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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버스에 쓰인 위험한 문구, 여러 사람 홀렸다 [권신영의 해리포터 너머의 영국]

권신영 입력 2021. 08. 04.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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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기획 - 가짜뉴스와 프로보커터가 지배하는 세상] 역사로 본 가짜뉴스 ③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전 세계가 가짜뉴스와 프로보커터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들은 각종 사회 이슈부터 정치담론에 이르기까지, 왜곡과 소란을 일으키며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합니다. 세계 각국에서 맹위를 떨친 가짜뉴스와 프로보커터들의 활동을 조명하고, 이에 대한 각 나라의 고민과 대안을 소개합니다. 이와 함께 이 현상을 역사적으로 톺아봅니다. <편집자말>

[권신영 기자]

2016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올해의 어휘(Word of the Year)로 '탈진실(post-truth)'을 선정, 이것이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언어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말했다. 탈진실의 사전적 정의에 대해서는 "여론 형성에 있어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적 호소(emotional appeal)가 더 영향력을 발휘하는 환경과 연관되는" 형용사라고 설명했다.

다음해인 2017년, 또 다른 영어사전 회사 콜린스(Collins)는 올해의 어휘로 '가짜뉴스(fake news)'를 선정했다. 콜린스에 따르면 '가짜뉴스'는 "뉴스 보도라는 이름으로 배포되는 잘못된, 때로는 자극적인 정보"를 의미한다. 2000년대부터 미국 TV에서 사용되기 시작, 2016년 이후 사용 빈도가 365%나 늘었다고 한다.
 
ⓒ unsplash
 
탈진실과 가짜뉴스, 두 단어의 폭발적 사용 증가를 설명함에 있어 두 사전 회사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분기점은 2016년이다. 다시 말하면, 2016년을 계기로 우리 시대가 사실보다는 감정, 객관적 정보보다는 주관적 호소에 기울어지는 경향이 일상 언어로 나타날 만큼 분명해졌다는 뜻이다.

수면 밑으로 진행되던 것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계기로는 2016년 6월의 영국 브렉시트 선거와 11월 미국 대선이 있다. 당시 두 선거는 포퓰리즘으로 떠들썩했다. 포퓰리즘이란, 99%의 '보통' 서민 vs. 1%의 '부패한' 엘리트로 대립 구도를 설정한 후 99%의 대중의 뜻을 관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포퓰리즘의 서민 vs. 엘리트 구조는 극좌에서 극우에 이르는 모든 정치 이데올로기와 결합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유연하다.  

영-미 정치사에서 포퓰리즘은 주류 정치 무대로 파고들기 어려웠다. 폭이 넓은 중산층과 양당제를 기반으로 해서 민주주의를 안정적으로 운영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 전 세계적으로 심화되는 양극화는 포퓰리즘이 두 사회 속으로도 파고들 여지를 만들었다. 그 틈을 이용하여 등장한 이가 도날드 트럼프와 보리스 존슨, 두 명의 정치 신인이었다.

'가짜뉴스'는 트럼프와 존슨의 포퓰리즘적 구호에 공통적으로 등장했다. 기존 언론과 정치계는 정보의 오류를 지적했지만 이들에 대한 대중적 지지는 꺾이지 않았다. 객관적 정보가 감정적 지지를 설득하기 어려운 '탈진실 시대'(post-truth era)를 알리는 신호인 셈이다.

이 글에서는 가짜 뉴스, 포퓰리즘, 탈진실의 삼자 관계를 2016년 브렉시트 투표를 통해 살펴보겠다. 

'탈진실 시대'의 신호탄, EU 탈퇴 논란

브렉시트 국민 투표는 2015년 보수당 데이비드 캐머런 수상이 내건 정치적 모험이었다. 2010년 과반에 못 미친 총선 승리로 인해 자유 민주당(Liberal Democrat)과 연합 내각을 세울 수밖에 없었던 그는 2015년 총선에서 단독 내각을 목표로 했다. 의회 내 과반수를 넘기기 위해 EU잔류/탈퇴를 국민 투표로 결정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그리곤 기존 보수/노동당 구조를 흩트리며 선거에서 승리, 단독 내각을 세웠다.
  
 브렉시트 반대 유세 중인 데이비드 캐머런
ⓒ 연합뉴스
 
캐머런 수상이 과신했던 것은 그의 보수당 장악력이었다. EU 잔류를 지지했던 캐머런 수상은 당내에서 자생하던 EU 탈퇴 지지 세력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각의 몇몇 강경파와 당시 런던 시장이던 보리스 존슨이 탈퇴 지지를 감행하며 이탈했다. 캐머런은 야당인 노동당이 당 차원에서 잔류 지지를 공식화해 주기를 원했지만 노동당 역시 내부 갈등을 겪고 있었다. 결국, 보수당과 노동당 주류 양당 내 탈퇴 지지 세력과 극우로 분류되는 영국 독립당(UKIP)이 탈퇴 운동 진영을 구성, 잔류 측과 경쟁 구도를 형성했다.
팽팽한 구도 속에서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탈퇴 측에서 선거 운동용으로 만든 빨간 버스였다. 버스에는 4개의 구절이 쓰여 있다.
 
