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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검증] 최재형의 할아버지 '최병규'는 진짜 독립유공자일까?

김학규 입력 2021. 08. 06. 07:12 수정 2021. 08. 10.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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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부터 이상한 '3대에 걸쳐 형성된 품격 있는 집안' 신화의 실체

[김학규 기자]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로 첫 공식일정을 시작한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부인 이소연 여사와 함께 5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임시 현충탑 참배소에 참배를 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2022년 대통령선거 정국이다. 각 당별로 선두를 달리고 있는 후보가 여론의 주목을 비교적 더 받고 있지만, 예측하기 힘든 변수가 많아 다른 주자들에 대한 관심도 만만치 않다. 그 중 하나가 감사원장직을 임기 중에 내려놓고 국민의힘에 입당한 최재형 예비후보다. 일부 언론에서는 '까미남'(까도 까도 미담만 나오는 남자)이라면서 여러 '미담'을 소개한다. 3대에 걸쳐 형성된 품격 있는 집안이라는 미담도 자주 거론된다. 독립유공자인 할아버지 최병규와 6.25 한국전쟁의 영웅인 아버지 최영섭을 이은 인물이 감사원장 출신의 최재형이라는 것. 사실이라면 분명 존경할 만한 집안이다.

이제 그 미담을 검증해보고자 한다.

[의문점] 보훈처 공훈록에 '독립유공자 최병규'가 없다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평강 출신의 최병규가 없다. 얼마 전 작고한 최재형의 아버지 최영섭(1928~2021)은 자신의 회고록 <바다를 품은 백두산>을 남겼다. 이 회고록에서 최영섭은 자신의 아버지 최병규(1909~2008)에 대해 "아버지는 2002년 10월 13일 항일독립운동 공로로 대통령표창을 받았지만 감옥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훈장은 받지 못했다"고 썼다. 하지만 2002년 10월 13일에 독립유공자 서훈이나 표창을 한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해 8·15 광복절을 앞두고 표창한 208명의 독립유공자 중에도 평강 출신의 최병규의 이름은 없다.(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캡쳐 사진)
ⓒ 국가보훈처
     
얼마 전 작고한 최재형 대선 예비후보의 아버지 최영섭(1928~2021) 해군 대령은 자신의 회고록 <바다를 품은 백두산>을 남겼다. 이 회고록에서 최영섭은 자신의 아버지 최병규(1909~2008)에 대해 "2002년 10월 13일 항일독립운동 공로로 대통령표창을 받았지만 감옥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훈장은 받지 못했다"고 썼다. 2008년 <강원도민일보>가 낸 최병규의 사망 소식 기사의 제목도 '춘천고 항일운동 주도 최병규옹 별세'였다.

이 정도면 최병규가 독립유공자라는 사실은 굳이 검증이 필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의구심이 생긴다. 대한민국이 인정하는 독립유공자를 소개하고 있는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평강 출신의 최병규가 없기 때문이다.

최병규의 아들 최영섭은 대통령표창을 받은 날짜까지 책 속에 적어놨다. 하지만, 기자가 국가보훈처에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받은 자료에 따르면 이 역시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2002년 10월 13일에 독립유공자 서훈이나 표창을 한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해 8.15 광복절을 앞두고 표창한 208명의 독립유공자 중에도 평강 출신의 최병규의 이름은 없다. 이로써 <바다를 품은 백두산>의 내용과 달리 최소한 대한민국정부가 인정하는 독립유공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최영섭이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바다를 품은 백두산>에 사실과 다른 내용을 적어놨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다른 주장도 등장한다. 앞에서 언급한 <강원도민일보>의 기사에도 "이같은 공로로 국가는 고인에게 표창 수여를 추진했으나 이를 사양하는 등 일제당시 독립운동을 국민의 당연한 도리로 생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라고 한 대목이 있다. 비록 아들 최영섭의 회고록 내용과도 배치된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3대에 걸쳐 형성된 품격 있는 집안'만이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감동적인 미담이 추가된다.

