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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불빛'에 이끌려 철조망 넘어왔다"

오종탁 기자 입력 2021. 06. 13.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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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면과 철조망 ⑥] 北 민경대 약초병 복무 도중 탈북한 김강유씨

(시사저널=오종탁 기자)

분단 후 76년이 흘렀다. 앞서 숱한 위기 혹은 기회를 지났지만, 한반도 문제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일각에선 "이제 변화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갈 통일에 더 이상 목맬 필요 없다"는 회의론까지 제기한다. 정말 그럴까. 아이러니하게도 북한 권력구조가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 사이 북한 사람들은 참 많이 변했다. 이와 관련해 증언해 주고 있는 탈북민들은 "변하고 있는 북한 사람들에게 남한이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고 입을 모은다. 결코 통일불가론을 주장할 만큼 늦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사저널은 대한민국에 정착한 뒤 남북 간 가교 역할에 앞장서온 탈북민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편집자주) 

"저기 뭔가 있습니다!" 2016년 9월29일 오전 10시쯤 중동부전선의 한 육군 GOP(일반전초)에 초비상이 걸렸다. 북한군 병사 1명이 군사분계선(MDL)을 넘어왔기 때문이다. 평일의 고요한 아침 시간 벌어진 귀순 사건은 온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놨다. 이날 열린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서욱 합동참모본부 작전부장(현 국방부 장관)은 "국방 현안에 (국방위 소속 의원들의) 관심이 많아 오게 됐다"며 "귀순자는 상급병사로 군복을 착용했고 비무장 상태였다"고 밝혔다. 합참이 국감장에서 북한군 병사 귀순에 대해 보고한 것은 처음이었다. 2012년 다른 북한군 병사가 GOP 초소 문을 두드리며 귀순한 이른바 '노크 귀순' 이후 군 경계 태세를 두고 의구심이 짙어진 상황과 무관치 않았다. 

ⓒ시사저널 임준선 

어두운 北과 달랐던 南…"불빛이 국력 증명"

당시 목숨 걸고 철조망을 넘은 북한군 병사 김강유씨(27)를 시사저널이 직접 만나봤다. 키 174cm에 몸무게 48kg이란 왜소한 몸으로 철조망 사이를 통과했던 김씨는 이제 평범한 대한민국 청년이 됐다. 15kg가량 불어난 몸집만큼 그의 삶도 균형 잡히고 풍성해졌다. 

근황은. 

"프리랜서 강사로 일하고 있다. 1년여 전부터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기 시작했다. 물론 둘 다 북한과 관련한 콘텐츠다." 

강의는 누구를 대상으로 하나. 

"주로 군 장병들의 안보관 확립을 위해 강의한다." 

북한 평양 출신인 김씨는 2013년 조선인민군에 입대했다. 최전방을 지키는 민경대 소속이었으나, 4년여간 경계·전투와 관계없이 약초 캐는 작업을 수행했다. 김씨 같은 약초병들이 채취한 약초는 장마당에서 팔려 장교들 주머니를 채워줬다. 배급 사정이 열악한 북한군은 비공식적으로 약초병 보직을 운영하며 장교들의 동요를 억제하고 있다. 김씨는 "중대에서 약초병 1명씩을 차출해 각각 장교들에게 붙여준다"며 "상대적으로 편한 보직이다 보니 병사들은 서로 하고 싶어 안달이었다"고 회상했다. 

혼자 자유롭게 움직이는 약초병의 특성상 외부 세계도 많이 접할 수 있었다고 김씨는 전했다. 외부 세계라고 해봐야 남한발(發) 대북 전단, 대북 확성기 방송이 전부였지만, 김씨 등 젊은 북한 병사들에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대북 전단이나 확성기 방송의 무슨 내용이 인상 깊었나. 

"산속에 나무 잎사귀보다 많이 깔린 게 대북 전단이었다. 너무 궁금해 많이 주워서 봤다. 처음에는 전단에 담긴 내용이 다 거짓이라 생각했다. 김씨 3부자(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독재 통치에 대한 비판, 한국이 경제 강국이란 설명 등에 공감하기 힘들었다. 대북 방송은 2015년 8월 목함지뢰 사건을 계기로 재개됐다. 남한 노래를 들으면서 (북한 노래와 달리) 굉장히 자유롭다는 느낌이 드는 정도였다. 가끔 탈북민이 대북 방송을 통해 '북한에서 대한민국에 대해 교육하는 내용은 틀렸다. 우리는 귀순해 잘살고 있다. 10년(당시 북한 남성의 군 복무 기간)이나 군 생활을 할 바에야 대한민국으로 넘어오라'는 식으로 얘기하기도 했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끊임없이 보고 듣다 보니 조금씩 맘이 움직이더라. 결정적인 전환점은 남쪽 지역의 환한 불빛을 보게 되면서였다." 

