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국보' 칠지도는 408년 백제 전지왕이 왜왕에 하사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 선임기자 2021. 6. 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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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칠지도에 앞면. 새겨진 명문의 제작연대는 ‘태화(泰和)4년(369년) 5월 16일’ 이라는게 정설이었지만 제작일자가 ‘5월’이 아니라 ‘11월’이라는 X선 촬영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 연호인 ‘태화’가 아니라 백제 전지왕의 연호인 ‘봉원’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명문에는 칠지도를 ‘제후국 왕(후왕·諸侯)에게 줄 만하다’는 내용이 들어있다.|사진은 이소노카미 신궁 홈페이지, 판독은 홍성화·박남수씨 제공


일본 나라현(奈良縣) 뎬리시(天理市)의 이소노카미 신궁(石山神宮)에는 예부터 내려오는 신비한 이야기가 있었다. 출입금지 지역인 ‘금족지(禁足地)’ 안의 남서쪽에 설치된 신고(神庫·보물창고)에 ‘육차도(六叉刀·여섯 가지의 검)’를 모신 특수상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스가 마사모토

그런데 1873년 신궁의 주지로 취임한 스가 마사토모(혹은 간 마사스케·菅政友·1824~1897)가 그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심하게 슬어있던 육차도의 녹을 칼로 긁어낸 스가는 녹 사이에서 반짝거리는 금빛 글자를 보았다. 예리하게 파낸 뒤 금을 밀어넣어 새긴 이른바 금상감(金象嵌) 기법의 글자들이었다. 녹을 긁어내자 앞면에 34자, 뒷면에 27자 총 61자의 글자가 보였다. 앞면에는 육차도가 만들어진 내력과 제작한 연·월·일이 새겨져 있었다. ‘육차도’에는 몸체의 좌·우에 어긋나게 양날을 가진 각 3가닥씩의 가지가 있었다.

명문은 다음과 같이 판독됐다. 앞면은 ‘태○4년 ○월16일 병오 정양 조련강 칠지도 ○백병 의공공제후왕 ○○○○작(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鋼七支刀○百兵宜供供侯王○○○○作)’ 등 34자, 뒷면은 ‘선세이래 미유차도 백제왕세자 기생성음 고위왜왕조 전시후세(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등 27자였다. 그중 맨처음 글귀, 즉 황제 혹은 국왕의 연호인 듯한 ‘泰○四年(태○4년)~’이 핵심문구였다.

칠지도 뒷면. “백제왕세자가 왜왕 지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라”는 요지의 내용으로 읽을 수 있다.|사진은 이노소카미 신궁 홈페이지에서, 판독은 홍성화 교수·박남수 연구원


■“백제가 헌상했다”

일본 학계는 중국 동진 시대(317~419)의 명문 유물 중 ‘태(泰)’자가 종종 ‘태(太)’자로도 쓰이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따라서 ‘泰○’로 시작되는 명문은 ‘太和(태화) 4년’, 즉 369년이라는 것이다. ‘태화’는 동진의 해서공(재위 365~371)의 연호(366~371)이다. 일본학계는 이 ‘369년 설’에 집착한다.

그들은 “왜국이 신라를 쳐서 가라제국을 평정했고, 침미다례를 함락하여 백제에 주었고”, “백제가…왜왕에게 칠지도(七枝刀) 1자루와 칠자경 1면 등 여러 보물을 바쳤다”는 <일본서기>(369·372년) 기록을 인용한다. 일본학계는 이소노가미 신궁의 ‘육차모’가 <일본서기>가 언급한 바로 그 ‘칠지도’라 여겼다. 칠지도는 가지가 6개인 것 같지만 몸체 상부의 칼날까지 합하면 가지칼은 7개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칠지도’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학계는 이것을 일본이 고대 한반도의 남부지방을 지배하고 식민지로 삼았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물증으로 삼았다. 그래서 칠지도의 ‘태화 4년(369년)’설을 정설로 여긴 것이다.