[아들의 회고록] 최병규 춘천고보 퇴학사건의 전말
 
▲ 춘천고보의 맹휴(1926) 최병규가 춘천고보에서 '퇴학처분'을 받은 것은 그해 10월 4일에 시작된 맹휴사건 때문이었다. 춘천고보 2, 3학년생들이 학교당국과 도학무국에 '탄원서'를 제출하면서 교사로서의 기본 자질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교무주임 모리(영어담당)를 배척하는 맹휴를 단행했던 것이다.
ⓒ 동아일보
   
위에서 제기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이제 최병규가 어떤 독립운동을 했는지 하나하나 직접 살펴볼 수밖에 없다.

지난 7월 19일 국민의힘 소속 정경희 의원은 최재형 예비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최재형 전 원장의 할아버지 최병규 선생은 강원도 평강 출신의 독립운동가다. 춘천고보 3학년 재학 중 순종황제가 승하하자 상장(喪章) 달기에 앞장섰다가 퇴학당했다"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정경희 의원의 주장은 최병규의 아들 최영섭의 회고록 <바다를 품은 백두산>의 내용과 비교해 보더라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아버지가 (춘천고보)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6년 4월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서거하자 갑조 조장 이영길과 같이 전교 학생들에게 '순종서거애도 상장(喪章) 달기' 운동을 주도했다. 2주 동안 상장을 단 이 운동은 일본경찰과 일본인 교사 삼광미(森廣美) 교무주임의 추궁으로 사건이 확대되었다. 아버지는 불온학생으로 낙인 찍혀 일본경찰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지만 좌등원장(佐藤元藏) 교장의 수습으로 일단락되었다.
 
순종 서거 당시 순종에 대해 애도를 표하는 것은 불온한 일이 전혀 아니었다. 자의든 타의든 대한제국을 일제에 넘긴 순종의 죽음에 일제는 적극 나서서 조의를 표했고, 조선인들이 조의를 표하는 행위 역시 막지 않았다. 다만 그 정도와 방식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을 뿐이다.

최영섭의 회고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당시 춘천고보 학생들은 순종의 서거에 대한 '봉도'를 위한 휴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실제로 춘천의 사립 정명여학교는 학교 차원에서 휴교를 했다. 그러나 춘천고보는 당국의 지침이 없다는 이유로 휴교를 단행하지 않았다. 이에 춘천고보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일제히 등교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휴교를 하루만 했다는 언론보도(<매일신보>)도 있고, 여러 날 했다는 언론보도(<시대일보>)도 있어 그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어쨌든 그 과정에서 3학년 을조 조장을 맡고 있던 최병규도 요주의 대상으로 지목을 받아 추궁을 당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것이 퇴학으로 이어질 사안은 아니었다.

정작 일제가 노심초사한 것은 순종의 서거를 계기로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불온한 언동'이었다. 일제는 7년 전 고종의 인산을 계기로 일어났던 3.1운동도 경험한 바 있었다. 실제로 순종 서거 이틀 후인 4월 28일에는 '송학선 의사의 의거'가 있었고, 인산일에 맞춰서는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6.10 만세운동'을 주도한 박두종, 이천진 등의 학생들은 당연히 퇴학은 물론 혹독한 고문과 함께 감옥살이까지 감내해야 했다.

6월 10일 전후로 춘천에서도 천도교교구장 허계훈의 집이 압수수색을 당하는 등 긴장도 있었지만, 이영길과 최병규 등 춘천고보의 3학년 조장은 1926년 당시 학생들의 슬픔과 분노를 6.10 만세운동과 같은 항일 독립운동으로 발전시켜낼 정도의 의지와 능력을 갖춘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병규가 춘천고보에서 퇴학 처분을 받은 것은 그해 10월 4일에 시작된 '맹휴사건' 때문이었다. 춘천고보 2, 3학년생들이 학교당국과 도학무국에 '탄원서'를 제출하면서 교사로서의 기본 자질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교무주임 모리(영어담당)를 배척하는 맹휴를 단행했던 것이다.