불빛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던 건가. 

"산에서 오랫동안 약초를 캐다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내려오는 날이 종종 있었다. 그때 대한민국 쪽을 바라보면 대낮처럼 밝았다. 저녁 6시만 되면 어김없이 환하게 불을 켜는 거다. 반면 북한 쪽은 굉장히 어두웠다. 불빛은 국력이라고, 남한이 발전하지 않고서야 저렇게 전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겠다 싶더라. 동시에 대북 전단이나 방송 내용이, 입대 전 봤던 남한 드라마 속 생활상이 사실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결국 2016년 9월 '떠나야겠다'고 결심하고 남쪽으로 향했다." 

목숨 건 18시간 행군 끝에 남측 초소 발견 

그래도 나고 자란 곳을 선뜻 떠나오기 쉽지 않았을 듯하다. 더군다나 현직 군인 신분으로 탈영해 적진으로 왔다. 

"'대한민국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목숨 걸고 넘어왔다'는 거창한 이유를 대기보다는, 호기심이 앞섰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다. 군 생활을 6년이나 더 해야 한다는 답답함에 '진짜 남한이 자유롭고 풍족하게 살까' '한 번 가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합쳐져 철조망을 넘게 된 거다." 

넘어온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 달라. 

"일단 철책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호수를 건너야 했다. 용감하게 민경대 보초병들이 (철책 근무를 위해) 탄 배에 올랐다. 오후 3시쯤이었다. 허우대가 멀쩡하고 군복도 깨끗하게 입어서인지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배에서 내리곤 슬쩍 빠져서 비무장지대(DMZ) 앞까지 걸어갔다. 그러다 (북한군) 보초병 2명과 맞닥뜨리게 됐다. 걸리면 바로 군사재판과 처벌이다. 돌아서 뛰면(도망가면) 더 이상할 것 같아 마주 보면서 갔다. 다행히 나한테 말을 안 걸고 지나치더라." 

처음부터 운이 따랐다. 

"그렇다. 가슴을 쓸어내린 후 정말 열심히 뛰었다. 경사가 심한 골짜기를 따라갔다. 지뢰를 밟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5시간쯤 지났을까. 아무리 이동해도 철책도 초소도 나타나지 않자 좀 불안해졌다. 설상가상으로 해가 지면서 한 치 앞도 안 보이게 됐다. 오감에만 의존해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어느 지점에서 엎드렸다. 달빛이 비치는 하늘 쪽으로 고개를 드니 북한군 보병 철책의 윤곽이 보였다." 

철조망을 넘기 어려웠을 것 같다. 

"3중 철책이었는데, 첫 번째 철책에는 220V 전류가, 두 번째엔 2200V 전류가 흘렀고 세 번째는 가시로 덮여 있었다. 비로 인해 철책 밑 땅이 팬 지점을 찾았다. 30cm 남짓 되는 틈이 있었다. 그쪽에 몸을 바짝 대고 대각선으로 비틀며 철책 세 겹을 모두 통과했다. 문제는 그 뒤부터였다. 골짜기를 따라 밤새 뛰었는데도 남방한계선 근처의 (북한군) 민경 철책과 대한민국 철책이 나타나지 않는 거다. 지뢰를 피하려 골짜기를 따라가다가 길을 헤맨 탓이다. 출발하기 전 확인했을 땐 남측 철책까지 (직선거리로) 3~4km밖에 안 돼 보였다. 설사 지뢰를 밟더라도 능선을 타기로 전략을 수정했다. 그렇게 방향을 바꿔 가면서 길을 잃기도 하고 벼랑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너무 힘들어 가져온 쥐약을 먹고 죽을 생각까지 했다. 그렇게 밤새 고생하다 보니 아침이 밝아왔다. 가까스로 민경 철책과 남측 철책을 발견했다. 팬 부분을 통해 민경 철책을 넘고 미친 듯이 달려 남측 철책에 다다랐다." 