2004년 일본 나라(奈良)국립박물관에서 열린 ‘칠지도와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의 신보(神寶)’ 특별전에 출품된 ‘칠지도’. 일본학계는 “372년 백제가 칠지도와 칠자경을 일본천황에 바쳤다”는 <일본서기> 기록을 근거로 백제 헌상설을 주장해왔다. |연합뉴스


■“백제가 제후왕인 왜왕에게 하사했다”

반면 한국학계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런데 1963년 북한 학자 김석형(1915~1996·김일성대 교수)이 처음으로 ‘백제 헌상설’을 뒤집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김석형은 “칠지도는 5세기대 고유 연호(태화)를 쓰며‘황제’를 칭한 백제왕이 제후국왕(후왕·侯王)의 위치에 있던 ‘일본에 있는 소국의 백제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칠지도 논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결은 다르지만 남한에서도 두계 이병도(1896~1989)가 호응했다. 이병도는 1976년 “‘태화’는 백제의 고유의 연호가 분명하고 백제 왕세자가 하위자인 왜왕에게 내린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국시대 금석문에서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예가 한번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사실 <삼국사기> 등에서 고구려가 연호를 썼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광개토대왕비문’에는 분명히 ‘영락(永樂)’ 연호를 쓰고 있다. ‘신라 진흥왕 순수비’에도 ‘태창(太昌)’ 연호와 황제를 뜻하는 ‘짐(朕)’자가 들어있다. 백제의 경우 연호 사용례를 찾기 어렵지만 ‘무령왕릉 지석’에 황제에게만 쓰는 ‘붕(崩)’자가 보인다. 5~6세기 삼국이 독자성과 주체의식을 드러내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칠지도가 제작됐다는 369년 무렵이면 백제 근초고왕 시대이다. 바로 그해, 즉 369년(근초고왕 24년) 고구려군 5,000여명을 격파했고, 371년(근초고왕 26년)에는 평양성에서 고구려 고국원왕(331~371)을 죽였다. 마침 “369년 근초고왕이 한수(한강) 남쪽에서 군사를 사열하면서 황색 깃발을 사용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눈에 띈다. 황색은 전통적으로 황제를 상징하는 색깔이다. 근초고왕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황제국’임을 만천하에 과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게 절정기를 구가하던 백제가 일본의 야마토 정권에 칠지도를 만들어 바친다는 것은 망발처럼 들린다. 게다가 명문은 ‘칠지도를 만들어 ‘후왕’인 ‘왜왕’에게 하사했으니(宜供供侯王) 그것을 후세에 널리 알리라(傳示後世)는 식으로 나열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백제 헌상설’이든, ‘하사설’이든 ‘제작연대=369년, 일본 전달 연대=372년’설이 지금까지 정설로 굳어졌다.

X선 촬영결과와 최근의 연구성과를 반영한 판독문. 기존 정설은 ‘태화 4년 5월16일’이었으나 ‘5월’이 아니라 ‘11월(혹은 12월)’이라는 X선 촬영결과가 제시되고, 연호도 ‘태화 4년’가 아니라 ‘봉원(奉元) 4년’으로 읽히며, ‘봉원 4년’은 중국 연호가 아니라 백제 전지왕 4년(408년)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됐다. 칠지도 명문은 ‘칠지도를 후왕(候王·제후국 왕)에게 나눠줄만 하고, 백제왕세자가 왜왕을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라’는 골자로 읽을 수 있다. |한성백제박물관의 특별전 도록 ‘백제왕의 선물’, 2016에서 정리


■十(십)…새롭게 판독한 명문의 정체

그런데 학계가 주목하지 않은 연구가 이미 40년 전 진행된 바 있다.

즉 1981년 일본 NHK가 칠지도를 촬영한 X-선 촬영 사진에서 흥미로운 글자가 보인 것이다. 즉 명문의 앞머리 부분인 ‘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에서 ‘년(年)’자와 ‘월(月)’자 사이에 보이는 글자가 기존에 판독했던 ‘오(五)’가 아니라 ‘십(十)자’가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1996년 일본학자 무라야마 마사오(村山正雄)가 펴낸 <칠지명문도록>에는 1977~78년 찍은 확대사진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십(十)자 밑에 일(一)자가 보였다. 물론 일(一)이 아니라 이(二)일 수도 있다. 한마디로 칠지도는 ‘태○4년 11월(혹은 12월)16일 병오(丙午)’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학계는 새로운 판독글자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왜냐면 제작월이 5월인지, 11월(혹은 12월)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기존 학계의 판독대로 ‘태○4년 ○월 16일 병오(丙午)’에서 ‘○월’을 ‘오(五)월’로 보면 ‘369년 5월16일 병오’여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369년 5월16일의 일간지는 ‘병오’가 아니라 ‘을미’이다.