모리는 수업시간에 술을 먹고 교실에 들어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주정을 한다든지, 운동장 청소를 제대로 못했다고 돌로 학생의 머리를 내리치기도 하는 수준 미달의 교사였다. 그런데도 학교당국은 최갑도, 최병규 등 4명의 주동자를 맹휴시작 다음날 새벽에 전광석화와 같이 '퇴학 처분' 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했고, 이는 학생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맹휴가 1학년으로까지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 측에 설득된 학부형이 나서서 학생들의 등교를 설득하면서 춘천고보 맹휴사건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중단됐다.

춘천고보 맹휴사건에 대해 최영섭은 회고록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버지는 1926년 10월 4일을 기해 한국인 학생들을 멸시하고 구타, 폭언을 일삼는 일본인 교무주임 삼광미 교사 배척을 위한 전교생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일본경찰이 아버지를 체포하려 하자 교장이 사태수습에 나섰다. (중략) 결국 일본 당국은 아버지를 퇴학 처분과 함께 강제로 고향으로 귀향시켜 평강에서의 3년 거주제한, 일명 금족령을 내렸다.
 
최영섭은 아버지 최병규를 비롯한 4명의 학생이 퇴학당한 춘천고보 맹휴사건의 실체를 좀 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춘천고보 맹휴사건의 기본 성격은 당시 언론보도를 종합해볼 때 '한국인 학생을 멸시하는 일본인 교사 배척운동'이라기보다는 '학생을 구타하는 등 교사로서의 기본 자질을 갖추지 못한 모리 교사 배척운동'이라고 보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깝다. 당시 언론은 '조선인 차별의 언행'을 하는 일본인 교사를 배척하는 다른 학교의 맹휴를 보도할 때는 "일본인 교사 배척"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춘천고보 학생들이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이를 보다 분명히 드러내는 맹휴에 나섰던 사건은 3년 후인 1929년에 있었다. 그해 5월 춘천고보 학생들은 "조선역사 조선문법 조선어 시간을 연장할 것. 독서의 자유를 줄 것. 학우회를 일체 생도에게 위임할 것" 등을 내걸고 맹휴를 추진했다.

그런데 사전에 발각되면서 주동학생 6명이 무기정학을 당하면서 좌절되고 말았다. 하지만 춘천고보 학생들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벌어지자 이에 호응해 끝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다. 이 과정에서 주동학생 6명이 구속됐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때도 학교당국은 이들에 대해 출교조치를 단행했다. 춘천고보 학생들은 1938년에도 독립운동 비밀결사 '상록회 사건'으로 이연호 등 137명이 검거되고 36명이 송청되는 등 큰 수난을 당했다.

[증조부 최승현] 최병규가 일본당국으로부터 '3년 거주제한형'을 당했다고?
  
▲ 최병규의 아버지 최승현의 유진면장과 유도천명회 평강지회장 취임을 알리는 매일신보 기사  1904년부터 1906년까지 평강 공립소학교 부교원으로 일했던 최승현은 경술국치 이후 어느 시점부터 1918년 3월까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평강분국장을 지냈고, 1918년 3월부터는 유진면장과 고삽면장 등을 지냈다. 최승현이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면장을 계속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35년에도 유진면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최승현은 1921년에는 강원도 유도천명회(儒道闡明會) 평강지회 지회장도 맡았다.(매일신보, 1918. 3. 7 기사(왼쪽)와 1921. 9. 16 기사) .
ⓒ 매일신보
 
최영섭이 퇴학당한 아버지 최병규에 대해 "일본 당국은 아버지를 퇴학 처분과 함께 강제로 고향으로 귀향시켜 평강에서의 3년 거주제한, 일명 금족령을 내렸다"고 한 대목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구속돼 재판을 받은 것도 아닌데, 일본당국이 어떻게 3년 거주제한을 내렸다는 것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3년간의 거주제한형'이라고 표현해 재판 결과로 그러한 판결을 받은 듯이 묘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그런 죄목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최병규가 재판받기는커녕 구속된 사실조차 없다는 점에서 납득하기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를 일본당국이 아니라 최병규의 부모가 취한 조치로 받아들이면 말이 된다. 춘천고보에 유학 보낸 아들이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조치를 당했으니 아버지로서는 귀향과 함께 '근신'을 요구하면서 '3년 거주제한' 조치를 얼마든지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최병규의 아버지 최승현(1887~1953)이 어떤 인물인가 확인해보면 이러한 가설이 보다 설득력을 갖게 된다. 최승현은 최재형 예비후보의 증조할아버지이기도 하다.

