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안철수가 2021년 윤석열에게

성한용 2021. 6. 20.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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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용의 정치 막전막후]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383
"지지율을 온전한 지지라고 생각하면 교만
온전히 정치하라는 뜻으로 착각해도 곤란"
'국민이 불러서 나왔다'는 소명론, 통할까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말과 행동이 연일 정치 뉴스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차기 대선주자 후보 지지도 여론조사에서 이재명 경기지사와 앞자리를 다투고 있으니 그럴 것입니다.

윤석열 전 총장의 정치에 대한 관점은 매우 독특합니다. 최근 그의 발언에서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국민이 불러서 나왔다”는 소명론입니다.

윤석열 전 총장이 직접 기자에게 말했거나 그가 한 것으로 확인된 몇몇 발언을 소개하겠습니다. 소명론이 어떻게 녹아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 같다. 설명을 들어보니 이해가 가더라. ‘내가 처음부터 정치하겠다고 한 게 아니지 않으냐. 난 국민한테 소환돼서 나왔다. 그러니 날 소환한 국민이 가리키는 길로 가야 하는 것 아니냐. 국민의 열망과 바람에 따라 할 것’이라는 게 윤 전 총장의 말이다.”(6월 6일 친구 이철우 교수 전언)
기자: “국민의힘 입당 검토 중이라고 전해집니다. 입당은 언제 하실 겁니까?”
윤석열 전 검찰총장: “거기에 대해선 제가 아직…. 오늘 처음으로 제가 이렇게 나타났는데 제가 걸어가는 길을 보시면 다 아시게 되지 않겠습니까.”
기자: 대권 도전과 관련해서 한 말씀 해주십시오.
윤 전 총장: “그것도 제가 우리 국민 여러분들의 기대, 내지는 염려 이런 걸 제가 다 경청하고 다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좀 지켜봐 주십시오.”(6월 9일 우당 이회영 기념관 개관식)
“국민 통합해서 국가적 과제 해결할 수 있는 큰 정치만 생각하겠다. 내 갈 길만 가겠다. 내 할 일만 하겠다. 여야의 협공에는 일절 대응하지 않겠다. 국민이 가리키는 대로 큰 정치를 하겠다.”(6월 17일 이동훈 대변인)
“나는 국민의 부름에 의해서 국민이 기대하는 일을 하기 위해 나온 사람이다. 지금 국민의힘 입당을 거론하는 건 국민에 대한 도리·예의가 아니다. 정치 선언 후 정치 행보(입당 여부 등)와 관련해 각계 계층의 의견, 국민 말씀을 먼저 경청하는 게 도리다. 그런 뒤 어떤 식으로 정치 행보를 할 것인지 결정하겠다. 이게 국민에 대한 예의다. 대선 출마는 국민에 대한 봉사와 일이다. 대한민국 공직자라면 싫건 좋건 국민이 일을 맡기고 하라고 하면 거기에 따르는 게 맞다. 지금 그 길을 따라가는 중이며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나조차 모른다.”(6월 18일 <중앙일보> 통화)

어떻습니까? 정치인이 소명론에 치우치면 위험합니다. 신념윤리에만 치우쳐 책임윤리를 방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인은 종교인이 아닙니다. 세속의 일을 다루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욕망과 갈등을 조정해 공동체의 안위와 발전을 도모해야 합니다. 그 대가로 정치인에게 돌아가는 것은 권력과 명예입니다. 정치인이 ‘욕심 덩어리’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 6월 9일 오후 열린 서울 남산예장공원 개장식에 참석하기 앞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의 뜻에 따라 나왔을 뿐 나는 아무런 욕심이 없다”고 말하는 정치인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사실은 정치인이 아닙니다. 윤석열 전 총장은 어디에 해당할까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도 10년 전에 정치를 시작하면서 소명론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2012년 <안철수의 생각> 여는 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자고 일어나보니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2011년 9월 2일이었다. 전날 밤 나의 서울시장 출마 결심이 임박했다는 기사가 한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고, 그다음 날 서대문구청에서 열린 청춘콘서트 현장은 취재진으로 아수라장이 됐다. 눈앞에서 그처럼 많은 플래시가 터지는 것은 생전 처음 봤다.