하지만 일본학계는 개의치 않았다. 틀릴 수 있다고 봤다. 그들은 중국 후한의 사상가 왕충(27~104)이 “의기 등을 주조할 때의 길일은 화기(火氣)가 강한 ‘5월 병오일’”(<논형>)이라고 설명한 것을 인용했다.

따라서 다른 날 주조했어도 그냥 길일인 ‘5월 병오’에 주조했다고 새겨넣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운수좋으라고 새겨넣은 문구’라 해서 ‘길상구’라 한다.

일본학계는 한나라 시대 청동거울에서 일간지가 일치하지 않은 사례를 찾아냄으로써 ‘칠지도 명문의 일간지 불일치’를 설명했다. 그래서 X선 판독으로 ‘5월 병오’가 아니라 ‘11월(12월) 병오’라는 결과가 나왔지만 은근 슬쩍 넘어간 것이다. 내심으로는 <일본서기> 기록을 근거로 줄기차게 주장해온 ‘369년 제작, 372년 헌상설’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우려한 측면도 있겠다.

최근 박남수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연호로 추정되는 칠지도 첫머리 글자를 ‘봉원(奉元)’으로 읽었다. 홍성화 건국대 교수와 박남수 연구원 등은 칠지도가 408년(전지왕 4년) 제작되어 후왕(제후)에게 내려줬다고 해석했다.


■“재수좋으라고 써넣은 길상구라고?”

하지만 과연 ‘칠지도의 일간지 불일치’를 그냥 길상구로 넘길 수 있을까. 견강부회가 아닐까.

12년 전인 2009년 홍성화 교수(건국대 교수)가 전수조사에 나섰다. 즉 중국 한나라, 삼국 및 육조시대에 출토된 명문 거울 133사례를 수록한 <한삼국육조기년경도설>이라는 책을 검토했더니 길일이라는 ‘병오’가 적힌 명문거울은 21사례 뿐이었다. 실제 주조할 때 ‘병오’라는 일간지를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몇 사례에서 실제연대와 일간지가 불일치한 예가 보였다. 하지만 절대 다수가 1년 앞 뒤의 책력을 잘못 보거나, 혹은 하루 차이인 것으로 드러났다.

박남수 동국대역사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도 “제작연대와 일간지가 불일치한 몇몇 경우가 있지만 ‘길상구’ 차원에서 새긴 것은 아니”라고 풀이한다. 즉 그 해당 연도에 역법의 계산방법을 바꾸었던지, 혹은 왕조마다 다른 역법을 썼던지 하는 경우 불일치한 현상이 보인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칠지도의 제작연대와 비슷한 시기인 육조시대(229~589) 이후의 명문 거울에서는 일간지와 실제연대가 불일치하는 경우는 없었다.

한마디로 ‘길상구’ 차원에서 실제 제작년월일과 다른 일간지를 새겨넣었다는 것은 견강부회라 할 수 있다.

‘369년설’을 고수하려는 일본학계의 안간힘을 한국학계도 별다른 비판의식없이 답습해왔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등에는 삼국이 독자 연호를 썼다는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썼고, 백제의 경우 연호를 사용했다는 금석문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무령왕 지석’에 황제의 죽음을 표현한 ‘붕(崩)’자가 새겨져 있다. 삼국이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408년 11월16일(전지왕 4년) 병오가 맞다”

그렇다면 어떻게 봐야할까. 최근들어 정설로 굳어진 ‘369년설’ 깨기에 나선 연구자들이 있다.

X선에서 새롭게 읽힌 ‘태○4년 11월(혹은 12월) 16일 병오’ 문구를 주목하자는 것이다.

홍성화 교수는 칠지도 제작연도로 추정되는 4~6세기에 한정해서 11월16일이나 12월16일의 병오 간지에 해당되는 날을 찾았다. 그랬더니 11월16일은 ‘408년(전지왕 4년), 439년(비유왕 13년), 501년(무령왕 1년), 532년(성왕 10년)’이었고, 12월16일은 ‘413년(전지왕 9년), 537년(성왕 15년), 563년(위덕왕 10년), 594년(위덕왕 41년)’이었다. 이중 홍교수의 눈에 걸리는 것이 바로 408년(전지왕 4년)이었다.

우선 ‘태○4년’의 ‘4년’과 전지왕 ‘4년’이 일치한다. 그렇다면 ‘태○’는 백제 전지왕의 연호일 가능성이 짙다. 홍교수는 ‘광개토대왕비문’을 떠올렸다. 408년 무렵이면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크게 흔들리던 시기였다. 백제는 396년 고구려의 침공에 58성 700촌을 잃고 “영원한 노객이 되겠다”고 무릎 꿇었다. 그런 백제가 와신상담의 계기로 삼은 것은 왜와의 연합작전이었다.

