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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가 먼저 변해야 후원도 이어질 것"

김용희 입력 2021. 06. 14. 05:06 수정 2021. 06. 15.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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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떨리는 순간이었죠."

27일 광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만난 홍인화(56) 연구실장은 1988년 5월15일 <한겨레> 창간호를 받아본 느낌을 이렇게 기억했다.

"2012∼2014년 시의원을 할 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갬코 사기 사건'을 <한겨레> 지역면에서 꾸준히 다룬 덕에 진실규명위원장을 맡아 전모를 밝힌 적이 있어요. 5·18 또한 피해와 진상을 밝히는 데 <한겨레> 의 지속 보도가 큰 역할을 했고요. 중앙 언론사이지만 지역민의 숨통을 틔워주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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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벗][한겨레 벗] 홍인화 5·18기록관 연구실장
결혼자금으로 '한겨레' 주식 사
광주서 배달사원·지국장 활동도
"지역민 숨통 틀 공간 늘려주길"
27일 광주광역시 동구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홍인화 연구실장이 <한겨레> 배달사원과 지국장 일을 했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살 떨리는 순간이었죠.”

27일 광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만난 홍인화(56) 연구실장은 1988년 5월15일 <한겨레> 창간호를 받아본 느낌을 이렇게 기억했다. 홍 실장은 “<한겨레>라는 신문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흥분되는 일이었다. 만족스럽지 못했던 기성 언론을 대신한 민족정론지가 생겼다는 생각에 매우 기다려진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고1 때이던 1980년 5월21일 옛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집단 발포를 목격했다. 무서운 마음에 도망을 쳐 집에 왔지만 부상자를 외면했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 광주 상황을 왜곡 보도하는 언론에는 분노했다. 전남대로 진학한 홍 실장은 5·18 경험을 바탕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들고 방학 때면 위장취업을 해 열악한 노동 현실을 몸소 겪었다. 홍 실장은 “대학 1학년 겨울방학 때 부산의 나이키(스포츠 브랜드) 하청공장으로 친구 3명과 위장 취업했다. 들어가기 전 잔뜩 노동법을 공부하고 갔는데 현실은 법과 떨어져 있었다. 압축기에 끼어 손가락, 손, 다리를 잃은 직원들이 많았다. 나를 포함해 위장 취업한 4명 중 제대로 월급을 받은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고 말했다.

졸업 뒤에는 광주 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에 있는 ‘한국기독교장로회청년회’(기청) 사무실에서 부총무로 일하다가 1987년 6월 항쟁을 맞았다. 그는 6·29선언을 앞두고 또다시 계엄령이 선포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홍 실장은 속으로 ‘이번에는 목숨을 걸어야겠다’고 다짐했다.

1987년 10월 <한겨레>가 창간 준비를 하며 국민주주를 모집할 땐 드디어 국민을 대변하는 민족정론지가 생겼다고 좋아했다. 그는 부모님이 자신의 결혼자금으로 모아놓은 500만원으로 <한겨레> 주식을 샀다. “이익을 바라지 않은 후원이었지만 어머니한테는 사실대로 말씀을 못 드렸죠. 그때는 주식시장이 호황이었으니까 부모님한테는 ‘투자한다는 개념’이라고 설득해 돈을 받았어요. 지난해 처음으로 주주배당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분이 좋았어요.”

홍 실장은 <한겨레> 구독이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일”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신문에 대해 알고 싶어 광주 서광주지국에 배달총무로 입사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 9시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수백부를 돌렸다. 힘들기보다는 신나는 일이었다. 고 송건호 사장으로부터 우수 사원상을 받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성으로는 처음 광남지국 지국장을 맡았다. “광남지국은 당시 아파트가 없는 백운동, 월산동, 사직동 일대를 관할하다 보니 배송이 힘들어 아무도 지국장을 안 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하겠다고 했죠. 지국장을 하면서 배달사원 복지에 신경을 썼어요. 월급을 다른 지국의 두배 수준으로 주고, 숙식도 제공했어요.” 홍 실장은 결혼 뒤 1990년 초반 자녀가 생기면서 지국 일을 그만뒀다.

그는 누구보다도 <한겨레>에 애정이 있다고 자부했지만 최근에는 실망감도 많이 느꼈다고 한다. 점차 줄어드는 지역면 배정, 날카로움이 사라진 정권 비판은 국민 마음을 대변해줬던 초창기 시절을 그립게 한다고 했다. “2012∼2014년 시의원을 할 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갬코 사기 사건’을 <한겨레> 지역면에서 꾸준히 다룬 덕에 진실규명위원장을 맡아 전모를 밝힌 적이 있어요. 5·18 또한 피해와 진상을 밝히는 데 <한겨레>의 지속 보도가 큰 역할을 했고요. 중앙 언론사이지만 지역민의 숨통을 틔워주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새롭게 시도하는 ‘후원회원제’에 대해서는 “독자의 자발적 후원에 기대기보다는 <한겨레>가 먼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다수의 국민을 아우르려고 보편타당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진보 지식층이 민주세력의 속을 시원하게 했던 창간 때로 돌아가 다시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면 후원은 자연스레 이어질 겁니다. 신문이 위기의 시대를 맞았지만 아직 <한겨레>를 사랑하는 국민이 있기에 희망은 보입니다.” 글·사진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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