우리는 매주 EU로 350만 파운드 (5500억 원)를 보낸다
이것을 우리의 NHS 기금으로 사용하자
탈퇴에 투표하라
권한(통제권)을 되찾자
 
 브렉시트 탈퇴 측에서 선거 운동용으로 만든 빨간 버스. 4개의 구절이 쓰여 있다.우리는 매주 EU로 350만 파운드 (5500억 원)를 보낸다 / 이것을 우리의 NHS 기금으로 사용하자 / 탈퇴에 투표하라 / 권한(통제권)을 되찾자
ⓒ 연합뉴스
 
호불호를 떠나 자타공인, 브렉시트 투표의 향방을 결정한 문구였다. 탈퇴 진영 운동의 총기획자 도미니크 커밍스(Dominic Cummings)의 작품으로, <비비시>(BBC)는 그를 철저히 데이터에 기반을 두고 마음을 사로잡는 문구를 만드는 재주를 가진, '냉철한(ruthless)' 전략가로 설명한다.   

커밍스와 브렉시트 선거는 2019년 토비 하인스(Toby Haynes)가 연출한 TV영화 <브렉시트>(The Brexit: the Uncivil War)에서 잘 묘사된다. 커밍스 역을 맡은 베네딕트 컴버배치(Benedict Cumberbatch)는 책상으로 올라가 "3억 5천만 파운드와 터키(350 million quid and Turkey)"를 반복해서 외친다. 커밍스를 바라보던 보리스 존슨과 선거 운동원들은 그의 말을 따라 말하며 숙지한다.

3억 5천만 파운드는 영국이 매주 EU에 보내는 돈으로 EU로 빠져나가는 국부, 혹은 영국이 EU에게 잃은 것을 상징하고, 터키(Turkey)는 이민자 혹은 외부인을 상징한다. 경제적 통제권과 국경 통제권을 상징하는 이 둘은 영국이 EU를 탈퇴해야 할 이유다.

영화에서 커밍스는 보리스 존슨에게 그가 구상한 빨간 버스를 보여준다. 보리스 존슨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영국의 국가의료시스템을 가리키는 NHS(National Health System)였다.
 
- 보리스 존슨 : "잠깐 잠깐, NHS를 사용한 거야?"
- 커밍스 : "맞아, 경제와 권한(통제)을 결합한 NHS."
- 보리스 존슨 : "아... 아… 저 로고."
- 커밍스 : "진짜 NHS 로고야."
 
약간 망설이던 보리스 존슨은 곧 "멋지다"라고 말한다. EU 탈퇴를 통해 잃어버린 권한(통제권)을 되찾음으로써 '우리(영국)'의 국가의료시스템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전략적 메시지에 만족한 것이다.
 
 브렉시트 찬성 캠페인 펼치는 보리스 존슨
ⓒ 연합뉴스
 
빨간 버스, '매주 3억 5천만 파운드'의 위력

'매주 5500억 원(3억 5천만 파운드)'은 투표 운동판을 순식간에 흔들었다. 탈퇴 지지가 3분의 1, 잔류가 3분의 1이기 때문에 양 측은 부동층 공략에 집중해온 터였다. 캐머런 수상을 통해 조직적 인적 심리적 유리함을 확보한 잔류측은 단일 시장의 이점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반면 커밍스는 단일 시장에 대한 설명은 대중들에게 호소력이 없다고 판단, 영국의 EU 분담금을 주단위로 나눠 "5500억이 매주 EU로 간다"는 문구를 만들었고 이는 적중했다.

'매주 5500억 원'은 검증되지 않은 주장들과 결합되며 영국 사회를 더 흔들었다. 영국이 다른 국가와 무역 조약을 맺을 때 EU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허위 소문은 주권 위기론으로 격상되었다. EU가 비민주적이고 나치 독일과 비슷하다는 극우적 주장과 맞물려 매주 5500억 원은 EU에 대한 이미지를 급속도로 추락시켰다. 그 절정에는 EU가 심지어 군대까지 창설하려고 한다는 과장된 정보도 있었다.

'매주 5500억 원'의 파괴력에 놀란 잔류측은 이를 거짓말이라 규정, 논리적으로 깨기 시작했다. 우선, 5500억을 영국 정부가 EU로 보낸다는 것은 사실 관계가 틀렸다고 지적했다. GDP의 1%를 분담금으로 내는 EU규칙과는 달리, 1980년대 마거릿 대처 수상이 EU와 협상을 벌여 할인을 받았기 때문에 영국이 보내는 금액은 실제보다 1600억 원이 적은 3900억 원이라고 밝혔다.
  
