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죽나요?" 묻던 성매매 여중생..만삭에도 진료 나선 사연

심석용 입력 2021. 6. 12. 14:00 수정 2021. 6. 12.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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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승민 가천대길병원 교수의 진료실엔 장난감 기차와 인형 같은 아이들을 위한 소품들이 많다. 사진 길병원

“저를 스승으로 생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어린 환자에게 ‘스승’이라 불린 건 처음이라며 하얀 가운을 입은 교수는 쑥스러워했다. 지난달 전해진 뜻밖의 편지엔 “스승의 날을 맞아 마음을 치료해주고 새 길을 열어준 의사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다”고 적혀 있었다. 수신인은 배승민(43) 가천대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발신인은 오래전 아동학대로 진료했던 여자아이였다. 선생님의 꽉 찬 진료 일정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소녀가 자필로 적은 편지를 슬며시 두고 갔다고 했다. 뒤늦게 편지를 읽은 교수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18년째 청진기로 소아·청소년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배 교수를 다시 그 편지가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숙제하던 ‘상담사’가 우연히 품게 된 꿈

지난해 인천 스마일센터에서 배승민 교수(오른쪽 아래에서 두번째)와 직원들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항상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만나는 직원들이라 사진찍는 순간만이라도 축제 분위기를 내기위해 머리띠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사진 배승민 교수 제공

배 교수의 꿈은 30여년 전 중학생 때 ‘숙제’에서 우연히 시작됐다. 그 시절 그는 모두의 ‘상담사’로 통했다. 나중에 상담 일을 해보면 어떨까 싶던 차에 미래의 본인을 상대로 인터뷰하라는 도덕 시간 숙제가 주어졌다. 평소 ‘상담사’ 활동과 언론에서 접한 소아정신과 이야기를 버무려 미래를 상상해봤다. 글을 써내려가다 보니 소아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굳어졌다고 한다. 그 이후 생소했던 직업은 선망의 대상이 됐다.

오랫동안 꿈을 그려서일까. 배 교수는 점점 꿈을 닮은 사람이 되어갔다. 2009년, 의사가 돼 서울 강북삼성병원에 일하던 그에게 뜻밖의 제안이 왔다. 인천에 해바라기 센터를 만드는데 소아정신과 전담 의사로 와달라는 청이었다. 가정폭력, 성폭력 피해자와 가족에게 심리치료와 의료 등을 지원하는 곳이다. 평소 배 교수가 특수상담을 하던 모습을 인상 깊게 본 은사 故 임세원 교수가 추천한 것이다. 전임의였던 제자를 보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스승은 제자가 더 많은 아이의 아픔을 보듬어주길 바라는 마음에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숨은 아픔을 푸는 일
길병원 소아정신과 부교수, 여가부 인천해바라기센터 소장, 법무부 인천스마일센터장. 짊어진 일이 늘어날수록 더 많은 아픔과 만났다. 자신이 에이즈(AIDS)에 걸린 줄 알고 “제가 언제 죽나요”라고 묻던 성매매 중학생, 긴 시간 신뢰를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성인이 되자마자 꽃가루처럼 사라진 아이, 아버지를 피해 엄마와 함께 도망치듯 집을 떠난 아이…. 전국 각지에서 흘러든 다양한 사연 뒤엔 실타래처럼 얽힌 아픔이 있었다.

이들을 외면할 수 없던 배 교수는 만삭의 몸으로도 진료를 놓지 않았다고 한다. 앞에서 피해자가 울 때면 뱃속 아이도 그걸 알아챈 듯 태동이 심해 진료실 탁자가 흔들린 때도 있었다고 한다. 아픔을 감싸 안으려는 손길이 늘 살갑게 돌아오진 않았다. 중증 자폐에 마음의 상처까지 입은 환자가 갑자기 폭발할 때면 두려움과 후회가 교차했다고 한다. 대기자 명단에 그 환자와 비슷한 이름만 떠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기도 했다.


“아픔 극복한 아이에게도 관심을”

지난 10일 배승민 가천대길병원 교수가 진료를 보고 있다. 사진 길병원

여러 난관 속에서도 배 교수가 자리를 지킨 건 “나를 만난 뒤 아이들이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는 학대 이후 그것을 극복한 아이들도 우리 사회가 주목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난 4월 『내게 위로가 되는 것들』을 펴낸 것도 그 때문이다. “어려움을 겪는 아이와 부모에게 위로와 조언을 전하면서 잿빛으로 가득 찬 듯 보이는 현장의 한 줄기 빛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게 배 교수의 말이다.

배 교수는 인터뷰 막바지에도 ‘상담사’의 역할을 놓지 않았다. “아이들은 부모 마음에 쉽게 전염돼요. 부모의 불안만 조금 줄여줘도 아이가 금방 낫기도 하거든요. 어른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기초공사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심석용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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