‘광개토대왕비문’을 보면 고구려의 침공을 받은 백제가 “왜와 화통했다(百殘違誓 與倭和通)”는 기록이 있다. “397년(아신왕 6년) 백제가 태자인 전지를 왜에 볼모로 보냈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아신왕조’ 기록과 부합된다. 전지왕이 태자 시절 일본에서 머물렀다는 얘기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부왕(아신왕)의 서거 이후 귀국해서 왕위에 오른 전지왕은 409년(전지왕 5년) 왜국이 파견한 사신을 맞이한다. 이때 왜국은 전지왕에게 보물로 여겨지는 야명주(밤에 빛나는 구슬)를 바쳤다. 홍성화 교수는 이때를 주목한다.

전지왕이 ‘408년 11월 16일 제작한 칠지도’를 왜국 사신에게 내려준 것이 아닐까. 즉 전지왕은 어려울 때 군대를 파견해준 왜왕을 후왕(侯王)의 지위로 승인하는 차원에서 칠지도를 내린 것이 아닐까. 백제가 지원군을 보낸 왜에 박사 왕인(王仁) 등을 파견한 것(405년)도 같은 칠지도 하사와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명문 중에는 제작의 주체로 ‘백제왕세자’가 등장한다. 전지왕 때의 세자는 구이신왕(재위 420~427)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전지왕’조는 “팔수부인이 구이신을 낳았다”고 기록했다. 학계 일각에서는 전지왕이 태자시절 일본에 머물렀던 것을 주목하고 있다.

이중에는 전지왕의 부인인 팔수부인이 일본 여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연구도 있다. 만약 팔수부인이라는 여인이 왜계라면 칠지도는 구이신이 태어난 것을 왜국에 알리기 위해 제작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왕세자가 부처님의 가호로 귀하게 태어난 것을 왜왕에게 알리려고 칠지도를 만들어 하사하니 후세에 널리 전하라’는 명문을 새긴 것인가. 이것이 홍성화 교수의 추론이다.

칠지도는 1953년 일본의 미술품 부문 국보 제15호로 지정됐다. ‘372년 백제가 일본에 바친 보물’이라는 평가가 컸을 것이다.|일본 문화청 홈페이지


■‘태화4년’이 아니라 ‘봉원4년’이다

지난 18일 열린 ‘동아시아 속 백제문화’ 학술대회(한성백제박물관)에서도 주목할만한 논문 한 편이 발표됐다. 박남수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의 논문(‘백제 전지왕 봉원 4년명 칠지도와 그 사상적 배경’)이었다. 박연구원은 이 논문에서 칠지도의 첫머리 연호를 기존의 ‘태화(泰和)4년’이 아니라 ‘봉원(奉元)4년’으로 판독한 연구결과를 반영했다. 그는 “연호 첫글자는 지금까지는 ‘태(泰)’의 이체자로 인식됐지만 <경전문자변증서>에 따르면 ‘봉(奉)’의 이체자 중 속자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두번째 글자는 판독불명(‘○’)이었지만 ‘태화(泰和·369년)’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화(和)’자로 인식됐다. 그러나 X선 판독사진을 검토한 박남수 연구원은 “이 글자는 ‘원(元)’의 이체자로 보인다”고 말했다.