 토비 하인스(Toby Haynes)가 연출한 TV영화 <브렉시트>(The Brexit: the Uncivil War)의 한 장면
ⓒ Toby Haynes
 
두 번째는 통계 자료의 고의적 왜곡 사용이었다. EU와 영국간의 자금 흐름을 분석할 경우, EU로 흘러가는 액수와 영국으로 들어오는 액수, 양쪽이 고려돼야 한다. 실제로 EU는 영국의 미발달 지역인 콘월과 웨일스 남쪽에 한 해 44억 파운드(약 7조원)를 보조했다. 하지만, 탈퇴 주장 측이 EU로 들어가는 자금만을 부각시킴으로써 EU-영국간의 불공정성이 부당하게 부풀려 있다고 설명했다.

'매주 5500억 원'이 왜곡된 정보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인식은 쉽게 수정되지 않았다. 브렉시트 선거 2년 후인 2018년 10월, 영국 킹스 칼리지는 여전히 42%의 영국인이 이 주장을 사실로 믿고 있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허위 정보로 정확하게 인식하는 경우가 36%이고, 22%는 불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짜 이상의 무엇

가짜 뉴스가 갖는 미스터리 중의 하나는 지속적인 힘이다. 위의 킹스 칼리지 연구에서 보이듯이, 사실 관계를 확인해주어도 왜곡된 부분은 허위 정보가 퍼질 때와 같은 속도로 시정되지 않는다. 가짜 뉴스라고 해서 순도 100%의 거짓은 아니기 때문이고, 객관적 정보가 뚫고 들어가지 못하는 부분, 즉 감정에 호소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매주 5500억원'의 통계 자료 왜곡보다 더 강한 것은 NHS(국가 의료시스템)가 영국인에게 갖는 정서적 호소력이었다. NHS는 노동당 클리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 수상이 설계한 2차 대전 이후 영국 질서의 핵심이다. 산업 혁명 이후, 영국 지성계는 '생산성이 급격히 향상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 사회 한 쪽은 더 빈곤해지는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정치권은 이를 '인간이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삶"은 무엇인가'라는 사회적 질문으로 전환시켰다. 의료를 기본적 복지로 택한 애틀리 수상은 1945년 노동당 최고 급진파를 보건부장관으로 임명, 수년간 지속된 반대를 물리치고 1948년 마침내 관철시켰다.  

1940년대 사회주의 및 수정 자본주의를 배경으로 태어난 NHS지만 다른 국가들도 복지의 일환으로 의료 보험제를 실시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급진성이 무디어졌다. 2010년대 NHS는 정치 이념을 떠나 영국성과 서민성을 상징하는 제도가 되었다. 이것이 잘 드러난 것이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이었다.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감독 대니 보일(Danny Boyle)이 총지휘한 개막식의 주제는 영국의 대중문화와 역사였다. 그 일부로, NHS를 상징하는 의사와 간호사, 300개 이상의 병원 침대가 등장했다.
  
 2010년대 NHS는 정치 이념을 떠나 영국성과 서민성을 상징하는 제도가 되었다. 이것이 잘 드러난 것이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이었다. 감독 대니 보일(Danny Boyle)이 총지휘한 개막식은 주제가 영국의 대중문화와 역사였다. 그 일부로, NHS를 상징하는 의사와 간호사, 300개 이상의 병원 침대가 등장했다.
ⓒ 연합뉴스/EPA
 
올림픽 개막식 다음 날 미국 몇몇 공화당 의원들은 NHS를 "사회주의화된 약"으로 묘사, 올림픽 개막식이 "좌파적 (left-wing)"이었다고 불편함을 표시했다. 대니 보일은 "그것은(NHS)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모든 영국인이 NHS의 중요성을 알고 있"으며 "영국 사회의 가장 중심적 가치는 누구인가에 상관없이 의료 영역에서 평등한 치료를 받는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보리스 존슨도 공화당 인사의 반응을 "난센스"라고 일축, NHS는 "영국을 위한 승리"였다고 했다.

NHS에 내포된 서민성이 포퓰리즘과 결합하고 영국의 자부심인 NHS가 반-EU 정서를 건드리는 것은 쉬웠다. EU로 흘러간 돈이 '우리 (영국) 서민'을 위하는데 사용될 것이라는 메시지는 '매주 5500억' 주장에 담긴 산술적 오류와 통계의 고의적 해석을 덮어 버렸다. 그리고 EU 잔류로 결정 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탈퇴로 결정났다.

국민 투표는 끝났다. 하지만, 가짜뉴스와 탈진실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영국 사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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