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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쇠붙이인 줄 알았다..씻어보니 한글, '흥분이 시작됐다' [공평동 유적 현장을 가다]

김종목 기자 입력 2021. 08. 01. 13:15 수정 2021. 08. 02.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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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슬슬 내려가 보죠.” 지난달 20일 오후 오경택 수도문물연구원 원장을 따라 서울 종로구 공평동 유적 발굴장 철제 대문에서 공사 차량이 오가는 길을 내려갔다. 오 원장이 ‘공평구역 제15·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 중 나 지역 동쪽 끝을 가리키며 “저곳”이라고 말한다. ‘ㅭ’, ‘ㆆ’, ‘ㅸ’ 등 조선시대 동국정운식 표기가 쓰인 한글 금속활자 등 여러 문화재를 발견(▶기사보기 : 훈민정음 시기 한글 금속활자 발굴)한 곳이다. 종로 2가 교차로의 서북쪽 모퉁이 건물 뒤편, 지표면에서 3m가량 내려간 지점이다.

■그저 쇠붙이인 줄 알았다

오경택 수도문물연구원 원장이 지난달 20일 공평 15·16 지구에서 한글 금속활자 등 유물 출토를 설명하고 있다. 김종목 기자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수도문물연구원은 2020년 3월9일 발굴 조사에 들어갔다. 1년3개월이 흐른 지난 6월1일 발굴단원이 쇠붙이 하나를 찾았다. 연구원들이 그 소식을 듣고 확인하니 총통이었다. 조사 결과 밝혀낸 건 승자총통(1583년) 1점, 소승자총통(1588년) 7점이다. 보고를 받고 다음 날 오 원장이 현장에 갔다. 다른 쇠붙이들도 발견했다. 포탄을 엎어놓은 형태의 동종의 파편, 두 마리 용 형상을 한 용뉴(용 모양 손잡이)를 캐냈다. 별자리를 이용해 시간을 가늠한 일성정시의, 자동 물시계의 부품인 주전으로 보이는 동판도 찾았다.

“건물 고막이(벽체의 기초) 옆에서 쇠붙이들이 나왔죠. 총통하고 일성정시의를 수습했더니 항아리 편이 하나 뚝 떨어지는 거에요. 항아리가 토압(土壓)으로 깨졌던 거죠.”

발굴 당시 항아리 모습. 한글 금속활자는 항아리 안, 동종 등은 항아리 밖에 묻혔다.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공평동, 청진동 일대 유적에서 항아리는 곧잘 나온다. “항아리를 한 스무 개 출토하면 한 개 정도만 뭐가 들어 있죠.” 이 항아리들과 성격은 다르지만, 공평 1·2·4지구의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쪽에서도 진단구를 여러 점 발굴했다. 건물을 지을 때 안전과 번영을 기원하려 묻는 항아리다. 별다른 내용물을 확인한 적은 없다. “항아리에서 공깃돌 같은 게 한 두 개 떨어져서 현장에서 바로 씻어 보니 금속 활자였어요. 항아리를 싸서 바로 연구원으로 가서 분류 작업을 했죠.”

항아리에서 나온 한글 금속활자와 주전.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오 원장은 ‘쇠붙이들’이 처음 나왔을 때 크게 중요한 유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세척한 쇠붙이에서 한글이 드러난 걸 보곤, 흥분이 시작됐다. 활자 전문가들을 불러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정조 시기 사회가 발달하고, 문화 저변 확대 같은 게 일어나다 보니, 조선 후기 금속활자는 남은 게 수십만 점 정도 돼요. 그런데 조선 전기 금속 활자가 거의 없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세조 즉위년인 1455년 주조한 ‘을해자’가 30점 정도 있죠. 이 항아리 하나에서 대여섯 종류 활자 1600여 점이 나온 거예요. 전문가들도 ‘못 보던 게 나왔다. 을해자, 갑인자일 수도 있다. 이건 국보급이다. 활자 연구를 다시 해야 할 정도’라며 격앙됐어요.” 동국정운식 표기는 인쇄물로만 확인할 수 있었다. 세종 때 4개만 만든 일성정시의도 문헌에만 나온다.

