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똑같이 훈련받는 19살 여학생 "K드라마 못 보는 것 딱 하나 아쉬워요"

한겨레 2021. 6. 29.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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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타이 국경 소수민족해방구 르포-하
쿠데타 뒤 세계 첫 소수민족해방군 취재
버마-타이 국경 냐무 본부에서 지난 12일(현지시각) 까레니군에 자원한 신병들이 훈련을 받고 있다. 냐무/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버마-타이 국경 소수민족해방구 르포-상 
 거리 투사였던 버마 신세대, 소수민족해방구로 몰려든다 ▶ https://bit.ly/3y6QPCb

“우리는 까레니 해방 위해 싸운다, 우리는 까레니 독립 위해 싸운다, 날마다, 적을 무찌르고 전진한다, 모두는 영웅이다.”

훈련병 164명이 핏대 높여 부르는 ‘까레니 영웅’이 해발 2000m 버마-타이 국경 산악을 쩌렁쩌렁 울린다. 6월12일(현지시각), 소수민족 까레니 해방투쟁을 이끌어온 까레니군(KA) 본부 냐무는 우렁찬 군가와 함께 새벽을 연다.

“석달짜리 정기 군사훈련인데, 올해는 신병 서른도 같이 붙였다.” 교관 부레 중위는 새내기들 입대에 한껏 부풀었다. 여느 소수민족해방군들과 달리 징병제 없이 자원병만으로 꾸려온 까레니군에겐 이 새내기 하나하나가 다 보물들이다.

“군사훈련 마치고 야전 위생병으로 일할 거예요. 해방투쟁이 남자들 몫만은 아니니까요.” 타이 국경 나이소이 난민촌에 차린 까레니민족대학교 학생 수레(19)는 똑 부러진다. 함께 자원한 쁘레이메(19)는 “남자들과 똑같은 훈련 과정이 재미있다”며 거든다. 수다쟁이 수에메(19)가 끼어든다. “딱 하나 힘든 건 한국 드라마 못 보는 거예요. 이민호 보고 싶어요!” 땀범벅 흙투성이 군복도 신세대 티를 다 감춰주진 못한다. 그래서 더 아리다. 이 아이들이 전선에서 총을 든 현실이.

버마-타이 국경 냐무 본부에서 지난 12일(현지시각) 정기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까레니군. 냐무/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아직 전투 없지만, 머지 잖아…”

5월부터 까레니주 곳곳이 전선
시민무장조직 1천여명 전투중
버마 정부군과 까레니군 진지
가장 가까운 곳은 1㎞도 안돼

2012년 까레니군이 버마 정부군과 휴전협정을 맺은 뒤론 첫걸음이니 그사이 냐무도 좀 변했다. 병영과 진지도 그렇고 현장 지휘관들도 바뀌었다. 제2대대장이었던 에므웨 대령이 까레니군 3개 대대를 이끄는 본부 작전사령관으로 왔고, 냐무 지역 제2대대장은 우레 중령이 이어받았다. 다들 오래 못 본 반가운 얼굴들이다.

“이 동네는 아직 전투 소식 없던데?” “여기도 머잖아. 오늘내일 그래.” 에므웨 대령은 “말보다 눈으로 보는 게 좋다”며 냐무 꼭대기 고지로 이끈다. 겹겹이 펼쳐진 까레니 산악은 오늘도 장엄한 기운을 뿜는다. “전쟁만 없다면 산악 관광만으로도 까레니 사람 모두를 거뜬히 먹여 살릴 수 있을 텐데….” 까레니 전선에 오를 때마다 튀어나오는 혼잣말이 또 어김없이.

“바로 앞산을 봐. 저게 다 버마 정부군이야.” 에므웨가 가리키는 2~3㎞ 남짓 떨어진 산악에 정부군 고지 예닐곱이 맨눈으로도 어렴풋이 잡힌다. 정부군과 가장 가까운 까레니군 진지는 1㎞도 채 안 될 듯. 도시 사람들은 가늠하기 힘들 테지만, 전선 대치 1~3㎞란 건 그야말로 코빼기 앞 죽음을 뜻한다. “이 거리면 정부군이 야포도 필요 없고 81㎜(박격포)로도 충분히 때리겠는데? 냐무 쑥밭 되는 건 시간문제네?” “적들이 맘만 먹으면. 그렇다고 우리가 냐무 함락당하도록 지켜만 보겠어?” 에므웨는 자신감을 껄껄 웃음으로 대신한다.