책 내용에서 제정임 교수의 질문과 안철수 원장의 답변은 이렇게 진행됩니다.

질문 :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말씀이시네요?

답변 : 많이 놀랐습니다. 국민들의 갑갑함을 풀어주지 못하는 정치 현실에 대한 실망이 저에 대한 기대로 모아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분이 ‘안철수 현상’이라고 이름을 붙였던데요, 사람들 눈에 ‘구체제’라고 느껴지는 것들, 즉 국민의 생각을 반영하지 못하는 정당과 계층 이동이 차단된 사회구조, 빈부 격차가 심화되는 경제시스템 등을 극복하고 희망을 줄 수 있는 ‘미래 가치’를 갈구하는 민심이 그런 형태로 나타난 것 아닐까요? 제 자신이 부족하고 준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런 열망을 간단히 뿌리치기도 어렵다고 느꼈습니다. ‘과연 내가 이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죠.
저는 지금까지 인생의 큰 전환기마다 ‘내가 우리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에 얼마나 보탬이 될 수 있을까’를 판단 기준으로 삼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이런 맥락에서 정치에 직접 뛰어들어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든, 혹은 직접 나서지 않아도 기성 정치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든, 국민의 열망을 대변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책임감을 느꼈어요. 제가 정치에 참여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제 욕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질문 : ‘주어지는 것’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답변 : 정치하는 분들은 나라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뜻을 세우고 세상에 밝힌 다음에 그를 토대로 지지를 얻고 추진력을 받게 되지 않습니까? 그게 정상적인 과정이겠죠. 그런데 제 경우는 정치를 하겠다고 결심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레 사람들의 기대를 받게 된 것이죠. 이런 상태의 지지율을 온전히 저에 대한 지지라고 생각하면 교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스스로 정치 참여를 선언한 뒤 이 정도의 지지율이 나왔다면 물론 더욱 열심히 해야겠죠. 그러나 지금 저에 대한 지지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만의 표현, 저에 대한 적극적 지지와 소극적 지지 등 여러 가지가 섞여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 시민들의 열망을 무시할 수도 없지만 이를 온전히 정치하라는 뜻으로 착각해도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만약에 제가 정치를 하게 된다면 과연 그 기대와 열망에 어긋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 도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지지하시는 분들의 뜻을 정확히 파악해야 저의 진로를 결정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떻습니까?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며 안철수 원장이 타임머신을 타고 10년 뒤로 날아와 윤석열 전 총장에게 조언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상태의 지지율을 온전히 저에 대한 지지라고 생각하면 교만”, “지금 저에 대한 지지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만의 표현”, “이를 온전히 정치하라는 뜻으로 착각해도 곤란하다는 생각” 등 몇 대목이 정확히 지금 윤석열 전 총장에게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철수 원장 자신은 이 책을 쓴 이후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고 파란만장한 세월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정치인으로 과연 최후의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요?

사실 안철수 대표와 윤석열 전 총장은 소명론 이외에도 여러 가지 닮은 면이 있습니다.

첫째, 공정을 핵심 가치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안철수 대표는 2017년 대선 공약집에서 공정을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공정하고 투명한 입시제도 개선’, ‘공정 성장의 기초, 경제개혁’, ‘공정과 상생 기반의 건강한 미디어 세상’ 등입니다. 안철수 대표는 2012년에도 ‘삼성동물원’, ‘엘지동물원’을 비판하며 “경쟁 과정에서 특권이나 반칙을 허용하지 않고 공정한 규칙이 지켜지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윤석열 전 총장은 엘에이치 사태가 터지자 “이 나라 발전의 원동력은 공정한 경쟁이고 청년들이 공정한 경쟁을 믿지 못하면 이 나라 미래가 없다. 어려울 때 손잡아주는 지원책도 꼭 필요하지만 특권과 반칙 없이 공정한 룰이 지켜질 거라는 믿음을 주는 게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했습니다.

