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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코로나 걱정" 무시당한 일왕..도쿄올림픽 '축하 선언' 할까

황현택 입력 2021. 07. 03. 07:01 수정 2021. 07. 03.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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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이 불안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가운데 폐하 역시 명예총재를 맡고 계시는 올림픽·패럴림픽 개최가 (코로나19) 감염 확대로 이어지지 않을까 염려하고 계신다고 배찰합니다."

일본 왕실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인 궁내청의 니시무라 야스히코(西村泰彦) 장관이 6월 24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느닷없이 이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배찰'(拜察)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뜻을 살펴 추측한다는 뜻입니다. 귀를 의심한 궁내청 담당 기자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설령 '배찰'이라도 해도 이게 보도되면 상당한 파장이 있을 텐데 그대로 전해도 됩니까?"

니시무라 장관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네, '온레코'(on-the-record·기사화해도 무방함)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그렇게 인식하고 계시지 않을까, 저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 아사히신문이 6월 25일 조간에서 “폐하가 도쿄올림픽 개최로 코로나19 감염 확대를 걱정하고 있다”는 궁내청 장관의 말을 전하고 있다.


■ "장관 개인 생각"…긴급 진화

이 발언으로 열도는 크게 술렁였습니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관방장관, 마루카와 다마요(丸川珠代) 올림픽 담당상 등이 총출동해 "궁내청 장관이 자기 생각을 말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긴급 진화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해명은 오히려 "일왕의 오코토바(おことばㆍ말씀)가 무시당했다"는 평가로 이어졌습니다.

일왕은 '상징 덴노'(象徴天皇)로 불립니다. 일본 헌법은 일왕을 '일본국 및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 정치적 발언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왕이 종종 현안에 대한 의견을 표명할 때에는 궁내청 장관이 내심(內心)을 '추측'해 '대변'하는 형태를 취해 왔습니다. 일개 장관이 일왕의 허락 없이 이런 발언을 함부로 내놓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국 워싱턴포스트(WP)가 "도쿄올림픽이 천황(일왕)으로부터 중대한 불신임표를 받았다"고 보도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G7 정상회의 참석한 정상들이 6월 12일(현지시간) 영국 콘월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두 번째 줄 가장 왼쪽이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영국 콘월=연합뉴스]


■ 왜 하필 이때?

제126대 나루히토(德仁) 일왕은 1년 넘게 도쿄올림픽 관련 언급을 자제해 왔습니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전인 2019년 2월 23일, 자신의 59번째 생일 맞이 기자회견에서 "매우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지난해와 올해 생일 회견에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시기였을까요. 장관 회견이 있던 6월 24일은 도쿄올림픽 개회식(7월 23일)이 한 달 안쪽으로 접어든 시점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일본 매체 '뉴스포스트세븐'은 궁내청 관계자의 말을 전했습니다.

"스가 총리는 6월 중순, 주요 7개국(G7) 정상들로부터 도쿄올림픽·패럴림픽 지지를 받아내 개최 확신을 얻었습니다. 만약 '개최냐' '취소냐' 논의가 한창일 때 이런 발언을 했다면 '천황(일왕)이 중단을 유도했다. 정치적 발언을 했다'는 비판이 높았겠죠. 반면에 궁내청 장관의 다음 회견을 기다리다 보면 개회식 직전이라 '너무 늦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요. 타이밍이 절묘했던 거죠."

이 매체는 특히 장관 회견 이틀 전, 스가 총리의 '내주'(内奏·임금에게 은밀히 보고함)가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자세한 보고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나루히토 일왕이 스가 총리의 '폭주'를 견제하고, '유(有) 관중 개최' 방침 등에 반대 입장을 내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됐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나루히토 일왕 내외가 2019년 8월 15일 열린 태평양전쟁 종전(패전) 74주년 ‘전국전몰자추도식’에 참석, 아베 신조 당시 총리의 추모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일본 교도통신]


■ "아베·스가에 무시당해"

나루히토 일왕 발언이 전해진 이튿날인 6월 25일, 스가 총리는 보란 듯 도쿄올림픽 개최 의지를 재확인했습니다.

일본 집권 자민당 본부에서 열린 도쿄도 의회 선거(7월 4개 투·개표) 출정식에서 "세계가 단결해 인류의 노력과 지혜로 이 난국을 극복하는 대회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전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도 지지 않았습니다.

같은 날, 한 자민당 후보 출정식 찬조 연설에서 1964년 도쿄올림픽을 거론하며 "당시의 감동, 일본 선수의 활약, 시합을 통해 미래의 꿈과 희망, 용기를 봤다"면서 "어떻게든 (대회를) 성공시켜 세계에 희망과 용기를 주자"고 했습니다.

두 사람의 이런 반응을 두고 미국 UPI통신은 "코로나 올림픽에 대한 일왕의 우려가 무시당했다"는 기사를 냈습니다. 실제로 전·현 총리가 '단결' '희망' '지혜' '노력' 등의 말을 쏟아냈지만, 어디까지나 비과학적 용어일 뿐 코로나19 상황은 날로 악화하고 있습니다.

7월 2일 도쿄도(東京都)에선 신규 확진자가 660명 나왔습니다. 일주일 전 같은 요일과 대비해 확진자 수가 13일 연속 늘었습니다. 최근 일주일간 확진자 증가 폭은 '폭발적 감염 확산'을 의미하는 4단계 수준에 달했습니다.

여기에 일본 국립감염증연구소는 "감염력이 큰 델타 변이 바이러스가 현재 도쿄 등 간토(關東) 지역 확진자의 30% 안팎을 차지하며, 올림픽이 개막하는 이달 중순 50%를 넘길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20여 일 후 올림픽이 개막하면 사람들의 이동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델타 변이가 주류가 되면 감염 확산 속도는 더욱 빨라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124대 히로히토 일왕이 1964년 10월 10일 아시아 첫 대회인 도쿄올림픽의 개회를 선언하고 있다.


■ 나루히토, '축하 선언'할까

지금으로부터 57년 전, 1964년 도쿄올림픽 때 개회 선언은 제124대 일왕인 히로히토(裕仁·1901∼1989)의 몫이었습니다. 그는 "제32회 근대 올림피아드를 축하하며, 여기에 올림픽 도쿄 대회의 개회를 선언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개회 선언은 나루히토 일왕이 할 가능성이 큽니다.

일본인에게 일왕은 무척 각별합니다. 정치적 실권은 없어도 여전히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합니다. 이른바 '통치하지 않는 인간 신(神)'입니다. 일본 국민 대다수가 도쿄올림픽 개최를 반대하고, 특히 코로나19의 폭발적 감염 확대를 우려하는 가운데 일왕 스스로 대회를 '축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입니다.

여기에 일왕 부부는 해외 각국에서 오는 요인을 대접하는 역할도 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한 전문가는 "일왕으로서 코로나 확산을 우려 했다는 걸 기록으로 역사에 남기고 싶었을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7월 23일 오후 8시 도쿄올림픽 개회식. 개회 선언문은 이미 올림픽 헌장에 규정돼 있습니다. 정해져 있는 '대회 축하' 문구를 읽어내려갈 때 나루히토 일왕의 표정을 살피는 것도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

황현택 기자 (news1@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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