1995년 버마 정부군과 휴전협정을 맺은 까레니군은 석 달 만에 공격당해 후아이뿔라웅 본부를 잃고 여기 냐무로 옮겨왔다. 그로부터 냐무는 난공불락 요새로 불려왔지만 앞날이 심상찮다. 제2대대 하나만으로 냐무를 지켜낼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본디 까레니군은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 명수들이지만 방어전 경험이 많지 않은 탓이다. 사력을 다했던 후아이뿔라웅 함락의 뼈아픈 기억을 지녔듯이.

“2주 전엔 정부군이 우리 머리 위로 드론 띄워 정찰까지 해댔지. 대응사격을 하자 거둬갔지만, 곧 치겠다는 신호 아니겠어.” 해방전선에서 45년을 보낸 에므웨는 직감적으로 다가오는 전선을 냄새 맡고 있는 듯.

실제로 까레니주는 이미 곳곳에 전선이 펼쳐졌다. 5월18일부터 주도 로이꼬와 샤도, 디모소, 프루소 지역을 공격한 버마 정부군에 맞서 시민 무장조직인 까레니민족방위대(KNDF) 1천여 명이 싸우고 있다. “우리도 마땅히 시민 도와야지. 까레니군도 참전했다.”

지난 12일(현지시각) 버마-타이 국경 까레니군 냐무 본부의 군사훈련장. 냐무/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전선 지역에 피난민 쏟아져

주민 대부분 떠난 도노꾸 마을
아이 105명 포함 317명 들어와
“구호단체가 쌀·천막 보냈지만
항생제·지사제 등 의약품 급해”

그사이 전선 지역은 10만 가까운 피난민을 쏟아냈다. 냐무 본부에서 3㎞ 떨어진 도노꾸 마을에도 피난민이 밀려들었다. 에므웨가 기꺼이 동행하고, 제2대대장 우레 중령이 무장 넷을 태운 전투용 픽업트럭에 올라 도노꾸로 길을 잡아 나간다. 장마철로 접어든 까레니 산악은 하루 내내 오락가락 장대비에 휘둘린다. 곳곳이 파여 엉망진창인 까레니 군용 산길은 예나 이제나 곡예운전이다. 도노꾸 마을 1㎞ 지점, 진흙탕에 빠진 자동차가 헛바퀴를 굴리며 비명을 질러댄다. 우레 중령이 낄낄거리며 비옷을 건넨다. 걷자는 뜻이다.

기울기 45도 질척이는 고갯길이 이내 허파를 찢어놓는다. 그동안 냐무를 드나든 유일한 기자로서 지녀온 자부심 따위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이 길이 끝나기를 바라는 간절함만 저만치 앞서간다. 1시간 만에 도노꾸에 닿는다. 드러눕고 싶지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태연한 척.

이 도노꾸는 이름만 마을이지 오래전 주민이 떠나고 이젠 집 세 채에 열두 사람만 남았다. 도노꾸가 다시 북적이기 시작한 건 유월 들어 피난민들이 찾아들고부터다. 밀림 곳곳에 움막이 눈에 띄고 마을터엔 제법 큰 간이 수용소 두 채가 들어섰다.

“오늘까지 아이 105명을 포함해 317명이 도노꾸에 닿았다. 구호단체가 쌀과 천막을 보내왔지만 당장 의약품이 문제다. 항생제, 지사제, 말라리아 치료제 같은. 생리대, 화장지도 급하고.” 까레니 임시정부 보건부 차관 쿠뽀는 상황을 설명하며 가건물로 이끈다. 병원이란다. 환자 둘이 누워 있고 보건부 요원 몇이 웅성일 뿐 텅 비었다. 약은 어디에도 없다. “코로나도 큰 문제다. 아직은 확진자가 없어 다행이지만. 검사도 할 수 없는 형편이니 피난민이 도노꾸로 들어오기 전 14일 동안 밀림에 머물도록 하는 게 다다.” 쿠뽀는 한숨 쉬며 빈손을 내보인다.