1904년부터 1906년까지 평강 공립소학교 부교원으로 일했던 최승현은 경술국치 이후 어느 시점부터 1918년 3월까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평강분국장을 지냈고, 1918년 3월부터는 유진면장과 고삽면장 등을 지냈다. 최승현이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면장을 계속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935년에도 유진면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최승현은 1921년에는 강원도 유도천명회(儒道闡明會) 평강지회 지회장도 맡았다. 유도천명회는 3.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통치'에 힘입어 조직된 관변단체로 악화된 지방 민심을 수습하고 총독부의 시정방침을 선전하는 창구 역할을 하는 조직이었다.

강원도 당국의 적극 지원과 관료들이 함께 참여했던 유도천명회는 유교를 바탕으로 조선인을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드는 데 앞장설 목적으로 만들어진 서울의 경학원과도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최승현은 평강군에서 1943년에 펴낸 <평강군지>의 편집자가 돼 군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도 평강군 당국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최승현이었다면 춘천고보에서 퇴학당한 아들 최병규에 대해 '3년 거주제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최승현의 이력을 통해 최영섭이 <바다를 품은 백두산>에서 왜 할아버지를 철저히 배제했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최병규의 야심] 거주제한에서 풀려난 이후 그가 했던 일
  
▲ 최병규의 강원도회 의원 출마 소식을 알린 매일신보 기사(1937. 5. 8) 유진면 면협의원을 하고 있던 최병규는 1937년에는 평강군에서 1명을 뽑는 강원도회 의원 선거에도 도전한다. 이때 최병규의 나이는 스물아홉이었는데, 강원도회 의원 출마자 72명 중 양구에 출마한 정현수와 함께 가장 어린 나이였다.
ⓒ 김학규
 
최병규가 "3년의 근신이 끝난 뒤 처자식과 함께"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글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최병규가 만주로 간 것은 그로부터도 9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그렇다면 9년 동안 최병규는 무엇을 했을까? 이에 대해 최영섭은 <바다를 품은 백두산>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1926년 평강군 고삽면 사하리 독골로 귀향한 아버지는 금족령에 처해 있던 중, 필자가 태어난 1928년부터 1942년까지 평강군 유진면 사창리 주빈동(붉은봉) 일대에 약 200만 평의 산야에 약 40만 주의 낙엽송을 심었다. 붉은봉에 가택을 마련한 아버지는 1931년 식구들을 최병렬 큰아버지 가족으로부터 분가해서 평강군 유진면 사창리 주빈동 77번지로 이사했다.
 
그런데 최병규는 이 기간 나무만 심고 있진 않았다. 그러기에는 중흥시조를 꿈꾼 최병규의 '야망'이 컸다. 최병규는 유진면으로 이사 온 직후인 1935년에 유진면 면협의원에 이름을 올렸다. 통상 지역의 유지들이 맡는 자리임을 감안할 때 불과 스물일곱의 나이에 면협의원이 됐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놀라운 일은 이것만이 아니다. 같은 면협의원 선거에서 최병규의 형 최병렬도 고삽면 면협의원에 당선됐다. 이로써 아버지 최승현은 유진면 면장, 큰 아들 최병렬은 고삽면 면협의원, 둘째 아들 최병규는 유진면 면협의원을 동시에 하는 평강군의 유력 집안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하지만 최병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은 듯하다. 1937년 평강군에서 1명을 뽑는 강원도회 의원 선거에 도전했다. 이때 최병규의 나이는 스물아홉이었는데, 강원도회 의원 출마자 72명 중 양구에 출마한 정현수와 함께 가장 어린 나이였다.

면협의원이야 말단 기관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강원도회 의원에 도전했다. 비록 낙선했지만, 문제는 도전했다는 것 그 자체에 있다. 최병규가 도전했던 강원도회는 3.1운동을 경험한 일제가 조선인의 독립요구를 무마하고자 '자치'를 운운하면서 1920년부터 만들었던 도 단위 자문기관이었다.

