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전두환도 이승만에 비하면..

2021. 7. 2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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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의 발자국] 58. 서울 이화장 : '민족은 없고 반공만 있는' 이승만

[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노동자에게 조국이란 없다. (중략)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근처에는 이승만이 해방 정국에서 살았고 지금은 이승만기념관이 있는 이화장이 있다. 이화장의 문은 굳게 닫혀있다.

큰 키를 이용해 담장 안을 들여다보자 정원에 이승만의 동상이 보였다. 이를 보고 있자, 갑자기 '민족이나 조국보다 계급과 이념이 더 중요하다'는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구절이 생각났다(민족을 과소평가한 이 부분이 공산주의의 큰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지만). 공산주의라면 치를 떨 대표적인 반공주의자인 이승만 동상을 보자 왜 <공산당 선언>이 떠오른 것일까?

▲ 굳게 문이 닫힌 이화장 ⓒ손호철
▲ 언덕에서 내려다본 이화장. 정원에 있는 이승만 동상이 보인다. ⓒ손호철

'나에게 민족이란 없다, 반공이라는 이념만 있을 뿐이다. 만국의 반공주의자들이여 단결하라!' 이승만을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이처럼 요약할 수 있다. 그렇다. 그는 반공을 위해 노덕술 등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던 친일경찰들을 중용해 김원봉 등 좌파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는 등 때려잡았고, 국회가 친일파 처단을 위해 만든 반민특위를 공격해 해체시켰다('손호철의 발자국' 53. 반민특위, <프레시안> 2021년 7월 12일자 참조).

그에게 선악의 최고의 기준, 아니 유일한 기준은 반공이었고, 반공이라는 이념이 민족 위에, 아니 그 어느 것보다도 위에 있었다. 그 점에서, 내용은 정반대지만, 이승만은 <공산당 선언>을 닮았다(물론 좌파들은 이는 <공산당 선언>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분노하겠지만). 아니 반공이 이승만의 최고의 가치는 아니었고, 그 이상의 것이 있긴 했다. 그것은 그의 권력욕이다.

박정희와 함께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인 이승만은 한말인 1875년 몰락한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당을 다니며 공부해 과거를 봤지만 낙방했다. 그의 일생을 바꾼 것은 1895년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근대적인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에 20살 늦깎이로 입학한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평생 출세의 기반이 된 두 가지를 만나게 된다. 미국과 기독교다. 그가 배재학당에서 만든 미국 선교사와의 인맥과 거기에서 배운 영어는 이후 그의 출세의 핵심이 됐다.

별로 주목받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승만의 태도다. 이승만은 동학농민혁명 당시(1894년~95년)에 이미 성년(19살~20살)이었고, 불과 4년 뒤 왕정폐지와 공화정을 주장하던 개화파 활동을 하다가 감옥을 갔다는 점에서, 동학에 대해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는 그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낡은 봉건체제의 혁파와 조선을 노리는 일본에 대항한 동학혁명에 앞장섰던 김구와는 대조적으로, 그는 동학을 도적이라는 동비(東匪)로 칭하며 '동비의 여당(餘黨)이 뱀처럼 서리고 지렁이처럼 뭉쳐 산으로 들아가 (…) 깃발을 들고 충의를 칭'해서 '다리가 떨립니다'라고 적었다. 이승만 전문가인 유영익 교수의 지적처럼, "이승만은 어리석은 백성들이 요사한 말을 믿고 일어난 동학 민란은 '나라를 위하여 대단히 위태로운 일'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이승만의 반민중성, 보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이를 생각하면 나 역시 다리가 떨린다.

이승만은 배재학당 재학 중 서재필의 강의를 듣고 감복해 독립협회에 참여했고, 1899년 박영효 세력의 고종 폐위 운동과 연루되어 투옥됐다. 감옥에서 영어와 성경 공부에 매진했고 죄수와 간수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다. 그는 영어에 능통하고 미국 선교사 등과 인맥이 있다는 이유로 민영환의 주선으로 투옥된 지 5년 반 만에 특별사면되어 미국 정부에 조선의 보전을 요청한다는 임무를 띠고 1904년 미국을 방문했다. 임무에 실패했지만,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대학에 입학해 1910년 프린스턴대학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강원도 고성 화진포는 바다를 끼고 절경이 펼쳐진 곳이다. 그곳에 가면 이승만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이승만 별장이다. 이 별장은 1960년 4‧19 혁명과 5.16 쿠데타를 거치며 폐허로 변했지만 1990년대 말 새로 지어 전시관으로 복원되어, 젊은 시절 이승만의 사진들을 만날 수 있다.

▲ 왕정폐지 운동과 관련해 감옥에서 성경 공부를 하던 이승만(왼쪽 3번째)와 동료들 사진이 화진포 이승만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이승만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미 유학 시절의 이승만(아랫줄 가운데).

