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시민들을 위해 만든 시설, 일제가 어떻게 변질시켰냐면 [서울 근대건축 톺아보기]
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 1900년 경 육조거리 정궁인 경복궁 광화문 앞에서, 한양을 동서로 가르는 운종가(雲從街)에 닿았던 넓은 폭원의 육조(六曹)거리 풍경이다. |
ⓒ 서울역사박물관 |
1896년 이전 한양의 주간선도로는 동서를 가르는 운종가(雲從街), 광교에서 숭례문을 향하는 남대문로, 운종가와 광화문을 잇는 육조(六曹) 거리가 전부다. 녹지공간은 남산-인왕산-북악산-낙산으로 둘러싸인 안온한 분지형 공간에, 곳곳에 산재한 궁궐 등 녹음이 우거진 넓은 터가 도시 허파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 탑골공원 대한제국 시기 민의(民意)를 수렴하는 ‘공론의 장’으로 한양 도심에 만들어진 최초의 도시근린공원, 탑골공원 모습이다. |
ⓒ 이영천 |
그럼에도 가로망이 정비되어 도시개조가 이뤄지고, 도심 한복판에 공원이 만들어 진다. 경운궁 주변 가로망 정비와 유럽의 도시공원을 모방한 '탑골공원'이다. 이런 도시개조가 이뤄진 계기는 온건개혁파로 알려진 박정양(朴定陽)과 이채연(李采淵)의 노력이라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내부령 제9호와 가로 정비
조미조약 체결(1882) 5년 후 박정양이 주미전권대신에 임명되어 1888년 1월 도미(渡美)한다. 번역관 이채연은 2개월 앞서 미국에 가 있었다. 박정양이 도미 11개월 만에 반강제로 귀국하고, 이채연은 대리공사 임무까지 마치고 1893년 10월 귀국한다.
▲ 1904년 남대문로 거리풍경 숭례문 주변 성벽에서 바라 본 1904년 남대문로 거리 풍경이다. 가로가 비교적 깔끔하고 도심상업이 활발한 모습이다. 사진 우측 상단 멀리 명동성당 모습이 보인다. |
ⓒ 서울역사박물관 |
이때 내부령 제9호인 '한성 내 도로의 폭을 규정하는 건'이 공포(1896. 9. 29)된다. 내용은 광화문 네거리에서 동대문까지 운종가, 광교에서 남대문까지 남대문로의 길 폭을 55척(16.7m)으로 정하고 가가(假家, 임시로 지은 집)를 정비한다는 것이다. 이는 박정양과 이채연의 미국 생활이 바탕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18세기 후반 계획 신도시로 만들어진 워싱턴D.C.는 이들에게 전혀 다른 신세계요 별천지였을 것이다.
이무렵 한양은 무척 열악한 생활환경이다. 한마디로 비좁은 골목에 생활 하수가 무시로 흐르고 생활 쓰레기가 난무하는 도시환경이다. 이채연이 분주해진다. 경무청 소속 순검들과 골목골목 가가정비를 단속·독려하며 다닌다.
▲ 1911년 종로거리 흥인지문 문루에서 바라 본 1911년 종로 거리 풍경이다. 번듯한 거리에 잘 정돈된 가옥과 활달한 도시활동이 인상적이다. |
ⓒ 서울역사박물관 |
가로가 정비되자 한양이 몰라보게 변하기 시작한다. 불결함이 급격히 제거되고 옹색해 보이던 생활환경이 점차 개선된다. 군색하던 도심상업도 이듬해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모두 가로 정비에 따른 부수적 효과다. 넓은 도로는 산책하기에 적당해지고, 가게는 많은 물건을 진열해 놓고 장사를 한다. 넓혀진 도로에는 가로등이 켜져 밤에도 환하다.
경운궁 중심 도시개조
▲ 경운궁(1911년) 석조전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10년 이후 모습이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경운궁을 정궁 삼아 정치를 펼친다. 이때 한양 가로망도 경운궁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개설한다. |
ⓒ 서울역사아카이브 |
1차 수리가 완료(1896. 9. 28)되자, 죽은 왕후 민씨의 빈전(殯殿)과 혼전(魂殿)을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옮겨 온다. 경운궁을 정궁으로 삼겠다는 명확한 의사표명이다. 그리고 다음날 내부령 9호를 공포하여 대대적인 가로망 정비에 나선 것이다.
가로 정비 사업은 단순히 도로 폭원을 넓히고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정돈하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는다. 곧바로 도시구조 개편으로 이어진다. 도시에서 도로는 토지이용과 도시 활동, 공간구조 중심축을 형성하는 요소다. 새로운 도로망이 사방으로 뻗어간다. 정궁으로 삼고자 한 경운궁을 중심에 둔 도시구조 개편이다.
