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를 모르던 투혼, 암도 이길 줄 알았는데..

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2021. 6. 12.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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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불굴의 멀티 플레이어 유상철, 영원히 잠들다

(시사저널=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2002 한·일월드컵의 영웅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이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인천 사령탑으로 있던 2019년 10월 췌장암 4기 판정을 받은 그는 1년8개월 동안 병마와 치열히 싸웠다. 지난해 하반기만 해도 크게 호전되는 듯했지만, 올해 초 다시 병원에 입원했고 폐와 뇌 쪽에 암세포가 전이되면서 집중 치료를 받아야 했다. 결국 6월7일 저녁 7시20분경 대한민국을 열광시켰던 스타는 하늘의 별이 됐다. 

췌장암 진단을 받고도 인천 구단을 이끌며 2019 시즌 K리그 극적인 잔류 드라마를 썼던 고인은 "꼭 이기고 돌아오겠다"며 암세포도 강하게 날려버릴 각오로 투병에 돌입했다. 한국뿐만 아니라 그가 선수생활을 했던 일본에서도 "유상철은 강하다" "상철 아니키(형) 힘내라"를 외치며 그의 쾌유를 빌었다. 지난해 10월만 해도 암의 크기가 크게 줄어들어 가족과 지인들이 희망을 가졌지만 '침묵의 살인마'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최악의 암, 췌장암은 결국 기적을 향한 그의 도전을 멈춰 세웠다. 

2019년 11월30일 경남 창원에서 열린 프로축구 K리그1 경남FC-인천 유나이티드 경기에서 무승부로 1부 리그 잔류를 확정한 인천 유상철 감독이 선수들과 끌어안으며 기뻐하고 있다.ⓒ연합뉴스

2002 월드컵에서 홍명보와 함께 대회 올스타에 선정

유상철이 임종 당시까지 입원했던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는 6월7일부터 8일까지 추모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유가족 중 아내 최희선씨와 장남 선우씨가 문상객을 맞았다. 월드컵 4강 신화를 쓰며 전 국민에게 기쁨을 준 만큼 문재인 대통령과 정·관계 인사들도 근조화환을 보내 애도를 표시했다. 고인의 치료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겸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 유상철 전 감독이 마지막으로 지휘했던 인천의 구단주인 박남춘 인천광역시장이 직접 빈소를 찾았다. 

1971년 서울에서 출생한 유상철은 서울 응암초·경신중·경신고·건국대를 거쳐 1994년 울산 현대에 입단했다. 1990년 청소년 국가대표팀에 선발되며 처음 주목을 받았지만 20대 초반에는 좌절이 반복됐다. 출전이 유력했던 1991년 포르투갈 세계청소년선수권(현 U-20 월드컵)은 남북 단일팀 구성으로 제외됐다. 촉박한 준비 기간 속에 조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남한은 수비, 북한은 공격 위주로 선수 선발을 하는 바람에 공격형 미드필더 유상철이 본선에서 배제된 것. 1994년 미국월드컵 때도 최종 엔트리 경합에서 경험 많은 선배들에 밀려 탈락했다.

하지만 탈아시아 레벨의 체격조건과 기동력, 시야를 지닌 유상철은 금방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독일에서 돌아와 울산 지휘봉을 잡고 있던 차범근 감독은 "유럽에 진출시키고 싶다. 유럽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큰 한국 선수"라고 평가했다. 그는 만능 플레이어로 활약했다. 대표팀에서는 스토퍼·윙백·중앙미드필더를 중심으로 뛰고, 소속팀에서는 스트라이커와 공격형 미드필더를 주로 봤다. 1998년에는 프랑스월드컵에서 윙백으로 뛰며 벨기에전에서 천금 같은 동점골로 한국 축구의 자존심을 살렸고, 그 뒤 K리그에 와서는 15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올랐다. 

"내 제자 강인이 경기 직접 보고 싶어, 꼭 나아야지"

그는 투혼의 상징이기도 했다. 2002 한·일월드컵을 1년 앞두고 열린 컨페더레이션스컵의 일화가 유명하다. 당시 한국은 조별리그 1차전에서 프랑스에 0대5 참패를 당했고, 히딩크호는 첫 위기에 몰려 있었다. 멕시코와의 2차전에서 유상철은 상대 선수와 부딪히며 코뼈가 부러졌다. 히딩크 감독은 교체를 지시했지만, 유상철은 박항서 당시 코치를 설득하며 경기에 뛰겠다는 의사를 강하게 전했다. 결국 후반 45분 그는 부러진 코로 헤딩 결승골을 터트리며 승리를 선물했다.