“공습 무서워 샤도 떠났다. 가족 여섯과 함께 산속에서 자며 3일 꼬박 걸어 도노꾸에 닿았다. 막막하고 무섭다.” 쁘레이메(23)는 버마 정부군이 전투기로 샤도 민간 마을까지 공격한 사실을 증언한다. 도노꾸에 몰려든 피난민은 저마다 얼굴도 사연도 다르다. 샤도 출신 상원의원 로버트 응에레(까야주민주당 KSDP)는 피난민들보다 훨씬 이른 4월3일 도노꾸에 닿았다. “쿠데타 뒤 연방의회대표위원회(CRPH)에 참여했고, 3월15일 체포령에 이름이 올라 아내와 아이 셋 데리고 빠져나왔다. 여기서 피난민들 물자 배급 돕는다.” 로버트는 피난민 가운데 200여 명이 샤도 출신으로 자신을 찍은 유권자들이라며 보답할 길을 찾고 있다고 한다.

“다 밝힐 순 없지만 버마 전역에서 탈출한 경찰들과 연대해서 다음을 준비하고 있다.” 쿠데타 뒤 까레니군 해방구로 빠져나온 경찰 200명 가운데 하나인 랭군 출신 마웅지(가명·50)는 “비밀이니 듣기만 하고 보도는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지난 12일(현지시각) 버마-타이 국경 도노꾸 마을 인근 밀림에 닿은 샤도 출신 피난민들. 냐무/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민족통합정부와의 관계는 “…”

“여기서 싸우는 시민무장조직에는
군사 훈련~보급까지 돕고 있지만
버마사람 중심 통합정부는 달라
까레니가 그들 군대엔 안 들어가”

도노꾸를 떠나 까레니군 총사령관 비투를 만나러 간다. 장소는 밝히지 않는 게 좋겠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지?” 두어 달 만에 다시 만난 그이가 반갑게 맞이한다. “아프다던 이빨은?” “아팠다 말았다 그래.” 올해 예순여섯, 전선 나이로 쉰을 채운 비투는 꾸밈없고 무뚝뚝한 모습이야 한결같지만 몇 해 전부터 잔병치레가 잦다. 세월 이길 장사 없다고.

“지금 까레니 안에서 전투 중인 시민 무장조직인 까레니민족방위군과 까레니군 관계는?” “사실은 군사훈련부터 보급까지 우리가 돕고 있어.” “작전 명령도 까레니군이?” “그건 아니고 서로 협조하는 선에서.” “까레니군으로 이미 편입한 거 아닌가?” “앞으로 원하는 이들은 그럴 수도.” “그럼 민족통합정부(NUG)가 창설한 민중방위대(PDF)와 까레니민족방위군 관계는?” “서로 달라. 버마인 중심 민중방위대에 까레니가 들어갈 수 없지.”

이게 현실이다. 모든 시민군을 민중방위대로 편입한 뒤 버마 전역에 5개 사단을 꾸려 정부군과 싸우겠다고 밝힌 민족통합정부 계획은 이렇게 빗나갔다. 까레니뿐 아니라 소수민족 친에서도 시민군 친랜드방위군(CDF)이 등장했다. 까렌과 몬 쪽에서도 소수민족 시민군이 곧 태어날 낌새가 보인다.

“우리 까레니민족방위군 돕기도 벅찬데 버마인 민중방위대 도울 수 있겠어?” 비투 말은 결론에 가깝다. 정치가 버마인과 소수민족으로 나눠져 왔듯이 무장투쟁도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애초 소수민족해방군이 지녀온 버마에 대한 불신감을 민족통합정부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정치적 합의도 끌어내지 못한 결과다.

냐무에 땅거미가 드리운다. 내 몸이 기억하는 전선 일과를 쫓아간다. 여긴 총알보다 무섭다는 세계 최악 말라리아 전선이다. 놈들이 날뛰는 어둠이 내리기 전 멱을 감는다. 보건부 요원 예스터가 만든 삶은 호박과 말린 물고기로 저녁을 해치운다. “멀리서 친구가 왔는데 테이예(쌀로 빚은 까레니 전통 술)가 빠질쏘냐!” 에므웨 대령, 우레 중령을 비롯한 예닐곱이 함께 주고받는 술잔 속에 전선의 밤이 깊어간다. 정치도 전쟁도 우정도 모두 독한 테이예에 묻어 몸통 구석구석으로 스며든다.

자정이 지났다. 발전기 소리도 멈췄다. 이제 세상엔 오직, 다가오는 전선을 예감한 풀벌레들 비명만 남았다. 손전등 아래 엎드려 하루를 접는다. 오늘 밤 이 전선일기가 마지막이기를 바라며.

―6월11~13일 냐무에서/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끝>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의 요청으로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까레니는 누구인가?