오경택 수도문물연구원 원장이 지난달 20일 항아리 발견 지점에서 발굴한 유물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김종목 기자

■재개발은? 유물은 어디로?

청진동 르메이에르 빌딩 재개발을 할 때부터 서울 도성 발굴이 시작됐다. 누군가 석재를 옮겨 나가는 걸 보고 “문화재가 반출되고 있다”고 관청에 신고했다. 실제 파보니 문화재가 나왔다. 이후 서울 도성 안에서 빌딩을 지을 때는 문화재 조사를 하도록 했다.

공평 1·2·4 지구 유적을 보존한 공평도시유적전시관. 15·16지구도 전시관을 만든다. 사업자에게 기부채납 받은 면적은 4745㎡로 공평도시 유적전시관(3818㎡)보다 넓다. 김종목 기자

공평 1·2·4지구는 2010년 문화재 지표조사, 2014~15년 매장문화재 발굴조사를 거쳐 만들었다. 유적 일부만을 떼어내 신축 건물에 옮겨 전시하는 게 아니라 유적을 그 자리에 전면 보존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 결과물이 지금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다. 교보문고 뒤 광화문 D타워 한옥 구조물 유리바닥 아래로는 청진동 시전 터를 볼 수 있게 해뒀다.

서울시는 지난달 22일 15·16지구에 국내 최대 유적 전시관을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재개발사업 조건 중 용적률을 803%에서 1052%로, 높이를 70m에서 104m로 완화하는 대신 전시관 면적 4745㎡를 기부채납 받기로 했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3818㎡)보다 넓다. 건물은 기존 17층에서 25층으로 높여 지을 수 있게 된다.

오 원장은 발굴 문화재가 새 전시관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수장 공간, 관리 인력을 전시관에 두긴 힘들 겁니다. 국보 지정 가능성도 있는데, 진품을 두면 보안 시설도 갖춰야 하거든요. 이런 한계 때문에 새 전시관엔 모조품을 둘 가능성이 커요. 진품은 문화재청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쳐 귀속될 곳을 정할 겁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서울시가 유력한 곳들이죠.” 오 원장은 “어디로 가든 15·16지구에서 발굴한 유물은 한데 같이 가야 한다”고 말했다

■누가, 언제, 왜?

다시 발굴 때 이야기를 들었다.

“동종같이 덩어리가 큰 건 항아리 밖에 두고, 금속활자처럼 작은 건 항아리 안에 뒀어요. 이걸 그냥 땅에 묻어두면 나중에 다시 수습하기 어렵잖아요.” 쇠붙이들은 다 동(銅)이다. 15세기까지 조선은 주조 기술이 좋았다. <태종실록>을 보면, 1417년(태종 17) “대마도 수호 종정무가 동철(銅鐵) 5백 근을 보내었으니, 종(鍾)을 본보기로 만들어 주기를 청”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삼국 시기 장신구·마구, 통일신라·고려 때는 불상·범종에 쓴 금속이다. 값어치는 어느 정도일까. 조선 전기와 후기를 1대 1로 비교할 순 없는데, 대략 가치를 짐작할 기준 하나는 있다. ‘조선숙종시대의 광업 및 주전연구’(김양구, 1973) 논문엔 1801년 이후에는 구리 1근의 가격이 은 1량으로, 현대 시세보다 10배 높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육하원칙 중 풀리지 않은 의문을 두고 오 원장은 지금 공평동이 시전 중심가인 운종가였다는 점에 주목한다. “발굴 지역에 시전 상인 창고가 많았던 건 분명해 보여요.” ‘시전 상인이 임진왜란(1592~1598)이 났을 때 값어치가 나가는 구리 중 작은 것(금속활자)은 항아리 안에 두고 큰 것은 곁에 묻고 피난 갔다’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중인일까?

■뻘밭 곳곳에 내가 흘렀다

“양반이 살았을 수도 있죠.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 가면 능성 구씨 가옥도 있고요” 구수영(1456~1524)의 집이다. 세종의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의 사위다. 영응대군 형인 세조가 동생에게 구수영을 사윗감으로 정해주며 이곳에 살 곳을 마련해줬다. “하지만 지금 보시다시피 비가 오면 죽탕이 되잖아요. 양반이 이런 데 살았겠냐는 말이죠.” 이날 마른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지기도 했다. 유적 내 여러 웅덩이에 물이 고였다.