2002 한·일월드컵은 그의 실력과 명성을 세계에 떨친 무대였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전했지만, 경기 중 히딩크 감독의 공격적인 선수 기용에 따라 수비형 미드필더, 센터백으로 3단 변신하며 극적인 역전승을 이끌었다. 홍명보와 함께 대회 올스타 16인에 이름을 올렸다. 월드컵 후광 효과를 내세워 선수로서 마지막 꿈이었던 유럽 진출을 타진했지만 만 31세 나이, 그리고 미숙했던 에이전트의 협상력으로 인해 실패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친정팀인 울산과 요코하마를 오가며 선수생활을 하다 2006년 현역생활을 마무리한 유상철은 지도자로 전환했다. 2009년 춘천기계공고 축구부 창단 감독으로 시작해 대전(2011~12년), 울산대(2014~17년), 전남(2018년), 인천(2019년)에서 지휘봉을 잡았다. 인천에서는 투병 중임에도 강한 책임감으로 선수들을 이끌었고 K리그에서 가장 극적인 잔류 드라마를 썼다. 

정식 팀은 아니었지만 유상철이 유달리 애착을 가진 지도자 생활도 있다. 2006년부터 인연을 맺은 KBS의 유소년 축구 예능 프로그램 《날아라 슛돌이》 팀에서다. 특히 2007년 지도한 슛돌이 3기에서는 현재 한국 축구의 차세대 에이스로 기대되는 유럽파 이강인을 만났다. 8개월여의 방송 기간 동안 유상철은 이강인의 재능을 간파했고, 다른 아이들과 달리 진지하고 깊이 있는 지도를 이어갔다. 당시 만 6세로 축구에 대한 재미에 눈떠 가던 이강인은 유상철의 지도 속에 일취월장했다. 2011년 초 스페인으로 건너가 입단 테스트를 받은 이강인은 발렌시아와 유소년 계약을 맺었고, 8년 뒤 정식 성인 계약을 맺으며 특급 유망주로 자리 잡았다. 

이강인은 유상철을 생애 첫 스승으로 표현했다. 두 사람은 2019년 FIFA U-20 월드컵 대한민국 준우승 기념행사에서 재회했다. 이강인이 고향 팀이자 유상철 감독이 이끄는 인천의 홈경기를 방문했다. 유상철의 투병이 알려진 2019년 12월에는 당시 국내에서 재활 중이던 이강인이 유상철을 찾았다. 유상철은 "다시 건강을 되찾는다면 가장 하고 싶은 건 제자인 이강인이 뛰는 모습을 유럽에 가서 직접 보는 것"이라고 말했고, 이강인은 "꼭 회복하셔서 오셨으면 좋겠다. 다시 제 감독님이 돼 달라"고 화답했다.

결국 유상철은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이강인은 6월8일 자신의 SNS에 어린 시절 유상철 감독과 함께 공을 차는 사진과 함께 추모사를 게재했다. 제주도에서 진행 중인 U-23 대표팀 훈련에 소집돼 직접 빈소를 찾지 못한 그는 "축구 인생의 첫 스승이었던 유상철 감독님"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한 글에서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해 더 좋은 선수가 되는 것이 제가 감독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계신 곳에서 꼭 지켜봐 주십시오"라고 작별의 말을 남겼다. 

ⓒ사진공동취재단

영정 사진은 절친의 아내가 찍어준 일상의 모습

장례식장의 빈소, 그리고 고인이 선수와 지도자로 인연을 맺은 울산·인천·대전 구단의 홈경기장에 마련된 분향소에 등장한 영정 사진 속에서 고(故) 유상철 감독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투병 중에도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해 미리 영정 사진 촬영을 따로 하지 않았기에, 장례식을 앞두고 유상철의 절친한 동생이 유가족에게 전달한 개인 사진이었다. 수년 전 1971년생 동갑내기 축구인들과 찍었던 사진 속의 천진난만한 표정이었다. 그의 절친인 송경섭 U-15 축구 대표팀 감독의 아내인 유명 사진가 조선희 작가가 촬영했다. 전 국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영정 사진 속에서 트레이드 마크였던 밝은 웃음을 짓고 있는 고인의 모습은 슬픔을 오히려 위로해 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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