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알뫼달렌 정치박람회를 열자

입력 2021. 8. 2.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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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SOCIETY] 실패하는 정치의 원인 진단과 대안 모색

[윤호창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상임이사]
올림픽 시즌이 돌아왔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도쿄올림픽이지만, 지인과의 만남도 어렵고 여럿이 둘러앉아 회포도 풀기 어려운 요즘 같은 날엔 젊은 선수들의 몸짓과 눈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청량감이 흐른다. 스스로 몸을 놀려 땀을 흘리는 것보다야 못하지만, 거의 모든 활동이 막히고 코로나 우울증에 걸린 이들에게 스포츠를 보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치료제다.

돌아온 정치 시즌, 우리 정치의 자화상

정치의 시즌도 돌아왔다. 7개월 뒤면 대통령 선거가, 10개월 뒤면 8번째 지방선거가 실시된다. 대통령 선거에 나선 이들의 가슴은 이미 8월 염천보다도 더 뜨겁다. 코로나19의 창궐도,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도 이들의 발걸음을 막긴 어렵다. 코로나19도, 기후변화도 정치를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국민들은 그렇게 믿지 않지만, 정치에 뜻을 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니체가 말한 '권력에의 의지'가 남다른 사람들이다.

스포츠와 정치,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닮기도 했지만 물과 불처럼 상극이기도 하다. 스포츠가 몸으로 하는 정치라면, 정치는 말로 하는 스포츠다. 둘은 단기간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일이며, 상대방을 이겨야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많이 닮았다. 하지만 말보다는 몸이, 정치보다는 스포츠가 훨씬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말은 웬만한 지성으로도 거짓과 진실을 분별하기 힘들지만, 몸은 그 자체로 투명하고 정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아가는 데는 스포츠보다 정치가 백배 천배 중요하다. 우리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와는 술 한 잔 마실 일 없겠지만, 내가 뽑는 동네 이장과 시장은 밥과 술을 먹으며 함께 살아갈 궁리를 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미디어에 정치가와 정치평론가의 말들이 홍수처럼 밀려온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 곧장 개벽이라도 이뤄질 듯하지만,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미 말과 정치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상실됐기 때문에 정직한 몸과 스포츠에 대한 열광은 더욱 강해진다.

촛불시민혁명과 문재인 정부

대한민국이 근대국가를 형성한 이후에 몇 차례의 혁명적 전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전환과 혁명은 없었다. 60년의 4월이 그랬고, 80년의 5월이 그랬고, 87년의 6월이 그랬다. 골을 넣을 수 있는 위치인 문전까지 들어가긴 했지만, 우왕좌왕하다 똥 볼을 차버리는 과거의 한국 축구와 정치는 많이 비슷했다. 그래도 그동안 축구는 월드컵 4강에도 들고, 올림픽에서 동메달도 따기도 했지만, 우리나라의 정치는 여전히 후진적이다.

지난 2017년 시민들은 '촛불시민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엄동설한을 견디며 문재인 정부에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문재인 정부가 방해물 때문에 갈 길을 못 간다고 투덜거리자, 시민들은 2018년 지방선거와 2020년 총선을 통해 걸림돌과 방해물을 모두 제거해주었다. 그야말로 아낌없는 지지였으며, 전폭적인 후원이었다. 그런데 지난 4년을 뒤돌아보며 헛된 말에 속았다는 이들이 늘어났다. 정부가 부동산 거품을 제거해주리라 믿으며 기다렸던 사람들은 '벼락거지'가 됐고, 가진 자와 없는 자들의 격차는 더 벌어졌고, 수도권 집중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국가는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자화자찬(실제로 총량 기준으로는 진입했음)을 하지만,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대다수의 보통 국민들은 양극화와 불평등 속에서 여전히 어렵게 오늘을 살고 있다.

실패한 여의도 정치, 시민들의 직접 정치를 허하라

차기 대권을 노리는 이들은 다시 화려한 말과 공약을 쏟아낸다. 기본소득, 신복지, 자치분권국가 등이 그것이다. 경험적으로 볼 때, 선거철을 맞아 많은 분들이 다시 이들에게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되지만, "역시나"라는 결말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라는 문재인 정부의 화려한 어록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여의도 정치는 왜 이렇게 실패할 거듭할 수밖에 없을까?

우리 사회의 정치가 실패를 거듭하고,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라운드를 절반 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편협함에 있다. 정치는 시민들에 의한 직접정치와 직업정치인에 의한 대의정치라는 두 날개로 함께 움직여야만 온전한 날갯짓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한쪽 날개는 제대로 움직인 적이 없다. 시민들에게 정치는 선거 날 투표하고, 지지하는 후보에게 열광하는 일 정도다. 근대 민주주의의 시작을 연 장 자크 루소가 "대의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은 선거 날 하루만 자유롭다"고 지적한 것처럼, 시민들의 자유 확장을 위해서는 정치와 민주주의의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

새로운 전환의 출발은 직접민주주의와 시민 정치의 확대에 있다. 직접민주주의의 3대 제도라고 할 수 있는 '국민투표, 국민발안, 국민소환'의 제도적 장치는 아직 우리 헌법에 보장되어 있지 않다. 국민투표가 있기는 하지만, 헌법의 규정에 의거해 국민이 직접 투표안건을 정할 수 있는 레퍼렌덤(Referendum)과 통치자가 안건을 정하고 국민투표에 붙이는 플레비시트(Plebiscite)로 구분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플레비시트는 국민투표로 인정되지 않는다. 우리 역사에서 진행된 6번의 국민투표는 모두 플레비시트 유형이었으며, 그 중에서 5번은 박정희 정권이 자신들의 독재를 합리화하기 위해 실시했다.