몽골을 고향이라 여기는 까레니(Karenni)는 기원전 2000년 중국 윈난으로 이주한 데 이어 기원전 1000년 버마의 샨주를 거쳐 오늘날 까레니주로 흘러들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붉은색을 좋아해 흔히들 ‘붉은 까렌’이라 불러온 까레니는 언어학적 인종 구분에 따르면 중국-티베트계에 속한다. 으레 또렷한 뿌리나 역사는 아무도 모른다. 까레니는 19세기 전까지만 해도 바깥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고립된 공동체였다. 까레니가 역사에 등장한 건 버마를 삼킨 영국 식민정부와 버마의 민돈민왕이 까레니 독립을 보장한 1875년 협정을 통해서다. 그러나 1948년 독립한 버마 정부는 그 협정을 무시한 채 무력으로 까레니를 합병해서 오늘에 이른다. 이 대목이 까레니 해방투쟁의 역사적, 법적 동력이다. 해방투쟁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내건 버마의 여러 소수민족들과 달리 까레니가 영토적 개념을 앞세워온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게 까레니 사람들이 1989년 버마 군사정부가 일방적으로 바꿔버린 지명인 까야주를 거부하며 여전히 까레니주를 고집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경기도보다 조금 큰 1만1732㎢ 영토에 인구 36만을 거느린 까레니는 600만 샨(Shan)이나 400만 까렌(Karen)에 견줘 소수민족 가운데도 그야말로 소수민족이다. 1957년 깃발 올린 까레니민족진보당(KNPP)과 그 무장조직인 까레니군(KA)이 바로 이 소수 까레니의 해방투쟁을 이끌어온 주인공이다. 까레니민족진보당은 그동안 외쳐온 ‘독립투쟁’의 비현실성을 인정하며 2002년 버마연방을 향한 ‘자치투쟁’ 노선으로 갈아탔다. 4년마다 대의원대회를 열어 의장, 부의장, 중앙상임의원 11명, 중앙위원 37명을 뽑는 민주적 전통을 지닌 까레니민족진보당은 의장이 까레니 임시정부 총리를 맡고 그 아래 국방부와 외교부를 비롯한 여덟 개 부처로 해방구를 꾸려왔다. 소수민족해방전선에서 이런 민주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는 진영은 오직 까레니진보당과 까렌민족연합(KNU)뿐이다. 현재 까레니군은 3개 대대와 특수부대 그리고 게릴라부대로 나눠 전선을 가고 있다.

―냐무에서/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피난민만 10만명…돈 되는 건 정부군에 뺏겨”
에이벌 트윗 까레니민족진보당(KNPP) 의장 인터뷰

