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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세계문화유산 박탈 두고 분쟁 격화.. 유네스코 '정치 갈등' 심화되나

박용하 기자 입력 2021. 07. 22. 16:47 수정 2021. 07. 22.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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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리버풀 부둣가의 로열 리버 빌딩 앞에 세워진 록밴드 비틀스의 동상 앞으로 21일(현지시간)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리버풀 | AP연합뉴스

인류가 보존해야 할 유산들을 선정하는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국가간 분쟁의 장으로 바뀌고 있다. 영국이 리버풀의 문화유산 자격 박탈에 유네스코의 의사결정 체계를 비난하는가 하면, 호주는 북동해안을 따라 발달한 세계 최대의 산호초인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Great Barrier Reef)의 ‘위기에 처한 유산’ 선정을 두고 의장국인 중국을 정치적으로 공격했다. 과거부터 이어진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정치화 문제가 다시 심화된 양상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21일(현지시간) 중국 푸저우(福州)에서 개최한 제44차 회의에서 영국 리버풀의 세계문화유산 자격을 박탈했다. 세계문화유산이 해제된 것은 지난 2009년 독일의 드레스덴 엘베 계곡 이후 10여년만이다. 2007년 오만의 아라비아 오릭스 보호구역의 해제 사례까지 합하면 3번째다.

앞서 리버풀은 18∼19세기 세계무역 중심지로서 역사적 중요성과 건축학적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받아 2004년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됐다. 하지만 위원회는 리버풀이 최근 진행한 수변 개발 프로젝트나 축구 경기장 신설 계획이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훼손했다고 판단했다. 유네스코는 전쟁이나 난개발, 자연재해, 지나친 관광 등으로 유산이 심각하게 훼손되면 회원국들의 투표를 거쳐 목록에서 해제하고 있다.

이번 결정을 두고 유럽 내에서는 문화유산 보호에 미온적이었던 영국 정부와 리버풀 지역 당국에 대한 비판이 나왔다. 반면 이들 관계자들은 위원회의 불투명한 의사결정 방식을 비판했다. 조앤 앤더슨 리버풀 시장은 유네스코 담당자들이 도시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지 10년이 지났다며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비판했다. 스티브 로터람 시장(지역 담당)은 “최근 몇 년간 있었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지구 반대편에서 내린 결정”이라며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퇴행적 조치”라고 지적했다.

세계문화유산 선정을 둔 논쟁은 오는 23일이면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호주의 산호초 군락인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를 위기에 처한 유산으로 지정할지를 두고 위원회의 결정이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지난달 공개한 결정문 초안에서 기후 변화에 따른 해수 온도 상승 등으로 산호초 개체가 절반으로 줄었다며 목록에 올릴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호주는 위원회의 움직임에 반발하고 있다. 대보초가 위기에 처한 유산에 지정되면 훼손 방지 노력을 충분히 기울여야 하는데, 이 경우 매년 48억달러(약 5조4547억원)를 창출하는 관광산업에 차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훼손 방지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리버풀처럼 문화유산 박탈까지 이어질 수 있다.

이에 호주는 위원회 의장국인 중국의 정치적 의도를 공격하며 공격에 나섰다. 수산 레이 환경부 장관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분명히 그(유네스코 결정) 배후에 정치가 있다. 정치적 요소로 작용해 적절한 절차를 무너뜨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호주가 앞서 코로나19의 중국 책임론을 거론하고, 미국 주도의 안보협력체 쿼드에 참여하며 중국과 각을 세운 상황을 감안한 것이다. 호주는 이에 유네스코에서의 로비를 강화했고, 이번 결정의 보류를 위해 12개국의 지지를 얻은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환경단체들은 “호주의 로비 활동 역시 세계문화유산 제도를 더욱 정치화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둘러싼 유네스코와 각국의 신경전은 과거부터 이어져 왔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2011년 대척점에 있던 팔레스타인이 유네스코 회원국이 되자 이에 반발해 분담금 납부를 중단했으며, 미국은 2017년 팔레스타인의 헤브론 구시가지가 세계유산에 등재되자 완전히 탈퇴했다. 한국도 조선인 강제징용 시설 및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등재를 두고 갈등을 빚었다. 유네스코는 2015년 강제징용 문제를 알리는 시설을 세우는 것을 전제로 일본 메이지 시대 산업 시설들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으나, 일본은 그 약속을 아직 지키지 않았다. 유네스코는 2017년 위안부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보류하기도 했다. 분담금을 가장 많이 내는 일본이 납부 보류 등으로 압박한 결과로 해석됐다.

학계에서도 그간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정치화 현상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자문 기구의 권고안을 따르기보다 정치·외교적 이해 관계나 특정 국가의 로비에 따른 패거리 양상이 전개되며 납득하기 힘는 결정이 나온다는 것이다. 문화유산 선정과 관련해 위원회와 자문기구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사례는 전체의 약 70%까지 늘어난 것으로 전해졌다.

엔리코 베르타키니 교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선정의 정치화’ 논문에서 “유네스코는 이제 다른 유엔 기구와 유사한 정치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용하 기자 yong14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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