2020년 3월에 국회 정원의 절반이 넘는 국회의원이 국민발안제를 도입하자는 원 포인트 개헌안을 발의했다. 현재 대통령과 국회에만 있는 헌법 개정 발의권을 국민들에게도 주자는 제안이었지만, 보수야당의 거부로 폐기되고 말았다. 민폐를 끼치는 국회의원을 임기 중이라도 소환하자는 제안은 국민들에게 뜨거운 관심사지만 제도화는 난망하다. 지방자치법에서도 주민소환, 주민발의, 주민투표법이 형식적으로 갖춰져 있지만, 문턱이 높아 실효성은 없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지방자치지만, 지난 30년 동안 주민들에 의해 소환된 지방의원은 단 두 명에 불과했다. 시민들은 선거라는 이름을 통해 주권자의 권한을 위임하는 것 말고는 정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2014년 알뫼달렌 축제 모습. ⓒwikimedia

스위스와 북유럽의 시민정치

스위스에서 시민들과 주민들의 권한은 막강하다. 유권자 10만 명이 동의하면 헌법 개정을 시작할 수 있고, 5만 명의 참여가 있으면 각종 법률의 제정과 개정도 시작할 수 있다. 해마다 분기별로 4차례의 주요 현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진행해 국민들이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UN이 선정한 가장 행복한 국가로 4년 연속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핀란드도 유권자의 1.2%에 해당하는 5만 명이 발의한 안건을 국회에서 자동적으로 논의해야 하는 국민발안제를 2012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시민주권의 강화가 분열과 대립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보수야당은 반대하지만, 오히려 직접민주주의의 강화는 사회통합과 국민화합으로 이어진다. 시민들의 숙의와 토론을 거쳐 결정된 만큼, 결과에 대해 국민들이 승복하기 때문이다. 스위스와 북유럽이 우리처럼 사회갈등이 크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는가? 이들 국가가 사회갈등이 적고 사회통합력이 높은 것은 이렇게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제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가 자리 잡는 데는 '보충성의 원칙'(principle of subsidiarity)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작은 단위나 하급기관이 할 수 있는 일에 우선적으로 권한과 예산을 주어야 하며, 상급단위는 이들이 보다 잘할 수 있도록 보충하고 지원하는 역할에 그쳐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잘 되지 않는 일 중의 하나다. 이미 대부분의 권한이 청와대, 국회, 대법원 등 최상층에 있는 데다, 하급기관이나 작은 공동체에서 좋은 성과와 모델을 만들면 상급기관은 오히려 자신의 작품처럼 만들고 스스로 공치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전국의 절반에 가까운 지역에서 마을공동체를 위한 조례를 만들고, 지원조직을 만들어 육성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활성화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권한·책임·예산을 주지 않고, 주민들을 그저 동원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10년 가까이 시범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는 주민자치회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관변조직에 가까운 주민자치위원회를 일신하기 위해 주민자치회 설립을 육성했지만,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주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관료들이 보충성의 원칙에 대한 이해가 없고, 시민들 또한 자신의 권리와 좋은 사례를 보지 못한 탓이 크다.

도쿄 올림픽과 알뫼달렌 정치 축제

아베정권이 일본의 부활을 목표로 추진한 도쿄 올림픽이 코로나19로 인해 힘겹게 진행되는 모습이다. 코로나19 확진자는 날로 폭증하고 있으며, 무관중으로 인한 적자도 적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시민들의 반발과 저항, 추락한 국가와 정부에 대한 신뢰라고 볼 수 있다. 직접민주주의가 발달한 스위스였다면 올림픽 진행 여부를 국민투표에 붙였을 것이고, 국민들의 토론과정을 통해 적어도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후유증을 최소화했을 것이다.

복지국가 스웨덴에서는 매년 7월이면 고틀란드섬의 알뫼달렌이라는 곳에서 스웨덴의 정당과 정치인, 사회단체와 시민들이 모여 '알뫼달렌 정치박람회'이름으로 정치 축제를 8일간 연다. 스웨덴의 8개 정당들이 하루씩 돌아가며 자신들의 정책과 현안에 대한 생각을 밝히고 토론하는 이 정치 축제는 50년 넘게 운영됐다. 축제 기간에만 10만 명 이상이 방문한다는 알뫼달렌은 대표적인 여름 휴가지가 되었으며, 정치박람회는 세계적인 관광 상품이 되었다. 북유럽 5개국 모두가 언제나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국가 TOP10에 드는 이유를 알뫼달렌 정치 축제 하나만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지난 반세기 동안 산업화와 민주화에서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비약적인 성장을 거두었지만, ‘부강한 국가, 불행한 국민’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불행한 국민의 모습을 극복하기 위해 여의도 대권주자들은 화려한 공약과 정책을 선보이지만, 핵심은 시민들에게 주권자의 권한의 되돌려 주는 일이다. 지난 역사를 봐도, 위기는 항상 위정자들이 일으켰고, 국민들은 온 몸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불행한 국민에서 벗어나려면 하루빨리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한국판 알뫼달렌 정치 축제'를 열고 주권을 되돌려 받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 윤호창은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시 마을공동체지원센터, 사회적경제, 도시재생센터 등의 사회혁신분야의 전문가로 활동해왔으며,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다. 현재는 (사)복지국가소사이어티 상임이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직접민주주의에 기초한 전국민회의 설립에 참여하고 있다.

[윤호창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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