13일(현지시각) 에이벌 트윗 까레니민족진보당 의장 겸 까레니 임시정부 총리가 까레니군 해방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손톱에 흙이 낀 정치 지도자는 흔치 않다. 그게 도시든 전선이든. 30년 동안 만나온 에이벌 트윗 까레니민족진보당(KNPP) 의장 겸 까레니 임시정부 총리가 내미는 손을 볼 때마다 그 손톱에 눈이 간다. 한결같다. 그이 언저리에 늘 손수 가꾼 남새가 널린 까닭이다. “문태 붉은 바나나 봤어? 야생을 데려와 내가 키운 거야. 먹고 집에 가져가.” 에이벌은 스무 개쯤 달린 붉은 바나나 한손을 내민다.
올해 일흔여섯인 에이벌은 작위적인 카리스마 따위완 거리가 먼 지도자다. 늘 웃는 얼굴에 잔정이 많다. 단, 미소 너머로 날아드는 날카로운 눈길과 후벼 파는 그이 말투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적잖은 세월이 걸린다. 랭군대학에서 공부한 역사학을 밑천 삼은 해박한 지식에다 까레니군(KA) 사령관으로 전선 경험까지 지닌 에이벌은 버마 소수민족해방전선을 주름잡아온 고집불통 독설가다. 그이는 까렌민족연합(KNU) 전 부의장 따까보와 신몬주당(NMSP) 의장 나이홍사와 더불어 국경 ‘삼고집’으로 통한다.
“6월14일로 잡은 까레니 대의원대회는 물 건너갔겠구만?” “응. 비상체제로 들어갔어. 한 반년이나 일 년쯤 미룬 셈이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내게 여러 번 말했는데 비상체제 끝나면 진짜 물러날 건지?” “2013년부터 연임했으니 이제 넘겨야지. 농사짓고 까레니 역사 다듬는 게 남은 일이야.” “차기 의장 후보로 현 부의장 우레, 비투 사령관, 아웅먓 부사령관이 올랐다던데?” “소식 다 들었구만. 그대로야.” “누굴 미나?” “밀긴 누굴 밀어. 대의원들이 알아서 뽑겠지. 다만 교육, 행정, 외교 생각하면 군인 냄새 너무 강한 건 좀 그래.” 마음은 부의장 우레 쪽에 가 있다는 뜻이다.
“그나저나 피난민이 10만인데 어떻게 하려고?” “갑작스레 터진 일이라 예산도 없고 큰일이야. 우리 한계 넘었어. 몇몇 구호단체가 나서곤 있지만 턱없이 모자라.” “사업가들한테 비상 세금이라도 좀?” “그게 맘대로 되나. 코로나 뒤로 징세도 바닥이야. 모찌 쪽 주석 광산도 버마 정부군 손에 거의 들어가 버렸잖아. 목재나 살윈강 수자원도 버마와 타이 정부가 막아버렸고.” “주석마저 없으면 까레니 경제는 뭘로?” “기껏 루비쯤이 다야. 미국과 유럽으로 나간 2만4000 까레니 교민들 지원으로 버텨 온 거지.” 돈 될 만한 건 모조리 버마 정부군이 삼켜버린데다 코로나로 타이 국경 개구멍마저 막힌 판에 피난민까지 몰려드니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꼴이다. 에이벌 어깨가 전에 없이 무거워 보이는 까닭이다.
“소수민족해방군 동맹체 만들자고 외친 건 어떻게?” “글렀어! 버마 정부군에 맞서려면 그 길뿐인데, 말만 해방투쟁이지 다들 이기적이고 이문만 따지니. 우리 소수민족들이 어리석어. 적이 버마 정부군만도 아냐.” 에이벌은 거침없이 제 몸에 칼을 들이대더니 대뜸 되묻는다. “다들 이야기해 본 자네 생각은 어때?” “힘들듯. 까렌민족연합은 불가능을 말했고, 몬민족해방군(MNLA)은 이미 버마 정부군과 밀담까지 나눴고, 샨주군(SSA)은 본디 정치보다 사업이고, 까친독립군(KIA)은 돈줄도 화력도 넘치니 관심도 없고. 나머지야 판 움직일 만한 몸집도 아니니.” “내 말이 그거야. 1948년 버마 독립 뒤부터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어. 헤쳐 모이기만 되풀이해왔지. 그러니 우리가 아직 이 꼴이야.”
“무뚜새이뿌(까렌민족연합 의장)가 휴전협정 정신 지키겠다고 선언했는데?” “버마 정부군한테 공격당하는 판에 휴전협정 정신 지키겠다는 무뚜도, 동맹체 무시하는 반라(까친독립기구 의장)도 다들 배신자야.” 에이벌은 소수민족해방군 지도자들을 향해 대놓고 독설을 퍼붓는다. “휴전협정에 정신이 어딨어. 정치적 협정이고 문서일 뿐인데. 정치를 정신으로 하는 게 아냐. 허구한 날 말치레들만. 해서 우리가 서명 안 했던 거야.” 까레니군은 버마 정부군과 2012년 개별 휴전협정을 맺고도 2015년 상위 전국휴전협정(NCA)에 끝내 서명 않고 버텨온 유일한 소수민족무장조직이다. 에이벌은 “배신과 음모로 얼룩진 소수민족해방군 역사가 참 아프다!”고 한다.
힘겨운 형편 탓인지 흐르는 세월 탓인지 알 순 없지만, 얼마 전부터 에이벌은 운명을 자주 입에 올린다. “까레니 정체성이라고 뭐 별게 있나. 자네가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듯 내가 여기 태어났을 뿐. 신이 우릴 여기 보낼 땐 사연이 있었겠지. 우린 그걸 해방투쟁으로 해석했고. 이게 까레니로서 내 자부심이야.” 여태 에이벌과 많은 이야기 나눴지만 ‘신’이 등장한 건 처음이다. 민족해방전선에 일생을 바친 그이가 오늘따라 참 외로워 보인다. 이게 사람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까레니의 희망 전령사 노릇을 하고 싶었던 내 바람과는 좀 어긋났지만.
―6월13일 까레니군 해방구에서/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군부 뜻대로 가르칠 수 없어 탈출”
피난민 아이 가르치는 역사 교사 베모

