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사카 유지 "日, 코로나 대응 실패로 정권교체 시발점"[만났습니다]

정다슬 2021. 8. 17. 06:0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日, 미국과 중국에는 징용 피해자 화해 허용
韓에게만 이상한 국가 내세워
日인권 경시 모습, 국제사회에도 알려져
극우 알아야 극일할 수 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가 10일 이데일리 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이영훈 기자)
[이데일리 정다슬 기자] “주요 선진국에는 (한국과 비슷한 성격의) 국가인권위원회라는 게 있다. 일본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권 문제에서 미흡한 부분이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지난 10일 서울 중구 이데일리 본사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일본에 인권위가 없는 이유로 위안부, 강제징용 문제를 꼽았다. 현재 일본은 지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과 2015년 위안부 합의 등을 예로 들면서 이들 문제가 ‘법적으로’ 모두 끝난 얘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인권 차원에서 접근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과거 일제 강점기 일본이 한 인권유린의 사례를 도덕적 측면에서 접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호사카 교수는 이에 “법이 아닌 화해 측면에서도 접근할 수 있으며, 실제 일본은 중국, 미국 등과는 강제징용에 대해 화해했다”며 “한국에만 이상한 논리를 내세우는 셈”이라고 강조했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일본의 모순적 태도가 국제사회에서 점차 알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호사카 교수는 △일본이 군함도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면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유네스코가 ‘강한 유감’을 표시한 점 △‘위안부는 계약 매춘부’라는 존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로스쿨대 교수의 논문이 큰 비난을 받고 아직까지 학술지에 실리지 않는 점 △독일 베를린 소녀상이 영구설치된 점 등을 사례로 들었다. 그러면서 이같은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한국이 정확하고 올바르게 이겨내면 일본 역시 납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호사카 교수는 한일관계 개선의 가장 큰 조건은 일본 극우세력의 약화를 강조했다. 태평양전쟁 1급 전범으로 기소된 기시 노부스케의 손자인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집권한 8년은 이같은 극우세력의 목소리가 힘을 얻던 시기였다. 그는 “어느 나라에서 1급 전범 용의자가 풀려나 수상까지 하느냐”면서 “미국이 냉전시대 일본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단죄하지 않는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왜 일본이 이렇게 됐는지 한국에서도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며 “일본 상황을 정확하지 보지 못하면 감정적으로만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다만 최근 일본 정치권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것은 그나마 희망적인 일이다. 아베 내각이 물러나고 그 뒤를 물려받은 스가 요시히데 내각조차 코로나19 대응 실패로 흔들리고 있다. 호사카 교수는 “한일관계 개선의 첫 번째는 혐한을 부추기는 일본 극우를 약화시키는 것”이라며 “힘이 약한 야당이 연대를 통해 자민당 일당독주를 막아내려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호사카 교수와의 일문일답.

- 한국에 온 지 33년이 됐다. 한·일 관계의 변천사를 본 산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봤던 기억이 난다. 그때도 한·일 관계가 아주 좋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지금보다는 대화할 수 있는 시기였다.

한국에 온 지 3년 후부터 위안부 문제가 불거졌다. 일본 극우세력이 위안부를 매춘부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1993년이다. 동시에 고노담화가 발표되면서 일본이 사과했고, 위안부를 강제적으로 연행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극우세력은 위안부를 부정하기 위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95년은 무라야마 담화가 있었던 시기다. 그때도 극우세력은 상당히 반발했다. 정치적 목표가 고노담화, 무라야마 담화를 부정하는 데 집중됐다. 극우 성향의 학자가 동원되며 논리화가 시작되고 이론도 만들어졌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한국에 유입되며 친일파들이 만들어졌다.

1998년은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의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파트너십’이 있었다. 일본은 과거 가해자였다는 인정하는 문서를 공식문서에 담았다.

극우도 가만있지 않았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2001년 교과서 문제를 일으켰다. 당시 한국은 일본에 35군데 수정요구를 했지만, 일본은 두 군데 수용하는데 그쳤다. 김 전 대통령은 ‘일본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며 굉장히 화를 냈다고 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기 시작하고, 한국과의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래도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공동 개최하고 ‘겨울연가’로 한류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 갈등과 화해에 대한 노력이 계속 공존하던 시기였던 것 같다.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면서 한·일 관계가 진짜 악화됐다. 같은 해 공교롭게도 아베 2차 정권이 시작됐다. 아베 정권은 한국과 북한을 공격해서 지지율을 올렸다. 시마네현 지역 행사인 ‘다케시마의날’에 차관급 인사를 파견해 국가행사로 승격시켰다. 혐한 시위가 시작된 것은 2006년이다. 혐한 시위 세력과 아베 라인이 연결돼 있는 것은 포착된 사실이다.

박근혜 정권 때도 한·일 관계가 굉장히 좋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세계 어디를 가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의 앞뒤가 맞지 않은 대응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때부터 일본 극우 세력은 경제적으로 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 문서로 남아 있다. 이게 2019년 경제보복으로 이어진 것이다.

- 2015년 위안부 합의가 체결됐지만, 오히려 불씨만 키운 듯하다.

△위안부 합의로 한·일 관계의 주도권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박근혜정부는 국민적 합의 없이 지소미아(GSOMIA)를 체결했다.

지소미아는 시작에 불과하다. 지소미아 이후에는 상호군수지원협정(ACSA·악사) 체결이 예정돼 있었다. 악사는 전쟁터 무기교환 협정이기 때문에 사실상 한·일 군사동맹이다. 일본 극우 세력은 한국을 앞세워 북한과 중국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이 강하다. 만약 이것을 맺었다면 한국이 불바다가 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계획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무산됐다.

- 왜 일본에서는 극우세력이 이렇게 힘을 얻게 됐나.

△단죄하지 않은 결과이다. 아베 전 총리와 같은 사람이 독일에는 없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 1급 전범(기시 노부스케, 아베 전 총리의 외조부)이 풀려나 수상까지 하냐. 일본 극우는 지금까지 미국과 붙어서 커왔다. 이런 부분이 한국에서 교육돼야 한다. 단순히 일본이 잘못됐다고만 하지 말고, 일본이 왜 이렇게 됐는지 역사에 대해 일본인과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화를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극일(剋日)할 수 있다.

- 한일 관계 개선방법은 무엇일까.

△혐한을 부추기는 일본 극우가 바뀌어야 한다. 그간은 국내문제에 대한 눈을 돌리기 위해 한국과 북한을 때렸지만, 지난 8월 내각 지지율은 28%로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런 일본 정부를 일본 국민들이 계속 지지할지는 미지수다. 코로나 대응 실패로 일본 정권 교체의 시발점이 만들어지고 있다. 현재 자민당은 공명당과 연립하고 있지만, 공명당은 극우가 아니다. 야당이 좋은 성적을 낸다면 공명당은 야당 쪽과 손을 잡을 가능성도 있다. 자민당 역시 아베 내각 퇴진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본다. 아베 전 총리는 명백하게 극우세력과 연결돼 있다. 그러나 스가 총리나 차기 여성 총리로 거론되는 고이케 도지사는 이념적으로 자유롭다. 그저 권력욕이 있는 정치가로 환경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

정다슬 (yamye@edaily.co.kr)

Copyright © 이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