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맛골 땅 속에서 '훈민정음' 금속활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노형석 입력 2021. 6. 29. 09:06 수정 2021. 6. 29.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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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한양 중심부서 세종시대 천문시계 등 과학유물도 나와
15세기에 만들어진 한글 금속활자 소자. 기록만 전해지다 이번 발굴에서 최초로 실물이 확인됐다.

“이건 조약돌이 아니라 금속활자입니다!”

이달 초 서울 도심 문화거리인 인사동 피맛골 재개발 지구 유적을 발굴하던 수도문물연구원(원장 오경택) 조사팀은 16세기 건물터의 땅속에서 나온 도기 항아리의 일부 내용물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항아리 옆구리 구멍으로 삐져나온 조약돌 모양의 유물 몇개를 세척해보니 금속활자로 드러난 것이다. 흥분한 조사팀은 항아리 안의 흙을 모두 덜어내고 집중분석 작업을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항아리 내부에 무려 1600여개의 금속활자가 가득 들어차 있었던 것이다.

전문가들이 살펴보니, 15세기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즈음 쓰인 것으로 짐작되는 조선 초기 세종~세조대의 한글 금속활자 실물과 세종이 만든 한자 금속활자인 갑인자로 추정되는 활자들이 처음 발견된 것이라는 판독 결과가 나왔다. 이 금속활자들 중 일부는 독일인 구텐베르크가 1450년대 서양 최초로 금속활자 활판인쇄를 시작한 때보다 제작 시기가 수십여년 앞서는 것들로 추정된다.

한글 금속활자의 세부.
한글 연주활자.

문화재청은 수도문물연구원이 발굴조사 중인 서울 인사동 79번지 ‘공평구역 15·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 내 유적(나 지역)’의 16세기 건물터에서 항아리에 담긴 조선 전기 세종~중종 때의 금속활자 1600여점을 찾아냈다고 29일 발표했다. 문화재청 아울러 세종~중종대 제작해 쓴 것으로 보이는 자동 물시계의 시보 장치 부품인 주전(籌箭)과 세종 때 것으로 추정되는 천문시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의 부품들, 중종~선조 때 만든 무기인 총통(銃筒)류 8점, 동종(銅鐘) 1점 등의 금속 유물들도 같은 유적에서 함께 묻힌 형태로 발굴됐다고 덧붙였다.

세종 때 만든 갑인자로 추정되는 한자 금속활자들. 크기상 소자(小字)에 해당한다.
도기 항아리 내부를 채운 금속활자들. 출토 당시의 모습이다.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세종 때 제작된 가장 이른 시기의 한글 금속활자들이다. 일괄로 출토된 금속활자들은 한글 금속활자를 이루는 대자(大字), 중자(中字), 주석 등에 사용된 소자(小字), 특소자가 모두 출토됐다. 특히 <훈민정음> 창제 시기인 15세기에 한정돼 사용되던 ‘동국정운식 표기법’을 쓴 금속활자가 실물로 확인됐고, 한글 금속활자를 구성하던 다양한 크기의 활자들이 모두 출토된 점 등은 획기적인 성과로 평가된다. <동국정운>은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 박팽년 등이 조선한자음을 바로잡기 위해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책으로, 중국 한자음을 표기하기 위하여 사용된 ㅭ, ㆆ, ㅸ 등을 기록한 것이 특징이다. 이밖에도 두 글자를 하나의 활자에 연결 표기해 토씨(어조사)의 구실을 한 희귀본 연주활자(連鑄活字)들이 10여점이나 나왔다.

물시계의 시보를 작동시키는 주전 부품들. 이번 발굴로 처음 실물이 출토되었다.
‘일성정시의’의 주요 부품인 ‘주천도분환’.
물시계의 중요 부품인 주전. 처음 확인되는 실물이다.