종로타워(맨왼쪽) 옆 건물이 센트로폴리스다. 이 건물 지하에 공평도시유적관이 들어섰다. 15·16지구 철제 담장에서 센트로폴리스까지 거리는 180m가량이다. 포크레인 뒤 승동교회 자리는 조선 전기 언덕이었다. 김종목 기자

오 원장은 북쪽 펜스에 바로 붙은 승동교회를 가리켰다. 항아리가 발견된 지점과 비교하면 대략 5m 위다. “조선 전기 저기가 언덕이었어요. 저기서 시작된 능선이 ‘이건희 기증관’ 부지 후보지 중 하나인 송현동까지 이어졌죠. 양반들은 조망 좋고, 배수도 잘 되는 북촌 같은 데 주로 거주했어요. 이곳엔 중인이나 관하 아전이나 아속들이 살았고요. 출퇴근 거리도 가깝고, 관리에도 유리했겠죠.” 주변엔 하천이 많았다. 안국동천, 백운동천, 삼청동천 등이 청계천으로 이어졌다. 고산 김정호(1804~1866)의 ‘수선전도(首善全圖)’에 이 지천들이 표시됐다. <조선왕조실록>엔 청계천 일대 홍수와 인명 피해 기록이 여럿 나온다. 그 천들은 일제 강점기와 광복 뒤 복개됐다.

오 원장은 배수로가 조선 시대 도시 계획과 배수 체계를 확인할 중요 유구라고 말한다. 저 건물 1층에 귀금속 상점이 들어섰다. 김종목 기자

유물 발굴 전 ‘나 구역’의 주 발굴 대상 유구는 배수로다. 항아리 발견지 오른쪽으로 5m가량 떨어진 곳에 동-서 방향으로 난 배수로가 있다. “당시 도성의 도시 계획이나 배수 체계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 유구죠. 배수로가 건물들끼리 불법 증축을 막는 경계 역할도 한 듯하고요.”

■신도시 개발과 재개발이 이뤄졌다

“조선이 건국되고 한양에 요즘으로 치면 신도시 개발을 한 겁니다.” 조선의 시전 행랑은 1412~1414년 건설됐다. 지금의 종로 1~3가, 남대문로에 2000여 칸이 형성됐다. 공평동, 수송동, 인사동, 청진동을 아우르는 견평방(堅平坊)엔 의금부, 전의감 같은 관청, 순화궁, 죽동궁 같은 궁가가 들어섰다. 시전, 관청, 궁가가 어우러진 한양 중심지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터졌다. 시전은 임진왜란 때 대부분 파괴됐다. 이후 도시 재건이 이뤄졌다. “지금 보존 상태가 좋은 건 16세기 겁니다. 전란이 끝나고 종로 일대에서 이뤄진 재개발은 큰 단위가 아니라 각각의 집들을 새로 짓는 거였어요. 기술이 없다 보니, (16세기) 터 위에 다시 짓는 거죠. 그래서 보존이 잘 된 겁니다. 18세기는 17세기 것들을 파괴하고, 19세기는 18세기 것들을 파괴해서 그때 것은 별로 남아 있지 않거나 상태가 좋지 않아요.”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의 유구나 유물도 대부분 16세기 것들이다.

조선시대 돌들 위로 일제시대 벽돌이 층층이 쌓여 있다. 김종목 기자

“항아리를 발굴한 곳 밑에는 15세기 집터가 또 있어요. 습지이다 보니 사람들이 다져진 터에 다시 흙을 붓고 계속 올려 지었죠. 배수로도 올라오고, 집 석축도 올라오고요. 20세기까지 이어진 거죠.” ‘나 구역’ 모서리 끝에는 조선 시대 돌덩이 위로 일제 강점기 벽돌이 드러난다. 일제 강점기 종로대로가 정비되며 다져진 지표 높이가 지금까지 유지됐다. 오 원장이 말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 땅 밑에 600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다 남은 거죠. 문헌으로만 전하던 유물들도 드러났고요. 로마 같은 도시처럼 문화와 같이 숨 쉬는 거죠.”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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