말은 도민의 의사를 반영한다고 하지만, 최병규가 강원도회의원이 되겠다고 출마했던 1937년 당시 강원도 인구 약 160만 명 중 선거에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유권자는 1790명에 불과했다. 31명의 의원 정수 중 21명이 민선의원, 10명이 관선의원이었다. 관선의원은 대부분 일본인이 차지했다. 민의를 수렴한다는 것은 애당초 가능하지 않았다.

강원도회 의원의 지위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된 후 만들어진 '반민족행위처벌법'에서 "도, 부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의 의원이 되었던 자로서 일정에 아부하여 그 반민족적 죄적이 현저한 자"(제4조 8호)로 친일 반민족행위자 처벌이 가능했던 자리기도 했다. 이 기간 최병규는 아버지 "회갑 축연비를 절약하여 일금 20원을 국방헌금에 헌납"(1938. 6. 30 <매일신보>)하기도 한다.
 
▲ 최병규의 국방헌금 '미담' 기사(매일신보, 1938. 6. 30) 최병규는 아버지 "회갑 축연비를 절약하여 일금 20원을 국방헌금에 헌납"(1938. 6. 30 매일신보)하기도 한다. 회갑 축연비를 알뜰히 쓰고 돈을 남겨 국방헌금에 헌납했다는 이야기는 당시에 일제에게는 '미담 중의 미담'이었다.
ⓒ 매일신보
 
[의문의 클라이막스] 최병규는 정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을까?
최영섭의 회고록 <바다를 품은 백두산>은 아버지 최병규의 일제 말기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38년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 목단강성 해림가(海林街)로 건너갔고, 1940년에 어머니를 비롯한 우리 가족들을 해림으로 불러들였다. 아버지는 7년간 해림에서 살면서 해림가 부가장(海林街 副街長)과 조선거류민단장을 맡아 독립자금 확보와 전달 역할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아버지는 해방되기 전 1944년 12월 가족들을 데리고 할아버지가 사시는 평강군 유진면 후평리로 돌아왔다.
 
1920년대 춘천고보 시절의 활동만으로 독립유공자라고 하기에는 좀 낯뜨거울 수 있지만, 1938년 이후 만주로 망명해서 독립운동에 나섰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춘천고보 시절의 활동도 비록 부족했지만 만주에서의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과정으로 의미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도 의구심이 발생한다. 1938년부터 1944년까지 무려 7년 동안 벌인 선친의 '독립운동기'를 이렇게 한두 줄의 설명으로 그치고 있으니 말이다. 앞에서 살펴본 1926년의 춘천고보 시절 이야기를 상세하게 기록한 것과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당연히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먼저 1938년에 최병규가 목단강성 해림가로 건너간 이유가 '과연 독립운동을 위해서였을까' 하는 의문이다. 아버지의 3년 거주제한 조치도 감내한 후 강원도 평강에서 면협의원을 하고, 도회 의원에도 도전하고, 아버지 회갑연을 알뜰히 마치고 돈을 남겨 일제에 국방헌금까지 바쳤던 인물이 갑자기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났다면 납득할 만한 이유나 동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

해림에서 살면서 해림가 부가장과 조선거류민단장을 맡았다는 대목에 이르면 의문은 더 증폭된다. 1931년 만주를 침략한 일제는 1932년에 오족협화(일본인, 조선인, 한족, 만주족, 몽골족)를 이데올로기로 내세운 괴뢰 '만주국'을 세워 만주 일대를 장악했다. 항일무장투쟁 세력이 조·중연합군을 형성해 대항하고 있었지만, 주요지역은 이미 다 일제의 치지였다. 목단강성 영안현 해림가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따라서 해림가 가장이나 부가장이라는 자리는 만주국 행정체계의 말단 조직을 의미한다. 조선거류민단장 역시 일제가 조선인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만든 관제민간조직답게 특별한 조선인만이 맡을 수 있는 자리였다. 이 두 기관에서 부가장과 단장을 맡았다는 최병규는 그 자체로 최소한 일제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해림가 부가장과 조선거류민단장이 당시 하는 일은 국방헌금이나 애국기 헌납금을 잘 걷는 일, 방공훈련에 주민들 잘 동원하는 일, 일제의 중국침략을 비롯한 '대동아전쟁(아시아-태평양전쟁)'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창구역할을 잘하는 일 등이었다. 
 