한자활자도 현재까지 전해진 가장 이른 조선 금속활자인 세조시대의 ‘을해자’(1455년·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보다 20년 이른 세종시대의 ‘갑인자’(1434년)로 추정되는 활자가 다량 확인돼 학계를 흥분시키고 있다. 조선 전기 다종다양한 금속활자가 한곳서 출토된 첫 사례라 할 수 있다. 백두현 경북대 교수와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국내 최고의 한글활자와 세종이 만든 한자 금속활자인 갑인자의 실물이 사상 처음 나타났다는 점에서 국내 인쇄문화사에 획을 긋는 발견”이라며 “한글 창제의 실제 여파와 더불어 활발하게 이루어진 당시의 인쇄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조사팀 쪽은 금속활자들의 종류가 다양해 조선 전기 인쇄본으로만 확인할 수 있었던 여러 활자의 실물들이 추가로 확인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도기항아리에서는 금속활자와 함께 세종~중종 때 제작된 자동 물시계의 주전으로 보이는 동제품들이 잘게 잘린 상태로 출토됐다. 동제품은 동판(銅板)과 구슬방출기구로 구분된다. 동판에는 여러 개의 원형 구멍과 ‘일전’(一箭)이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구슬방출기구는 원통형 동제품 양쪽에 각각 걸쇠와 은행잎 형태의 갈고리가 결합된 것이 특징이다. 이런 부품 형태들은 <세종실록>에서 작은 구슬을 저장했다 방출해 자동물시계의 시보장치를 작동시킨 장치인 주전의 기록과 일치한다. 주전은 1438년(세종 20년)에 제작된 흠경각 옥루이거나 1536년(중종 31년) 창덕궁에 설치한 보루각의 자격루로 추정된다. 기록으로만 전해져오던 조선시대 자동 물시계의 주전 실체가 처음 확인된 것이다.

활자가 담겼던 항아리 옆에서는 주·야간의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가 나왔다. 낮에는 해시계로, 밤에는 해를 이용할 수 없는 단점을 보완해 별자리를 이용해 시간을 가늠한 용도의 시계다. <세종실록>을 보면, 1437년(세종 19년) 4개의 일성정시의를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출토 유물은 주천도분환(周天度分環), 일구백각환(日晷百刻環), 성구백각환(星晷百刻環) 등 일성정시의의 주요 부품들로, 시계 바퀴 윗면의 세 고리로 보인다. 현존 자료 없이 기록으로만 전해져오던 세종대 과학기술의 실체를 확인한 것으로 의미가 크다는 평가다.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와 동종이 땅속에서 드러난 모습.
출토된 승자총통.

소형화기로 총구에 화약과 철환(총알)을 장전하고 불씨를 붙여 발사하는 총통은 승자총통 1점, 소승자총통 7점이 나왔다. 복원된 크기는 대략 50~60cm 정도다. 새겨진 명문을 판독한 결과 계미년 승자총통(1583년)과 만력(萬曆) 무자(戊子)년 소승자총통(1588년)으로 추정된다. 장인 희손(希孫), 말동(末叱同) 제작자가 기록돼 있는데, 희손은 보물로 지정된 서울대 박물관 소장 <차승자총통>의 명문에서도 확인되는 이름이다. 만력 무자년이 새겨진 승자총통들은 명량 해역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동종은 일성정시의의 아랫부분에서 여러점의 작은 파편으로 나뉘어 발견됐다. 포탄을 엎어놓은 종형의 형태로, 두마리 용 형상을 한 손잡이 용뉴(龍鈕)가 달렸다. 귀꽃 무늬와 연꽃봉우리, 잔물결 장식 등 조선 15세기에 제작된 왕실발원 동종의 양식을 계승한 것이 특징이다. 종 몸체 윗부분에 ‘嘉靖十四年乙未四月日’(가정십사년을미사월일)이라는 예서체 명문이 새겨져 있어 1535년(중종 30년) 4월에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조사 지역은 종로 2가 네거리의 북서쪽으로, 한양도성의 중심부다. 조선 전기까지 한성부 중부(中部) 견평방에 속했던 곳이다. 견평방은 조선 전기 한성부 중부 8방의 하나로 사법기관 의금부와 왕실궁가인 순화궁, 죽동궁 등과 상업시설 운종가 등이 자리했던 도성 안 경제 문화 중심지였다. 유적에서는 조선 전기부터 근대까지의 총 6개의 문화층(2~7층)이 확인된다. 금속활자 등이 출토된 층위는 현재 지표면으로부터 3m 아래인 6층(16세기 중심) 부분으로, 건물터 유구와 조선 전기로 추정되는 자기 조각과 기와 조각 등도 같이 나왔다.

금속활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유물들은 잘게 잘라 파편으로 만들어 도기항아리 안과 옆에 묻어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활자들은 대체로 온전했지만 불에 녹아 서로 엉겨 붙은 것들도 있다.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출토품들 가운데 가장 시기가 늦은 유물이 1588년을 뜻하는 만력 무자년 간기가 새겨진 소승자총통이어서 일러도 1588년 이후에 묻힌 것이 확실하다. 오경택 연구원장은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과 시기적으로 가까워 당시 전란을 맞으면서 유물들을 항아리에 담아 땅속에 묻어두고 피난을 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출토 유물들은 현재 1차 정리를 마치고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 보관 중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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