대한민국 철책은 어땠나. 

"너무 잘 구축돼 있었다. 2m 넘는 철조망에 틈이 보이지 않았다. 한국군 초소에 도움을 요청하려면 또 험난한 산길을 가야 했다. 그냥 몸으로 부딪쳐 빠져나가기로 했다. 가시에 긁혀서 얼굴에 피가 흐르고 군복이 찢어지고 난리였다. 간신히 넘어와 10여 분간 포장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걸어갔다. 드디어 한국군이 근무하는 GOP 대기 초소가 눈에 띄었다. 오전 10시쯤, 탈출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 지 18시간여 만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GOP 초소를 발견하고 만감이 교차했을 듯하다. 

"'가면 살려주겠구나' '나를 때리진 않을까'라는 등 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GOP 근무병들이 남한 드라마 속 등장인물 같은 억양으로 얘기할지도 궁금했다." 

김씨는 천천히 걸음 소리를 줄여가며 초소로 향했다. 당시 합참 기록에 따르면, 초소 근무병 2명은 '미상 물체'를 포착하고 중대 상황실에 보고했다. 이어 급파된 추가 인원 4명과 함께 김씨에게 접근해 귀순을 유도했다. 

같은 북한군 출신 정하늘씨(28)와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김강유씨ⓒ유튜브 '북시탈tv' 영상 캡처

"잘 왔다…북한 사람에 대한 편견 없애고파" 

간단히 상처 부위를 치료한 김씨는 안대를 끼고 국가정보원으로 이동해 조사를 받았다. 김씨는 "조사 과정에서 무지막지한 철책을 대체 어떻게 넘었는지를 두고 특히 많은 질문을 받았다"고 말했다. 조사받기 전 샤워를 하면서 느낀 행복감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피로와 스트레스가 심했을 텐데. 

"국정원 직원들이 일단 씻으라고 하며 새 옷을 가져다줬다. 계속 굶은 상태였고 몸과 마음도 지쳐 있었다. 샤워실에서 비로소 자유, 행복감 등을 만끽했다. 샤워기를 통해 뜨거운 물이 쫙 흘러내리자 온몸이 다 녹아내리는 듯했다. 온수와 눈물이 뒤섞였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저녁식사 시간이 아니라 식당에서 밥 대신 라면을 줬다. 3개 분량의 라면을 김치, 장조림 등과 함께 순식간에 다 먹었다. 행복했다." 

이후 통일부 산하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하나원)를 거쳐 한국 사회로 나왔다. 그동안 어려움은 없었나. 

"나름대로 잘 적응해 살고 있지만 늘 외로운 것은 어쩔 수 없다. 탈북민 중 평양 출신은 그리 많지 않아 남한 정착 초기 아는 사람이 전무했다.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기가 너무 싫었다."

남북 간 문화 차이도 큰 게 사실이다. 

"한국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 어려운 점이 많았다. 더 큰 문제는 내 안의 오해와 편견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 의식해 사람 많은 곳에서 휴대폰 통화도 제대로 못 했다. 한참 후에야 극복했다." 

어떻게 극복했는지 알려 달라. 

"남한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과 친해져 얘기해 보니 그들에게서 오해나 편견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전화 역시 '대부분 내 억양이나 통화 내용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한 뒤부터 자신 있게 한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비전이 있다면. 

"일단 강의와 유튜브 채널 운영을 더 열심히 할 생각이다. 아직 대한민국 국민 중에는 탈북민을 한 번도 못 만나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들에게 '북한 사람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대화가 통하고 고민하는 지점이 비슷하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다." 

통일에 관한 생각은. 

"북한에서도 '통일은 우리의 숙명'이라고 교육받긴 했지만, 남한에서 몇 년 살다 보니 준비 안 된 통일은 안 하느니만 못한 것 같다고 느낀다.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의 틀, 시민의식 등을 갖추고 있다. 북한은 다르다. 압제 속에서 생존을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할 수 있는 사고방식이 지배하고 있다고 본다. 북한 사람들이 외부 세계와의 접촉면을 늘리며 조금씩이라도 바뀌어가고, 남한 사람들도 북한 사람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면 통일 후 부작용이 적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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