▲ 해림에서 애국기2기에 해당하는 금액을 헌납했다는 매일신보 기사(1945. 3. 29) 해림가 부가장과 조선거류민단장이 당시 하는 일은 국방헌금이나 애국기 헌납금을 잘 걷는 일, 방공훈련에 주민들 잘 동원하는 일, 일제의 중국침략을 비롯한 '대동아전쟁(아시아-태평양전쟁)'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창구역할을 잘하는 일 등이었다.
ⓒ 매일신보
   
결국 해림가 가장과 조선거류민단장을 맡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는 것은 독립운동의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는 정반대의 근거 자료를 제시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물론 여전히 다른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런 직책을 맡은 이유가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적진에 깊숙이 침투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지위를 이용해서 독립자금 확보를 누구로부터 얼마나 '은밀하게' 했는지, 그렇게 마련한 독립자금을 누구에게 '은밀히'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최병규의 행적에 쏠린 의혹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의혹] 최병규 만주 진출의 진짜 목적

기자는 이상의 분석을 통해 최병규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간 게 아니라, 만주 개척을 위한 일제의 정책에 호응해서 만주로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추가로 제기하고자 한다.

일제는 1937년 목단강성을 새로 만들면서 대대적인 이민 정책을 추진했다. 최병규가 만주로 건너갔다는 1938년에도 일제는 넓은 만주에 "자유이민 문호를 광개"한다면서 "영농 목적의 만주이민 취급 요강을 발표"했다. '중앙개척협회'도 만들고 도별로 '조선이주협회'라는 민간단체도 만들어 이주희망자를 모집했다.
 
▲ 개척결혼을 위해 해림으로 간 전남지역 여성들 이야기(매일신보, 1943. 9. 15)  일제는 1937년 목단강성을 새로 만들면서 대대적인 이민 정책을 추진했다. 최병규가 만주로 건너갔다는 1938년에도 일제는 넓은 만주에 "자유이민 문호를 광개"한다면서 "영농 목적의 만주이민 취급 요강을 발표"했다. '중앙개척협회'도 만들고 도별로 '조선이주협회'라는 민간단체도 만들어 이주희망자를 모집했다.
ⓒ 매일신보
   
아버지 최승현은 면장을 오랫동안 지내면서 일제의 식민정책에 충실히 복무해왔고, 본인은 고향 평강군 유진면에서 면협의원까지 하고 있었으니 이러한 일제의 정책은 최병규의 구미를 당겼을 가능성이 있다. 더군다나 아버지 최승현은 1917년 <매일신보>가 주최한 '만주시찰단(단장 조중응)'의 일원으로 만주를 방문해본 경험이 있었다. 최병규도 어린시절 아버지를 따라 만주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최병규가 해림가 부가장과 조선거류민단장을 맡았다는 사실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과 조합할 때 갖는 어려움과 달리 강원 지역에서 모은 만주 개척단원들을 이끌고 만주로 간다는 내용과의 조합은 비교적 자연스럽다. 이럴 때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난 지 1년을 경과한 1939년에도 유진면 협의원에 또다시 선출됐다는 <매일신보>의 보도 역시 의문이 풀리게 되고, 왜 해방될 때까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지 않고 1944년 12월에 귀향했을까 하는 의문도 풀 수 있다.

이상을 통해서 우리는 최병규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나아가 최병규는 독립유공자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친일 의혹이 다분한 인물이라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3대에 걸쳐 형성된 품격있는 집안'이라는 최재형 예비후보 집안에 대한 '미담 신화'는 출발부터 당사자들에 의해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확인된다.

* <오마이뉴스>는 지난 3일부터 최재형 예비후보 측에 표창 진위 여부와 조부 독립운동 관련 자료 등 반론을 수차례 요청했지만 응답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인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4일 오후 경기도 파주 미라클스튜디오에서 대선 출마선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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