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생각이 없냐" 반말이 부른 모멸감..'을들의 죽음' 내몰아

정유정 기자 입력 2021. 7. 22. 10:40 수정 2021. 7. 22.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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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전승훈 기자

■ 문화일보 연중캠페인 - 존중합니다 I Respect You

③ 10년 사건기사를 통해 본 ‘반말의 비극’

2018년 강서구 PC방 살인 등

상대편 반말에 격분… 禍 번져

‘무시당한다’는 피해의식 잠재

극단 폭력통해 존엄 회복 바라

주민폭언에 극단 선택한 경비원

사회약자 대한 ‘일상 갑질’ 판쳐

땅콩회항·물잔 갑질·욕설 회장

부·권력에 기반한 폭언도 문제

존중의 말 한마디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뉴스 빅데이터 분석 서비스인 ‘빅카인즈’를 활용해 지난 10년간의 사건 기사를 분석해보니, ‘반말’이 도화선이 돼 벌어진 비극이 무수히 많았다. 상대방의 반말을 듣고 무시당한다는 생각에 살인까지 이어지는 사건이 반복됐고, 막말을 들은 후 모멸감을 느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을’들의 죽음도 계속됐다. 어쩌면 반말이나 막말 대신 ‘당신을 존중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말 한마디가 건네졌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들이다.

◇‘나를 죽인 나의 반말’…살인으로 이어진 반말의 비극 = 최근 10년 동안 ‘존중받지 못한다’는 심리가 살인으로까지 이어진 사건이 수차례 발생했다. 지난해 2월 A 씨는 나이 어린 직장 동료 B 씨가 자신에게 반말했다는 이유로 격분해 둔기로 그를 때렸다. A 씨가 일을 지시하자 B 씨가 “네가 월급을 주냐. 난 사장한테 받는다”고 한 말이 기폭제가 됐다. 지난 2월 광주고법 전주재판부 형사1부(부장 김성주)는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된 A 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2014년에도 반말이 살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오피스텔에 거주하던 유모 씨는 관리인 공모 씨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현장에 있던 공 씨의 아들이 반말 섞인 말투를 쓰자 이에 화가 난 유 씨는 집에서 흉기를 들고나와 공 씨의 목과 가슴 등을 수차례 찔러 현장에서 사망하게 했다. 2015년 의정부지법 형사12부(부장 허경호)는 유 씨에게 징역 16년을 선고했다. 이 외에도 2019년 한강 몸통 시신 사건의 피의자 장대호는 “폭행과 모욕감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고, 2018년 서울 강서구 PC방 살인 사건의 피의자 김성수는 피해자가 자신에게 반말해 “화가 나고 억울했다”고 말했다.

이들의 의식 기저에는 공통적으로 ‘무시당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피해의식은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저서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에서 미국 정신의학자 제임스 길리건의 수감 중 재소자 심층 인터뷰를 소개했다. 재소자들이 범죄를 저지른 진짜 이유를 설명할 때 “그놈이 나를 깔봤다”는 표현이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한다. 살인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었느냐는 질문에 어떤 재소자는 “자부심, 존엄, 자존감”이라고 대답했다. 또 다른 재소자는 “총을 겨눴을 때만큼 존중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모멸감 증폭시키는 갑을 관계 속 반말= 갑을 관계 속 ‘갑’의 폭언과 막말을 듣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건도 반복됐다. 2014년 10월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 경비원 이모 씨는 입주민으로부터 폭언을 견디다 못해 분신을 시도했다. 조사 결과, 입주민 이모 씨는 그에게 유효기간이 지난 음식물을 먹으라고 던지는 등 인격적 모멸감을 준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 인해 중증 우울증 치료를 받게 된 경비원 이 씨는 입주민 이 씨가 질책과 욕설을 한 날 몸에 인화물질을 뿌리고 분신을 시도,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한 달 뒤 숨졌다. 지난해에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강북구 우이동의 한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던 최모 씨는 입주민 심모 씨에게 폭행과 폭언에 시달린 뒤 억울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사 결과 심 씨는 반말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최 씨를 ‘머슴’ ‘종놈’이라고 부른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심 씨는 지난해 12월 1심에서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는 일상의 갑질에 대해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멸시하고 조롱하는 심성이 사회적 관성으로 고착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온갖 몰상식한 요구들을 고스란히 떠안고 울분과 치욕을 꾹꾹 삼키면서, 두려움을 상냥함으로 감춰야 하는 종사자들은 병든 사회의 말단”이라고 분석했다. 현재의 병든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는 무시와 멸시를 당한다는 의미다.

◇‘일상 갑질’ 넘쳐나는 갑질공화국= 재벌의 ‘갑질’ 사건은 지난 10년간 사회면을 장식해 왔다. 2014년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에 이어 2018년 광고사 직원들에게 고성을 지르며 물잔을 던진 조현민 당시 대한항공 전무의 갑질 사건이 논란이 됐다. 같은 해 윤재승 대웅제약 회장이 직원들에게 “정신병자 XX 아니야. 왜 그렇게 일을 해. 미친 XX네” 등의 욕설을 퍼붓는 녹음파일이 공개돼 파문이 일었다. 2017년 김승연 한화 회장의 3남 김동선 씨는 대형 로펌의 신입 변호사들을 상대로 막말을 쏟아냈다. 2016년엔 대림산업의 당시 이해욱 부회장이 운전기사들에게 상습적으로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다는 의혹이 제기돼 공분을 키웠다. 사회 지도층의 책임의식 부재와 기본적인 도덕성 상실은 비난의 대상이 됐다. 부와 권력에 기반해 갑질을 일삼는 태도는 부를 일군 사람에 대한 존경을 없앤다. 이는 결국 사회 전반에 건강한 자본주의 형성을 막고, 천민자본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는 꼴이 된다는 지적이다.

갑질과 하대 문화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도 자리 잡고 있다. 기업 총수가 부하 직원에게 폭언을 하면, 해당 직원은 말단 사원에게, 말단 사원은 하청업체 직원에게 갑질을 하는 먹이사슬 구조다. 갑질이 발생하는 직군도 광범위하다. 지난 2016년 5월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서울남부지검 형사부에서 근무하던 김홍영 검사는 상관인 부장검사로부터 지속적으로 폭행·폭언을 당했다. 현재 관련 재판이 진행 중인 가운데, 지난 5월 유족 측 법률대리인단은 “김 검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바로 전날 퇴근 직전까지 부장검사에게 불려가 폭언을 들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2018년 2월 15일 한 대형병원에서 일하던 박선욱 간호사는 선배와 동료들의 막말 등 ‘태움’을 당하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고, 1년 후 업무상 재해 판정을 받았다. 2019년 1월에는 또 다른 병원에서 일하던 서지윤 간호사가 같은 이유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후 업무상 재해가 인정됐다. 죽음으로 내모는 반말과 막말을 멈추고 존중의 언어를 사용해야 할 때다.

정유정 기자 utoori@munhwa.com

특별취재팀(리스펙트팀)= 손기은·김성훈·정유정(사회부), 안진용(문화부), 이승주(산업부), 송유근(경제부), 권승현(전국부), 송정은(정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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