보다 좋았던 건 ‘오늘 너 때문에 많이 울었고 진짜 줄리엣을 봤다’는 감상이에요. ‘점프할 때 허공에 머물러 있는 박세은을 바라보며 몇 초 동안 숨을 죽였다’는 관객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방향으로 성장했으면 좋겠어요. 배우는 기쁨을 잃지 않고 감동 주는 춤을 오래 추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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