안철수 대표도 공정, 윤석열 전 총장도 공정,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도 공정을 주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세 사람의 공정은 같은 것일까요, 다른 것일까요? 공정은 보수의 새로운 가치일까요, 그냥 이 시대의 유행어일까요? 무척 궁금합니다.

둘째, 반정치주의입니다.

우리 유권자들은 기본적으로 기성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반감이 있습니다. 새로운 정치인의 등장에 환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거 정주영·고건·문국현·반기문 등 비정치인들이 돌풍을 일으켰던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안철수 대표는 2012년 ‘반박근혜-비문재인’ 성향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윤석열 전 총장은 지금 ‘반문재인’ 성향 유권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정치주의를 타고 정치에 진입한 사람은 곧바로 신선도가 떨어지며 지지도가 낮아집니다. 정치를 시작하는 순간 정치인이 됐기 때문입니다. 반정치주의의 역설입니다.

안철수 대표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윤석열 전 총장도 본격적으로 정치를 시작하면 곧바로 인기가 떨어지는 역설적 상황을 맞게 될 것입니다.

셋째,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스타일입니다.

두 사람 모두 중요한 순간에 결단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도 정치인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안철수 대표는 한때 별명이 ‘간철수’였습니다. 결정적인 문제를 앞에 두고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윤석열 전 총장의 별명 중에 ‘윤차차’라는 것이 있습니다. “차차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을 자주 해서 붙은 별명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두 사람은 내년 3월 대선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입니다. 윤석열 전 총장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 어떤 식으로든 격돌하게 될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국민의힘에 입당해서 국민의힘 대선 후보 자리를 놓고 싸우게 될지, 국민의힘 경선이 끝난 뒤 야권 후보 단일화 국면에서 싸우게 될지, 아니면 내년 대통령 선거 본선에 각각 출마해서 겨루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국민에 의해 불려 나온’ 두 사람의 싸움은 누구의 승리로 끝날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야권의 대선주자 경쟁과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짚어볼 대목이 있습니다.

최재형 감사원장이 곧 감사원장을 그만두고 대선 출마를 선언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최재형 원장은 평생 판사를 하다가 문재인 대통령이 감사원장으로 발탁한 사람입니다. 그를 잘 아는 친구들은 “전형적인 판사 체질이기 때문에 정치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국민의힘 안에서 윤석열 전 총장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정치인들, 그리고 윤석열 전 총장 한 사람만으로는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야당 지지층이 최재형 원장을 대선주자로 ‘호출’하고 있습니다. 최재형 원장이 이런 호출에 응답할까요?

만약 최재형 원장이 대선주자로 나서게 된다면 윤석열 전 총장에 이어 법조인에서 대선주자로 곧바로 나서는 또 한 사람이 출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법조인이 곧바로 대선에 도전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서 법조인과 정치인에 대한 개념을 조금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노무현 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은 법조인 출신 정치인입니다. 국회의원을 했기 때문입니다. 홍준표 의원도 그런 의미에서는 법조인이 아니라 법조인 출신 정치인입니다. 황교안 전 대표도 법무부 장관, 국무총리, 정당 대표를 했으니 정치인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정치에는 율사가 너무 많아요. 그들은 항상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사람들인데, 그것만으로는 그다음 단계가 뭔지 알 수 없어요. 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율사들은 실제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본 경험이 없어요. 그들은 판단을 내리는 것이 직업이니까요.”

누가 한 말일까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2019년에 쓴 <공정한 경쟁>의 한 대목입니다. 저는 이준석 대표의 이 말에 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사상 최초로 ‘법조인 대통령’이 출현할 것인지가 내년 대선을 앞두고 또 하나의 관찰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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