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있는 삶' 내달 완성.. '돈 없는 저녁' 마지막 퍼즐은 남았다

김경준 2021. 6. 24.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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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장시간 근로국 중 근로시간 감소폭 최대 불구
"근로시간 단축, 고용 효과 미미" 지적도
대·중소기업 양극화 해결하려면 유연한 대처 필요
주 52시간 근무제는 한국의 고질적인 장시간 근로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이지만, 상황이 다른 대·중소기업의 고려 없이 일괄적으로 적용할 경우 근로시간 및 임금 등에서 양극화를 가속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 대기업 사무직 A씨의 삶은 2018년 7월 주 52시간 근무제(52시간제)가 시행된 이후 크게 달라졌다. 팀장의 눈치를 보며 퇴근시간을 재던 일은 과거가 됐다. 이젠 일을 더 하고 싶어도 회사 시스템이 알아서 꺼진다. 근무 시간은 줄었지만 월급은 그대로다. 가족들과 저녁을 먹는 날도 많아졌다. A씨는 퇴근 후 골프 레슨도 시작했다.

#. 제조업 생산라인 근무자 B씨는 52시간제가 그다지 달갑지 않다. 그가 다니는 중소기업은 작년 1월부터 52시간제가 적용됐다. 월급이 아닌 시급제로 급여를 받던터라, 코로나19 여파로 생산라인 가동시간이 줄자 작년엔 3인 가족 생계를 유지하기도 팍팍했다. 최근 경기가 살아나며 회사에 주문 물량은 늘고 있지만, 52시간제 때문에 수당이 붙는 야간 작업과 휴일 근무는 제한된다. B씨는 20% 이상 줄어든 수입을 메우기 위해 투잡을 고민 중이다.

문재인 정부의 대표 노동공약이었던 주 52시간 근무제가 다음 달 1일 50인 미만 사업장에까지 확대되면서 3년간의 단계적 적용을 완료하게 된다. '세계 최장시간 노동 국가'라는 오명에선 차츰 벗어나고 있고, 많은 직장인에겐 예전보다 '저녁이 있는 삶'이 좀 더 보장되는 분위기다.

다만 앞선 사례처럼 대기업 사무직과 중소기업 생산직 노동자의 현실은 아직 크게 다르다. 52시간제의 '형식적 완성'을 넘어 이제 '실질적 정착'을 향해 새 걸음을 내디뎌야 할 때라는 지적이 나온다.


연간 노동시간 1000시간대로

23일 정부와 관련 업계 등에 따르면, 52시간제 시행 이후 한국의 노동시간은 차츰 줄어들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상위권이던 장시간 근로 통계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2017년 기준 한국의 연평균 실제 근로시간(2,018시간)은 멕시코(2,148시간)에 이어 2위였다. 하루 8시간 근무를 기준으로 하면 미국(1,778시간), 일본(1,709시간) 등보다 연간 30~38일가량을 더 일한 셈이다. 노동시간이 가장 적었던 노르웨이(1,381시간)보다는 무려 80일을 더 일했다.

하지만 300인 이상 사업장에 52시간제가 적용된 2019년 한국의 근로시간(1,967시간)은 51시간 줄었다. 연간 2,000시간 노동의 벽을 허문 것이다. 근로시간 상위권 국가인 멕시코(11시간), 그리스(8시간)보다 연간 일하는 시간은 크게 줄었다. 주 53시간 이상 취업자 비율도 2017년 19.9%에서 지난해 12.4%로 감소했다.

이 밖에도 긍정적인 변화들이 감지되고 있다. 통계청의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7년 대비 2019년의 근로시간 만족도는 28%에서 34.5%로 6.5%포인트 증가했다. 국회 사무처 조사에서는 국민이 뽑은 20대 국회의 좋은 입법(사회문화환경 분야)에서 52시간제가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OECD 내 순위는 여전히 멕시코에 이은 2위다. 임시·일용직을 제외한 상용 근로자만 따졌을 때도 멕시코와 칠레에 이은 3위에 그쳤고, 여전히 OECD 평균보다는 300시간 이상 더 일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52시간제 효과는 0.0078시간? "근로감독 한계" 지적도

이 같은 성과에도, 52시간제의 실제 효과는 미미하다는 반론도 높다. 지난해 말 한국노동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6월과 2019년 6월을 비교했을 때 52시간제는 총 근로시간 중 0.0078시간을 단축시킨 데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52시간제로 기대됐던 고용 창출 효과도 미미했다.

보고서를 작성한 남재량 선임연구위원은 "강제적인 근로시간 단축은 실질적인 근로시간을 줄이는 데 적어도 단기적으로 그리 효과적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이보다는 근로자의 생산성 향상 및 이를 위한 환경 조성 등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진단했다.

52시간제 준수 여부가 제대로 감독되고 있는지도 아직 논란거리다. 최근엔 네이버와 카카오 등 정보통신(IT) 대기업에서 52시간 위반 정황이 포착되기도 했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대규모 건설현장 투입 인력은 1만 명 이상인데, 이들의 근로시간을 일일이 관리·감독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게다가 이들은 대부분 시급제로 일하기 때문에 연장근로 및 야간·휴일 수당 등이 큰 몫을 차지해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은 돈을 벌기를 원한다"며 "허위로 근무 시간을 맞추는 사례도 비일비재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한편에선 좀 더 효과를 지켜봐야 한다는 신중론도 제기된다. 조사 기간이 2019년까지로 300인 이상 사업장에 국한되며, 전체 노동자의 80% 이상이 속한 중소기업 사례는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법정 근로시간 주 40시간제 도입 전후 10년간을 비교하면 주당 근로시간은 50.4시간에서 43.9시간으로 줄고, 일자리는 267만 개나 늘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근로시간 단축이 고용 창출 효과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근로시간 양극화 해결해야"

52시간제는 시스템이 잘 갖춰진 대기업과 주문 납기를 맞춰야 하는 하청 중소기업의 상황이 서로 달라 양극화 문제를 낳을 것이란 우려가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중소기업계에서 52시간제 적용 유예 주장이 더 크게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당분간은 유연한 법 적용과 정부의 과감한 지원을 통해 양극화 해소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김용춘 한국경제연구원 고용정책팀장은 "선진국도 주단위 근무시간 제한을 두는 경우 일 단위 제한은 없애는 식으로 유연하게 적용하고 있다"며 "한국은 주단위, 일단위 모두 상한 근무 시간을 지정하고 있는데, 기업이 상황에 맞게 대처할 수 있도록 숨통을 틔워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주 64시간까지 허용되는 탄력적 근로시간제 적용 기간 역시 외국은 1~3년으로 폭넓게 인정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6개월로 한정돼 있다. 6개월 내에서 근무 시간을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되 평균 근로 시간은 주 52시간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몰아치기 업무를 할 수 있는 기간은 3개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정부의 보조금 지원도 막막한 중소기업들엔 단비가 될 수 있다. 김 팀장은 "노동력 부족에 따른 추가 채용 시 지원금을 더 늘리면, 당장 중소기업의 숨통을 틔울 수 있다"며 "스마트워크 시스템 지원 등으로 생산성 향상 방안을 돕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경준 기자 ultrakj7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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