박남수 연구원에 따르면 ‘봉원’은 백제 전지왕의 연호이며, ‘봉원 4년’은 전지왕 4년(408년)을 가리킨다. 그는 “고대 동아시아에서 즉위 4년의 일간지(병오·丙午)를 만족시키는 사례로 전지왕 4년이 유일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칠지도의 제작일은 ‘전지왕 4년(408) 11월 16일 병오(丙午)’라고 확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지왕은 왜 ‘봉원(奉元)’이라는 연호를 썼을까. 박연구원은 ‘즉위한 임금은 천지를 일으키는 기운을 키우는 것을 받든다(奉元養)’는 <춘추공양전> ‘은공’를 인용했다. 따라서 ‘봉원’은 ‘원(元)을 받든다(奉)’는 의미이며, 전지왕의 ‘봉원(奉元)’ 연호는 “임금은 하늘(天)의 뜻을 계승한다’는 유교적 정치이념에 따라 제정됐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전지왕이 즉위 2년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고, 남단에서 천지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했다. 이 기록이 전지왕이 조상과 하늘신·땅신에게 즉위사실과 연호제정 사실을 알리는 의식을 치렀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대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칠지도 명문의 제작일시, 즉 ‘병오 정양(丙午 正陽)’은 무슨 뜻일까. 박남수 연구원은 칠지도를 제작한 날(병오 정양·11월16일)은 중국 주나라 정월 초하루에 상응하는 동짓날이라는 점을 주목했다. 예부터 이날은 땅에서의 초목의 형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의미로 여겨졌다. 또한 기존에는 명문 중 ‘기생(奇生)’을 백제왕세자의 이름 등 인명으로 보았다. 하지만 박남수 연구원은 “<주역>에서 ‘기생은 기(奇), 즉 양(陽)이 새롭게 자라난다’는 용어”라는 점을 들어 “칠지도의 7가지는 바로 이 주역의 의미를 디자인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일본 뎬리시 이소노카미 신궁의 금족지. 절대출입금지 지역이었는데, 1874년 신궁의 주지로 취임한 간 마사토모가 발굴허가를 받아 취색 곡옥(曲玉) 11점과 대롱옥 293점, 동경 6점, 환두대도 머리파편 등 수많은 유물을 찾아냈다.


■408년설을 소개하는 이유

그렇다면 칠지도의 명문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2016년 한성백제박물관이 ‘백제왕의 선물’이라는 특별전을 열면서 펴낸 도록은 좀 헷갈린다. ‘칠지도’ 설명문을 보면 기존의 통설을 반영한다. 앞면은 “태○4년 5월16일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로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눠줄만 하다. ○○○○제작하다(泰○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철七支刀피百兵宜供供候王○○○○作)”는 내용이다. 뒷면은 “지금까지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 지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라(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는 것이다.

그런데 도록의 ‘사진 판독 자료’를 보면 ‘태○년’은 그대로 두었지만 ‘월’ 부분에서 새롭게 판독된 ‘十’을 먼저 쓰고 괄호안에 ‘五’를 넣었다. 주객이 바뀐 것이다. 그리고 바로 뒤의 글자는 ‘一’로 표기했다.

도록 한 권에서 다른 판독결과를 반영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으로도 심도깊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필자는 최근 408년 제작설을 반영한 최신 연구자들의 판독결과를 제시해본다.

칠지도는 이소노카미 신궁의 금족지 안 남서쪽에 조성한 신고(神庫)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소노카미 신궁 홈페이지에서


“태○4년(전지왕 4년·408년) 11월16일 병오 정양에 백년철로 칠지도를 만들다. 전장에 나아가 능히 백병을 피할 수 있다. 이 칼을 마땅히 후왕에게 제공한다….(앞면) 선세 이래 이런 칼이 없었다. 백제왕세자가 부처님의 가호로 태어났다. 왜왕을 위해 만들 것을 지시하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뒷면)”(홍성화 교수)

“봉원 4년(408년) 11월 16일 병오 정양에 백련철 칠지도를 만드니, (칼이) 나오자마자 백병의 임금으로 후왕에게 주기에 마땅하다….”(앞면) “선세 이래로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의 왕세자가 기생(奇生)의 말씀으로 왜왕을 위하여 지(旨)를 내려 만들었으니, 세(世)에 전하여 보이도록 하라.(뒷면)”(박남수 연구원)

물론 최근 연구성과, 즉 ‘408년설’이 100% 맞는지 과문한 필자는 장담할 수 없다.

다만 1874년 칠지도가 공개된 이후 지금까지 150년 가까이 지났지만 <일본서기>의 기록에 끼워맞춘 ‘369년 제작설, 372년 헌상설’은 여전히 극성을 떨고 있다, 한국학계는 ‘백제 헌상설’이 아닌 ‘하사설’로 무장하고 있지만 일본학계가 쳐놓은 ‘369년’의 틀에서는 좀체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진실 여부를 떠나 좀 논의를 넓혀가야 하지 않을까. 필자가 408년설을 소개하는 이유이다.

<참고자료>

홍성화, <칠지도와 일본서기>, 경인문화사, 2021

홍성화, ‘석상신궁 칠지도에 대한 일고찰’, <한일관계사연구>, 경인문화사, 2009

박남수, ‘백제 전지왕 봉원4년(奉元四年)명 칠지도와 그 사상적 배경’, 동아시아 속의 백제 문화 학술대회 발표논문, 동아시아비교문화연구회, 2021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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