▲ 한양 중심가 가로망 조선총독부가 있는 것으로 보아 1926년 이후 사진이다. 경성부청(현 서울시청)을 중심으로 태평로, 소공로, 을지로 등의 가로망 윤곽이 뚜렸하다. 이들 가로는 모두 '내부령 9호'에 의해 조선이 개설한 도로다. 현 한국은행 건물과 총독부 철도호텔(현 조선호텔) 모습도 같이 보인다. |
ⓒ 서울역사박물관 |
도시 개조는 이채연이 손발이 되어 1897년에도 계속된다. 경운궁을 중심으로 북쪽은 황토현을 깎고 개천에 다리를 놓아 육조거리에 맞닿는 지금의 태평로를 개설하고, 동쪽은 구리개길(을지로)을, 동남쪽은 소공로를, 남쪽으론 숭례문에 잇닿는 길을 새로 낸다. 지금의 서울시청역 중심의 가로망 체계가 이때 기본 틀을 잡는다.
민의를 수렴하려 만든 탑골공원
한양은 성리학 이념에 충실한 계획도시다. 고종은 이런 도시에 어떤 방법으로든 근대적 상징성을 관철시키고 싶어 한다. 가로 정비와 더불어 핵심은 도시공원이다. 실무를 맡은 이채연은 워싱턴의 격자형 가로망과 상징적인 광장, 공원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다.
▲ 대원각사 비 탑골공원에 남아있는 대원각사 비석이다. 탑골공원을 지으면서 원각사 10층 석탑과 함께 공원 조형물의 하나로 기능한다. |
ⓒ 서울역사박물관 |
터는 이미 크고 작은 가가들이 점령한 상태다. 아름다운 원각사 10층탑은 무너져 있으나 훼손되지 않은 상층부 3개 층을 옆에 두고 서 있다. 3개 층은 1946년 2월 미군 공병대가 기중기로 다시 올려 세운다. 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가 덩그마니 자리한다.
공원은 가가를 철거한 뒤, 빈 땅에 나무를 심고 간단한 벤치·울타리를 두른 수준이다. 이 과정에 총세무사이자 탁지부 고문인 영국인 맥리비 브라운(Mcleavy Brown)이 등장한다. 이 자가 고종에게 탑골공원 조성을 건의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아관파천 당시의 정황상 신빙성은 낮아 보인다.
공원은 민의(民意)를 수렴하는 '공론의 장'이라는 상징으로 조성된다. 공원 고유 기능보다 근대국가의 상징적 가치에 방점을 둔다. 다소 협소(15,721㎡)한 공간에서 민심을 읽어내려는 장소로, 왕이 시민들에게 베풀어 준 시설인 셈이다.
▲ 탑골공원 팔각정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으로 지어진다. 팔각은 황제의 상징으로, 대한제국 시기엔 이곳에서 황실관현악단 연주장소로 사용되기도 한다. 1919년 3.1독립선언문이 낭독되는 역사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
ⓒ 이영천 |
팔각정은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어진다. 경복궁 중건과 창덕궁 수리에 참여한 도편수 최백현이 맡는다. 팔각정은 다름 아닌 '황제가 인정한 민권'의 상징이다. 그 후 황실관현악단 연주장소로 사용되면서 장안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일제가 변질시킨 탑골공원
▲ 1910년 탑골공원 팔각정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다. 원각사 10층 석탑이 보인다. 상층부 3개 층이 임진왜란 때 무너져, 탑 옆에 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공원은 전체적으로 단출한 모습이다. |
ⓒ 서울역사박물관 |
찻집은 물론 요정까지 들어서, 공원이 요정 앞마당으로 변해 버린다. 출입제한으로 일요일에만 출입가능하고, 그날은 공원에서 관현악을 연주한다. 음악을 듣기 위해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자, 1913년 7월부터 평일에도 일반에 공개하기에 이른다. 몇 년 후엔 야간에도 개장하여 시민들 휴식처라는 그럴싸한 선전도구로 활용한다.
1919년 정월 고종이 죽는다. 공원 내 팔각정에선 죽은 고종의 뜻대로 최대의 민의가 발휘된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어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되는 역사적 장소로 기록되기에 이른다.
한양을 근대도시로 변모시켜 자강(自彊)의 길로 나아가려는 몸부림이 눈물겹다. 하지만 도시는 권력자가 아닌 시민의 안녕과 건강, 행복을 담보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래야 민의(民意)가 바탕인 궁극의 힘이 발휘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민의란 늘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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