12일(현지시각) 까레니군 해방구 도노꾸에서 께이꼬중학교 교사 베모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서른여덟으로 믿기 힘든 앳된 얼굴인 베모는 낯선 국경 땅에서 난데없이 외국 기자를 만난 게 멋쩍은 듯 좀체 눈길을 안 준다. 그이가 경계심을 풀도록 한동안 허공에 대고 이야기한다. “근데, 이름과 얼굴 나가도 되는지?” 다짐 끝에 비로소 눈길이 마주친다. “괜찮다.” “두고 온 가족들도 괜찮을까?” “부모님은 산골에 살아 별 탈 없을 테고 여동생은 여기 같이 왔다.” “언제 집 떠났나?” “5월30일 프루소 떠났다.” 베모가 아이들을 가르쳐온 께이꼬중학교는 까레니주 주도 로이꼬에서 남쪽으로 40킬로미터쯤 떨어진 프루소라는 작은 군에 자리 잡았다. 지난 5월 중순부터 버마 정부군 공격을 받아온 곳이다.
“중학교에선 뭘 가르쳤나?” “버마 역사.” “그럼 대학에서 역사를?” “아니, 로이꼬대학에서 생물학을.” “근데, 왜 역사를?” “정부가 하라는 대로.” “아이들한테 까레니 역사도 가르치나?” 베모는 손사래부터 친다. “오직 버마 역사만.” “몰래 가르칠 수는?” “상상도 못 한다.” “까레니 역사는 어떻게 하나?” “나도 까레니 역사 배운 적 없다. 내가 모르니 가르칠 수도 없고.” “까레니 말은?” “말도 학교에서는 못 가르친다. 다들 집에서만.” 이게 역사와 말을 빼앗긴 까레니 현실이다. 공식적으로 135개 소수민족이 인구의 40%를 웃도는 버마에서 벌어져온 일이다. 다른 말로 소수민족 말살정책이다.
“프루소에서도 교사들이 불복종운동(CDM)에 참여했는가?” “우리 학교에선 열다섯 가운데 나까지 열셋이.” “까레니주 통틀면?” “4월 중순부터 따져 80%쯤 될 듯.” “피난 온 것도 불복종운동 때문?” “학교에 있으면 정부 명령 따라야 하고, 어기면 잡혀가니까.” “교사들이 다 떠났나?” “내가 떠날 땐 몇이 남았는데 지금은 알 수 없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꼬박 일주일 걸었다. 폰강과 살윈강 건너 산을 쉰 개쯤 넘었다. 도따껫산은 지옥이었고.” “잠은?” “며칠은 산골마을에서, 며칠은 산속에서 닥치는 대로.” “먹을거리는?” “집에서 가져온 게 모자라 밀림에서 찾아 먹기도.” 베모 얼굴에서는 고달팠던 일주일 여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프루소에서 냐무까지 직선거리로 70킬로미터쯤 될 법한데, 이 동네 산악은 험하기로 악명 높다. 여길 어림잡아 하루 10킬로미터쯤 걸었다는 건 게릴라전에 이골 난 전사들 수준이다. 그만큼 절박했다는 뜻이다.
“여기선 뭘 하나?”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피난민 아이들 가르친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할 텐데?” “앞으로 뭘 할진 알 수 없지만 죽어도 정부 공무원은 안 한다.” “그럼?” “우리 까레니 사람 돕고 버마 정부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일이면 뭐든 좋다.” 이렇게 버마 군인정부는 말 잘 듣던 교사를 투사로 만들어버렸다. 까레니 민족해방투쟁사에 새로운 동력이 산악 밀림에서 하나둘씩 태어나고 있다.
“불복종운동 끝에 소수민족해방구로 빠져나온 이들 가운데 당신이 처음 기자와 얼굴 맞댔다. 용기 내줘서 고맙다.” 놀란 듯 눈이 똥그래진 베모와 긴 이별을 위한 짧은 만남을 마친다.
―6월12일 까레니군 해방구 도노꾸에서/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지난 6월12일(현지시각) 까레니-타이 국경선. 사진 한복판 집들이 타이 국경수비대 병영이고 오른쪽 집들이 까레니군 연락사무소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는 1990년부터 타이를 발판 삼아 아프가니스탄·이라크·코소보를 비롯한 40여개 전선을 취재해왔고 최근 <국경일기: 타이·버마·라오스·캄보디아 편>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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