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韓분단에 대한 미국 책임 걱정했었다[한국 역사를 바꾼 오늘]

워싱턴=CBS노컷뉴스 권민철 특파원 2021. 8. 15.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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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은 어떻게 분단절로 둔갑했을까
미군정, 점령 일주일 만에 한국실상 파악
한 달 뒤 "한국 수준 높아, 신탁통치 반대"
맥아더, 3상회의 직전 "신탁 철회" 상소
신탁강행 이후 좌우대립 극심..테러 만연
"신탁통치 결정, 분단의 중요한 전환점"
편집자 주
1945년 8월 15일 찾아온 해방은 역설적이게도 민족 분단의 신호탄이었다. 광복 직전 미국이 제안하고 소련이 동의했던 38도 경계선이 분단의 맹아였다면, 광복 이후 미국이 제안하고 소련이 동의했던 한반도 신탁통치 결정은 분단의 초석이었다. 그런데 당시 남한을 점령 중이던 미군(美軍)은 한반도 신탁통치는 재앙이라며 본국의 지침에 극구 반대했다. 당시 미국정부 비밀문서들을 보면 광복절이 분단절로 바뀐 것은 미국정부의 오판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 소식지. 오늘쪽 위 검은 상자에 의제 D로 한국의 신탁문제가 표시돼 있다. 출처: 미국 국립문서보관청(NARA)
한국을 신탁통치하기로 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있기 열흘 전인 1945년 12월 16일. 도쿄에 진주해 있던 더글러스 맥아더 미 일본점령군 최고사령관은 상부에 전문을 보낸다.

남한 통치자였던 미군정 존 하지 장군이 작성한 '한국 상황'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주목해 달라는 내용이다.

맥아더가 첨부한 해당 문서는 미국정부의 신탁통치 전략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미국정부는 1943년부터 한국의 신탁통치안을 구상하고 줄곧 추진해왔던 터다.

1945년 12월 16일 맥아더 사령관이 합동참모부에 올린 전문. 출처: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DIPLOMATIC PAPERS, 1945, THE BRITISH COMMONWEALTH, THE FAR EAST, VOLUME VI(이하 국무부)

맥아더가 첨부한 문서는 끝으로 5개 사항이 긴급히 요구된다고 결론짓고 있다.

1945년 12월 16일 맥아더 사령관이 합동참모부에 올린 전문. 출처: 국무부

이렇게 남한의 미군정이 모스크바 3상회의를 앞두고 신탁통치 철회를 본국에 요구했던 것은 당시의 한국의 열망 때문으로 보인다.

신탁통치 반대 및 즉각적 독립을 바라는 한국 국민들의 여론을 현장에서 가장 잘 알고 있던 미군정이 당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고한 것이다. 

그러나 열흘 뒤 미국, 소련, 영국은 모스크바에서 한국에 대한 최장 5년간의 신탁통치에 끝내 합의하고 만다.

합의 사흘 뒤 이후 미군정은 당시 한국의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1945년 12월 30일 미군정 정치고문실의 아서 에몬스가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 출처: 국무부

물론 2년 뒤 신탁통치 결정은 신탁통치 방법론을 놓고 미국과 소련 간의 간극이 좁혀지지 않아 없던 일로 됐다.

그러나 신탁통치 결정 이후 한반도는 찬탁과 반탁으로 갈려 극심한 갈등과 혼란으로 난장판이 된다.

미군정은 바로 그런 상황을 우려했기 때문에 신탁통치 전략 철폐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미군정은 12월 16일 이전에도 여러 차례 비슷한 내용을 상부에 보고했다.

가장 먼저는 미군정이 남한 점령을 한 뒤 정확히 일주일 만에 나왔다.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점령을 시작한 미군정 관계자들이 당시 남한사회를 이해하기 시작한 직후다.

1945년 9월 15일 미군정 정치고문 베닝 호프가 국무장관에게 올린 전문. 출처: 국무부

미군정은 한 달 뒤에도 비슷한 전문을 본국에 올렸다.

한달간 한국을 관찰하면서 한국을 새롭게 발견한 것에 대한 참회록처럼 읽히는 글이다. 핵심 내용은 역시 신탁통치가 한국의 현실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1945년 11월 20일 미군정 정치고문 랭던이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 출처: 국무부

그러나 끝내 이런 현장의 목소리는 묵살됐다.

특히 11월 20일 정치고문 랭던의 보고에 대해 국무부는 오히려 아래와 같은 지침을 하달했다.

1945년 11월 29일 미국 국무장관이 미군정 정치고문 대행 랭던에게 보낸 전문. 출처: 국무부

미국의 이 같은 입장대로 한 달 뒤에 열린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국 한반도 신탁통치가 결정됐다.

신탁통치 정국이 펼쳐지기 전까지 만해도 한반도에서는 일제청산, 친일척결이라는 단일 목표에 국민적 열의가 집중됐다. 

그러나 신탁통치 결정 이후 일제극복이라는 대의명분은 사라지고 대신 찬탁 대 반탁으로 국론이 극심하게 분열된다.

고려대 정일준 교수(사회학)는 "그때 까지는 한반도에는 미국과 소련에 의한 군사적 분할이 있었다. 그러나 신탁통치 결정 이후에는 권력의 블록화, 즉 정치 세력화에 의한 국토 분단이 생긴다. 결국 신탁통치 결정은 외적 분할이 내적 분단으로 가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다"고 말했다.

남한에서 찬탁 반탁 세력 간 사생결단식 투쟁 속에 해방직전 미국이 편의적으로 그은 지도위의 38도선은 점차 사실상의 '국경선'으로 굳어져 갔다.

결국 남북한은 단독정부 수립으로 제 갈 길을 걷게 됐고, 당초 신탁통치 로드맵에 따라 늦어도 한국의 독립이 실현될 것으로 예상됐던 1950년, 한반도에선 독립대신 동족상잔의 비극이 터지고 만다.

당시 미국은 전후 처리를 하면서 제국주의 식민 국가들에 공통적으로 신탁통치를 적용하려고 했던 만큼 한국도 예외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극복과 독립에 대한 열의가 지구촌 어느 나라보다 강렬했던 한국적 상황에 대한 몰이해에서 수립됐던 미국의 1940년대 한반도 정책은 결과적으로 분단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취재지원: 한국언론진흥재단

워싱턴=CBS노컷뉴스 권민철 특파원 twinpine@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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