그는 학위를 끝낸 뒤 1910년 귀국해 서울 YMCA 총무로 취임해 선교활동을 했다. 그러나 한일강제병합으로 사회 각 분야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1년 뒤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감리교 총회에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미국으로 탈출했다. 이후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그는 주로 미국에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많은 독립운동가처럼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거나 투옥되는 고통을 전혀 겪지 않았다. 나아가 이 기간 중 이승만의 행적은 논쟁적이다.

그는 독립운동을 했다고는 하지만, 미국 신문에 '일본이 조선을 근대화시켜주고 있다'는 취지의 글을 기고하는가 하면 하와이에서 무장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던 박용만을 미국 정부에 밀고하고, 미주 교포들이 어렵게 기부한 독립운동 자금으로 미국 여인들과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1919년 임시정부의 초대 집정관총재(대통령)로 선임되었으나 유엔에 위임통치를 청원하려한 것에 대한 일부의 강한 반발과 미국에 머무르며 임시정부 일을 등한시한 직무태만 등으로 탄핵을 당하고 말았다.

화가 난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대한 미주지역의 재정적 지원을 끊었다. 그 결과 임시정부는 가장 재정적 지원이 많았던 미주 교포들로부터의 지원이 끊기면서 재정적 어려움에 고통을 받고 존재감이 크게 약화되고 말았다.

▲ 하와이 독립운동 시절의 이승만(앞줄 왼쪽) 사진이 이승만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승만은 동경에서 맥아더를 만나고 그의 전용기를 타고 귀국했다. 당시 이승만은 이미 70세로 '유력 독립운동가' 중 가장 연로했고, 여운형이 미군정 도착 전에 주도적으로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인공)도 그를 주석으로 추대하는 등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일제 강점기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한 덕으로 해방공간을 장악한 것은 좌파였다는 점에서 그가 권력을 잡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결국 세계적인 '가짜뉴스' 사건인 미국=즉각 독립 지지, 소련=신탁통치 주장이라는 보도에 기초한 반탁운동으로 승기를 잡고 미국, 그리고 노덕술과 같은 친일경찰들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손호철의 발자국', 52. 미군정, <프레시안>, 2021년 7월 5일자 참조).

▲ 제헌회의에 의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취임사를 하고 있는 이승만(이승만기념관 전시자료).

1948년 그는 국회가 대통령을 뽑는 간선 대통령제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됐지만 국회가 반민특위를 만들어 그의 권력기반인 친일경찰들을 공격하자 반민특위 설립을 주도한 김약수 의원 등을 빨갱이로 몰고 반민특위를 공격해 해체시켰다. 그는 단독정부에 반대해 일어난 제주 4‧3 진압을 위한 출병에 반대한 여수 14연대의 봉기 후 여수순천 지역의 민간인들을 대량학살했고 이를 기화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해, 악명 높은 '국보법 시대'를 열었다('국보법 시대'는 촛불항쟁 뒤인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5.30 선거)에서 그와 입장을 달리하는 남북협상파가 약진하는 등 정치적 기반이 위기에 처했지만 한국전쟁 덕으로 다시 살아났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근 20만 명에 가까운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북한에 협력할지 모른다고 처형시켰다. 일종의 예비군인 국민방위군 소집자 중 12만 명이 측근들의 비리로 굶어죽고 얼어 죽은 목숨을 잃은 국민방위군 사건을 공산주의의 음모라고 우기고 산청·함양·거창 민간인학살사건 등의 학살자들을 애국자라고 옹호했다. 그의 이 같은 안하무인식 국정운영에 반발해 국회가 내각제로 개헌을 하려하자 1952년 공권력을 동원한 부산 정치파동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관철시켜 대통령에 재임됐다.

1956년 임기가 끝나게 되자 찬성표가 개헌에 필요한 2/3에 한 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4사5입'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논리로 3선 연임 개헌안을 관철시켜 장기집권에 들어갔다. 1956년 선거에서 선전한 조봉암이 1960년 선거에서 위협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북한간첩으로 몰아 사형시켰고, 1960년 85세의 나이에도 노욕을 버리지 못하고 4선을 위해 3.15 부정선거를 일으켰다가 결국 시민봉기로 쫓겨나고 말았다(해방 이후 이승만 관련 사건들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2. 제주 4‧3항쟁 <한국일보> 2020년 8월 18일자, 3. 제주백조일손 <한국일보> 2020년 8월 25일자, 14. 여순사건 <한국일보> 2020년 11월 9일자, '손호철의 발자국' 8. 경남 산청·함양·거창학살 <프레시안> 2021년 3월 24일자, 9. 국민방위군 <프레시안> 2021년 3월 26일자, 10. 부산정치파동 <프레시안> 2021년 3월 29일자, 34. 대전형무소 <프레시안> 2021년 5월 24일자, 54. 한강대교 <프레시안> 2021년 7월 14일자, 56. 조봉암 <프레시안> 2021년 7월 16일자, 57. 4.19혁명 <프레시안> 2021년 7월 19일자 등 참조)

이 과정에서 이승만이 사용한 전가의 보도가 '공산주의자들의 음모'였다. 무언가 정치적으로 불리한 일이 터지면, 이를 무조건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로 몰고 간 것이다. 그는 반민특위가 생겨나 친일경찰들에 대한 심판이 시작되자 반민특위 설립에 적극적이었던 김약수 등 소장파 국회의원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사형에 처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은 충격적인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나자 이 또한 "공산주의자들의 모략"이라고 몰아가다가 미국장교들이 들고 일어난 뒤에야 책임자들을 처벌했다. 조봉암의 지지가 올라가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자 북한의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켜버렸다.

이처럼 그가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나아가 자신이 바라던 극우정권을 세우고 유지하기 위해 저지른 죄과는 너무 많고 그 과정에서 너무도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 그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 이 점에서는 광주학살의 주범 전두환이나 많은 양심세력을 처형한 박정희도 그를 전혀 따라올 수 없다.

이 모든 잘못과 죄에도 불구하고 냉전적 보수세력이 이승만을 위해 꺼내드는 비장의 카드가 있다. 북한이라는 카드다. 즉 이승만이 과오가 많지만 그래도 이승만(그리고 이승만의 집권을 가능하게 만든 미군정)이 아니었으면, 대한민국은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지금쯤 우리도 북한처럼 됐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일견, 굉장히 설득력이 있어 보이고 강력한 주장이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미군정 편에서 이미 이야기했듯이,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회적 현상을 과정의 정당성 등은 무시하고 결과만으로 판단하는 '결과론'으로 문제가 많다('손호철의 발자국' 51. 미군정 <프레시안> 2021년 7월 5일자 참조).

물론 현재의 우리 사회는 '헬조선' 등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비교하면 '천국'에 가깝다. 하지만 미군정과 이승만이 막지 않아, 남한 민중이 자기의 길을 갔다면 북한식이 됐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다. 우리에게 세습 등 봉건적인 왕정에 가까운 북한이냐, 아니면 황금만능과 '헬조선'의 남한사회냐는 양자택일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북한식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중간의 선택지'가 있었다.

구체적으로, 두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당시 많은 국민들이 바랐듯이 통일이 되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분단이 이어진 경우이다. 어느 경우 등 반드시 북한식으로 될 것이라는 주장은 억지다. 설사 분단이 됐다고 하더라도, 북한 역시 지금과 같이 세습독재 체제로 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며, 우리도 지난 역사의 상당 기간처럼 극우적인 길을 걸어야하지는 않았을 개연성이 크다.

순수가정으로, 이승만이 아니었으면 북한 같은 세습체제는 아니지만 소련이나 중국식의 현존사회주의 비슷한 길을 갔을 것이라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미군정의 조사결과, 당시 국민의 70%가 사회주의, 7%가 공산주의를 지지하고 14%만이 자본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승만, 아니 그를 도와준 미국이 아니었다면, 사회주의의 길을 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것은 절대다수가 바라는 '자주적 결정'이라는 문제이다. "이승만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길로 갔다면 소련식이 됐다가 망했을 것"이라고 비판할지 모르지만, 그 내용이 무엇이든, 국민들은 다수의 의견에 의해 우리의 길을 선택할 권리와 자유가 있다. 스스로 '민족의 구세주'라고 생각하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다고 누군가가 외세의 힘을 빌려 '우매한 국민을 위한다'며 다수 국민의 의사에 반하여 제멋대로 그 진로를 결정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미군정 편에서 지적했듯이, 미군정이나 이승만 덕에 북한이 아니라 지금같이 잘 살게 됐으니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냥 남아있었으면 지금쯤 아프리카에서 기아와 독재에 시달리고 있을 텐데 노예로 끌려간 덕에 미국에서 그나마 잘 먹고 살고 자유를 누리고 있으니 백인노예상인과 동족을 노예로 팔아넘긴 '악덕 추장'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청남대에 가면 역대 대통령들의 동상이 있다. 그중 유일하게 한복을 입은 동상이 이승만의 동상이다. 그 앞에 서자 그의 비호 아래 해방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친일고문경찰 노덕술에 의해 고문을 당하고 분노해 북으로 넘어 간 의열단장 김원봉, 고문을 당하고 처형까지 당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장재성 등 좌파 독립운동가들이 얼굴이 떠올랐다.

▲ 청남대에 설치되어 있는 이승만의 동상 ⓒ손호철

나아가 제주 4‧3 등 미군정기에 시작된 학살은 논외로 하더라도 여순사건 후 국군이 학살한 여수순천의 민간인들로부터 보도연맹 가입원들과 산청·함양·거창 민간인 등 이승만 정권이 한국전쟁과 관련해 학살한 사람들, 국민방위군으로 끌고가 식량과 의복을 다 빼먹어 굶어죽이고 얼려 죽인 수많은 젊은이들, 조봉암, 김약수 등 이승만이 좌익으로 몰아 사법살인한 정치인들, 그리고 3.15 부정선거에 항의한다고 총을 쏴 죽인 김주열 등 185명의 젊은이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는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 대전 산내골에는 이승만 정권이 한국전쟁 중 저지른 대표적인 민간인학살 중 하나인 산내골 학살을 미군이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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